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시민들, 국회에서 기자회견 열어 정치권의 난맥상 성토해」
「만민공동회, 메니페스토, 월가를 점령하라, 그리고 손바닥 헌법책」
「변화의 주체가 외치는 함성, 여야 없이 헌법대로 하라!」

어느 기자회견

쌀쌀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3‧1절 오전, 지인을 만나기 위해 국회 정론관을 찾았다. 11시가 되자, 낯이 익은 것도 같은 인사 몇몇이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정치를 외면한 대가는 저질스러운 인간들의 지배를 부른다. 플라톤이 한 말입니다. 정치 참여, 중요하죠. 하지만 헌법을 모르는 정치 참여 역시 저질스러운 지배를 부르기는 마찬가집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헌법을 알게 되면 정치권이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강은빈 학생, 박은희 교사, 김용택 교육 칼럼니스트, 이부영 전 전교조 위원장, 연성수 민주평화교육원 추진위원장, 홍윤기 동국대 교수,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우리헌법읽기국민운동 추진위원회’라는 단체의 기자회견이었다. 헌법 읽기? 진보 진영이 총선을 위해 기획한 기자회견인가?

▲ 국회 앞마당에 모인 시민들 ⓒchamstory.tistory.com

자문위원 1,000명의 명단을 살펴보니 각계 인사들을 포함해 교수가 5명, 현역 구청장, 시장 등 단체장이 20여 명이었다.

참석자가 소개되고 추진위원들의 경위 설명과 회견문 낭독, 자문위원 대표의 참여의 변 등이 진행되는 동안, 상주 기자단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날만 새면 들어왔던 그저 그런 당위와 결기에 찬 언사들...

정치를 보는 국민들의 시각

그런데 회견에 배석한 시민들의 발언이 시작되자, 조용하던 회견장에 생기가 돌았다.

“우리나라 정치인들 보면요, 헌법대로 안 해요. 헌법 10조인가...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나와 있는데요, 저는요, 지금 절대로 행복 안 하거든요.”

“정치권 보면 사람들도 저처럼 생각하실 텐데 말입니다. 샌더슨인가 샌달인가, 하이간에 정의라는 책 쓴 사람 있잖습니까, 그게 우리나라에서는 안 통하는 거거든요. 부정이 정의가 되고, 헌법 지킬 생각은 안 하고 그걸 어떻게든 묘하게 빠져나가고, 정치가 이래요. 자기들 속셈만 채울라구요. 이런 술수 같은 거, 당파싸움, 이런 거에는 여야가 따로 없잖습니까!”

“우리나라 국민들, 얼마나 대단해요? 전쟁 후에 이렇게 빨리, 세계 10위라면서요? 이렇게 빨리 성장한 나라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습니까? 근데 교육은 선별이다 보편이다 하는 걸로 싸우고, 애들한테는 헬조선이고, 국민은 선거 때만 왕 아닙니까? 저도 요새 장사가 안 돼서 미칠 지경입니다. 이게 다 정치인들이 헌법대로 안 해서, 아 물론 국민들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아무튼 헌법대로 안 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스무 살 학생 강은빈입니다. 학교에서도 읽지 않았던 헌법을 찾아 읽으면서, 저는 헌법이 우리 일상 속에서 살아 숨 쉬었으면 하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의와 사랑이 자꾸만 빛을 잃어가는 요즈음, 이 운동이 대한민국의 등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헌법의 주인도 국민이고, 주인공도 국민입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인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말에 총선용 기자회견쯤으로 생각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 기자회견 중인 우리헌법읽기국민운동 추진위원단 ⓒchamstory.tistory.com

또 다른 메니페스토, 손바닥 헌법책

회견장 뒤쪽에 있던 누군가가 다가와 아주 작은 책자와 A4지를 내밀었다.

“이거 저희가 만든 손바닥 헌법책입니다. 정말 작죠? 그리고 이건 결의문인데요, 한번 읽어 보시겠어요?”

결의문 서두에 프랑스 인권선언 제16조(1789년)가 적혀 있었다.

「권리의 보장이 확보되지 않고 권력분립이 되어 있지 아니한 모든 사회는 헌법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이 운동은 보수 진보 나누고 지역 학벌 따지는 이념 운동이 아니라, 정치인들이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헌법이라는 잣대로 국민이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존립 근거와 목표가 헌법에 이미 제시되어 있는데, 정치인들은 헌법을 무시한 채 당리당략만 추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헌법대로 건강하게 경쟁하라고, 국민들이 그걸 감시하자고, 그래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출발한 운동입니다. 정치가 제대로 안 하면 결국 우리 손해니까, 우리가 야단쳐야지요. 헌법으로요.”

▲ 손바닥 헌법책 표지 ⓒ우리헌법읽기국민운동 추진위원회 제공

설명을 들어보니 다수 시민의 입장과 의식이 반영된 정치시민운동이었다. 이런 정치시민운동의 예는 많다. 멀게는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패정치 척결, 내정개혁, 그리고 참정권 획득을 위해 조직되었던 ‘만민공동회’부터 가깝게는 캐나다 잡지 「애드버스터즈」가 부조리한 경제현실을 규탄하며 미국 금융가를 행진했던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가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예는, 영국 총리를 지냈던 토니 블레어가 1997년에 제시했고, 2006년 지방선거 당시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되었던 정치 감시활동, 즉 후보들의 공약을 따져보고 당선 후 공약 이행 여부까지 감시하는 메니페스토Menifesto다.

