단거리 육상의 신기록 제조기라 불렸던 칼 루이스에게는 잘 알려진 일화가 있다. 그는 100미터 경주에서 80미터 지점에 오면 항상 씨익 웃었다. 그 이유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말했다.

"나머지 20미터는 웃기 때문에 더 잘 달릴 수 있다."

백신 접종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코로나19 대유행처럼, 마지막 20미터는 단거리 주자에게 이를 악물고 죽어라 달려야 할 최후의 순간이다. 잔뜩 찡그리기 쉬운 그 고통의 순간을 오히려 웃으며 달리면 더 잘 달릴 수 있다는 그는 지구촌의 '갈색 탄환'으로 우뚝 섰다.

매일 <아침편지>에서 마지막에 보내는 인사가 있다.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

어떤 이는 "딱히 웃을 일도 없는데 억지로 웃으라는 거냐" 라고 말하기도 하고 "형식적이고 가식적으로 웃는 게 무슨 의미가 있죠!"라고 묻기도 한다. 물론 일부러 웃는 것보다는 정말 즐거워서, 기쁨이 차올라서 웃는 웃음이 더 아름답고 행복하다.

그렇다면 '기쁨이 차오르는' 웃음은 언제 가능할까? 바로 자기 안에 웃음의 저장과 있고, 의식의 수준이 높을 때이다.

고도원 아침의편지문화재단 이사장
고도원 아침편지문화재단 이사장

의식의 수준은 사람마다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칼을 들고, 어떤 사람은 빙긋이 미소를 짓는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어떤 사람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하고 어떤 사람은 다시 도전한다.

그 의식의 수준을 스스로 높이기 위해서는 삶 속에서 늘 새로운 깨달음이 필요하다. 깨달음은 외적 조건이 아니다. 내적 조건이다. 주어진 외적 조건은 그대로인데 내적 깨달음을 동해 정반대 방향의 조건으로 바꾸는 것이다.

어제까지는 슬픔의 조건으로 받아들였던 일을 기쁨의 조건으로 바뀌게 하는 힘이 비로 깨달음이다. 절망스럽다.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사실이 어느 순간 '아 이게 불행의 조건이 아니고 나에게 배움의 기회이고 행복의 조건이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기쁨이 솟아나온다. 웃음의 저장소에 '기쁨'이 차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깨닫고 행동하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더러 한순간에 섬광 같은 깨달음이 올 수도 있지만, 그런 기쁨의 순간을 지속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하다.

웃을 일이 없을 때, 여전히 나를 둘러싼 상황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 웃어보는 것이다. 마치 누가 다정하게 내 어깨를 다독이고 쓰다듬어주어 스르르 마음이 열리듯이 말이다. 아무리 힘들었던 사람도 좋은 사람이 진심을 담아서 정성스럽게 쓰다듬어주면 마음이 녹고 고통을 잊게 된다. 그처럼 내가 나 자신을 쓰다듬으며 웃어보는 것이다.

이렇게 밖에서 안으로 기쁨과 밝은 에너지를 쏘아대다 보면 자연스럽게 몸이 반응하기 시작한다. 굳었던 세포들이 풀리고 편안해지고 얼굴이 맑아지고 빛이 난다. 삶의 조건은 그대로이지만 마음이 달라진다.

일부러라도 웃는 것을 자꾸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내면의 기쁨과 외면의 웃음이 만나는 때가 온다. 그것이 몸으로 체화되고 삶으로 녹아들게 되면, 많은 일들이 즐겁고 행복하고 감사하고 고마운 것으로 바뀐다. 그리고 삶도 바뀐다. 그래서 매일 서로 웃음을 선사하며 살자는 것이다.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

 

힐링코리아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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