변화의 주체는 국민

민족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국가의 능력을 가늠하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 10위권까지 달려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치는 그 대열에서 제외되어 있다.

우리 정치권은 국민의 행복을 책임지기는커녕 진보와 보수의 진부한 이념 대립도 모자라 지역주의까지 부추겨가며 기득권 지키기에 몰두해왔다. 정치권의 이런 난맥상 탓에 국민들은 지역‧계층‧분야‧직업별로 낱낱이 갈라져버렸고, 헌법이 규정하는 자유와 평등과 행복을 향한 국민적 여망은 선거 공약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 설전 중인 여야 국회의원 ⓒmedia.daum.net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근본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일견 정치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 역시 책임의 근본 주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정치란 정치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올바른 정치의 혜택을 누리는 주체가 국민인 것처럼, 잘못된 정치현실에 대한 책임 역시 국민에게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국민 모두가 정치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정치를 어떻게 대해왔던가? 대의민주제에 대한 지나친 신념에 기댄 나머지, 4년마다 표 한 번, 5년마다 표 한 번으로 정치를 해왔지 않았던가.

돌이켜보면 ‘대한민국은 모든 권력이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를 대놓고 무시해 온 주체는 다름 아닌 우리 국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빈약한 정보를 토대로 표만 달랑 던지고 나서 4-5년 동안 열심히 욕만 해댔으니 말이다. 국민, 즉 주권자가 바뀌어야 하는 당위가 여기에 있다.

주권자를 규정해 놓은 헌법 제1조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을 추구할 권리, 인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등 헌법에 정의된 가치들이 온전히 살아나고, 그래서 그 가치들이 우리 사회의 정의로 흐를 수 있도록 하려면, 심부름꾼인 정치인보다는 주권자인 국민이 바뀌어야 한다.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 정치를 잘 모른다는 외면, 정치인들이 알아서 잘하겠지 하는 방관, 보수가 아니면 종북이라는 배척, 진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오만. 이 모두가 2016년 대한민국 주권자들의 모습 아니던가.

헌법대로 하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모든 정치세력이 개혁과 평화통일에 기여하고 사회적‧행정적‧정치적 폐습과 불의를 혁파하는 데 앞장서게 해야 한다. 각종 법규와 제도의 질을 높이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존엄과 행복과 자유와 평등과 질서를 위해 변해야 하며, 변화의 주체는 바로 우리들, 대한민국의 주권자들이다. 우리 모두 그런 변화의 길에 나서서 핑계와 외면과 방관과 배척과 오만이라는 분리주의의 틀에 갇혀 사는 이웃들을 책임과 직시와 관여와 포용과 겸양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대 통합의 광장으로 인도해야 한다.

국회 정론관에서 헌법대로 하자며 기자회견을 하던 사람들, 대통령을 비롯한 선출직 공무원들이 ‘손바닥 헌법책’ 인증샷을 올리게 만들겠다던 아줌마들, 헌법에 위배되는 법과 시행령, 대통령령, 조례 등의 폐지에 앞장서겠다던 아저씨들, 그것도 모자라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을 연구하는 연구회까지 조직하겠다던 부모들, 그들은 그런 변화의 길을 모색하는 주권자들 중 일부임이 분명하다.

11시 30분, 국회 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은 120여 명의 주권자들로 북적였다. 아이들은 교수님들이 발언 중인 무대를 활보하고, 사진 기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청중석을 돌아다니고, 청중석으로 내려간 마이크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 권위가 사라진 행사장 전경 ⓒchamstory.tistory.com

그런 난리법석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사람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분위기, 그 분위기를 지배하는 것은 책임과 직시와 관여와 포용이었다. 참으로 오랜 기간 회의실 의자들을 메꿔왔을 정치인들의 핑계와 외면과 방관과 배척 위로, 주권자들이 뿜어내는 개인의 존엄과 행복, 자유, 평등의 편린들이 비행하고 있었다.

최근 이 모임 관계자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파안대소하며 그간의 경위를 설명해주었다.

“헌법대로 하자는 캐치프레이즈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어요. 작게 시작했던 운동이 벌써 손바닥 헌법책 3만부 완판으로 이어졌고, 10만 부 발행을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헌법대로 하지 않는 정치를 없애자는 국민적 여망이 아닐까 싶군요... 이제 국회의원 후보들, 자치단체장들로 하여금 헌법준수를 공약으로 내세우게 하는 메니페스토 활동을 시작할 건데요, 아마 총선 직전인 4월 11일 날 그 활동이 정점을 찍을 겁니다.”

이구동성으로 국민을 외치지만, 정작 국민을 위한 정치는 찾아보기 어려운 작금의 정치 현실. 그들이 건네준 결의문 마지막에 적혀 있는 구호가 일제 치하의 엄혹함을 연상케 하는 3‧1절 오전이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대로 하라!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대로 하라!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헌법대로 하라!

 

김태현 두마음행복연구소 소장, 인문작가, 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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