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읽는 책]
양인자 '오월의 어린 시민군'

ⓒ위즈덤하우스
ⓒ위즈덤하우스

“우리를 기억해주십시오.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광주의 시위대와 계엄군이 충돌한 1980년 5월 18일부터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점령되고 시민군이 사살·체포된 27일까지, 광주는 항쟁의 현장이자 ‘대동세상’이었다.

무자비한 국가폭력에 ‘이건 아니다’라며 저항하는 동시에,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자를 돌보며 혹여 있을지 모르는 일탈을 방지하기 위해 서로 독려하는 모습이 당시 증언과 사진 기록에 생생히 남아 있다.

특히 마지막날 계엄군의 진입이 예고됐음에도 도청에 남기로 한 소수의 시민군들은 죽거나 죽느니만 못한 상황에 처할 것이 분명하지만 ‘무의미한’ 저항을 선택했다.

누군가는 남아야 한다며 도청을 지켰던 그들 덕분에 우리는 설사 당장은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해야 할 일을 함께 해나가야 함을 알게 됐고, 5·18민주화운동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됐다.

5·18은 시작부터 ‘기억과의 투쟁’이었다. 당시 계엄군은 광주를 봉쇄하면서 외부와의 소통을 일체 차단했고, 언론은 학살 현장을 전혀 다루지 않거나 폭동으로 왜곡했다.

절망감을 느낀 광주시민들은 언론사를 불태우고 왜곡보도에 항의하는 한편 외신을 통해 사건을 적극 알리려고 했다. 마지막 도청 항쟁 역시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해달라는 외침이었다.

이제는 당시 증언과 사진, 여러 문화 콘텐츠를 통해 어느정도 실상이 밝혀졌지만, 광주의 기억 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5.18 민주화 운동은 결코 실패한 운동이 아니며, 오늘날 민주주의를 있게 한 출발점이다. 하지만 4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실을 왜곡하고 희생자를 폄훼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북한군개입설을 비롯해 5·18민주화운동 보상을 둘러싸고 극우세력의 공격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학계와 법정에서 허위와 왜곡으로 판명되었으나 반공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왜곡 발언들은 모습을 바꿔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5·18의 진실을 더 분명히 밝히고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월의 어린 시민군>은 5.18 그날의 기억과 아픔을 가슴 깊이 공감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성찰을 전한다.

“잊으면 안 돼요!”

이야기에 등장하는 ‘찬호, 미란, 미경, 상우’라는 이름은 80년 당시는 아니지만 80년대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의 이름에서 빌려온 것이다. 특히 상우는 5.18 당시 시민 학생 수습 대책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마지막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윤상원 열사를 되살린 인물이다.

책에서는 가족이나 가까운 이웃 중에 희생된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발표된 저작들이 대부분 국가폭력에 의한 비극성에 초점이 맞춰졌면, 이 책은 5.18 당시를 살았던 이들이 자기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갔으면 하는 저자의 염원을 담아내는 데 더 비중을 두고 있다.

또한 책엔 5.18 당시 자식을 잃은 어머이들을 만나 인터뷰한 이야기, ‘오월어머니집’의 어머니들이 들려준 사연들이 녹아 있다. 

찬호는 단짝 친구 현조가 이사를 가게 되어 내내 우울하다. 그런데 이사 간다고 떠났던 현조가 다시 돌아온다. 현조는 광주에서 떠나는 교통편이 하나도 없어 이사를 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찬호는 현조와 함께 있을 수 있어 기뻤지만, 그즈음부터 이상한 일들이 자꾸 일어난다.

전화는 불통이고, 신문은 오지 않고, 군인들은 사람들을 때리고, 상무관에는 시체가 쌓여 가고……. 아이들은 찬호 누나를 따라 몇 번 도청을 드나들면서 이 모든 일이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군사 정권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찬호와 현조는 길에서 주운 투사 회보를 옮겨 써서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기도 하고, 도청 앞에서 깃을 만들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우연히 수상한 남자들을 신고해 자칫 잘못하면 큰 화를 불러일으킬 뻔한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통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깨달아 간다.

5.18 민주화 운동이 있었기에 6월 항쟁이 있었다. 그 6월 항쟁은 1987년 체제를 만들었으며, 우리는 여전히 그 체제 속에 살고 있다. 5.18 민주화 운동은 오늘날 민주주의를 있게 한 출발점인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18년 동안 권좌에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이후 온 나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들끓었다. 마음껏 말하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세상이 오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전두환을 비롯한 새로운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급기야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군인들에게 저항하는 청년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1980년 5월 18일은 신군부가 광주에서 일어난 시위를 진압하고자 계엄군을 투입한 날이다. 이날 전남대학교에서 시작된 군의 무력 진압은 광주의 거리까지 번졌고, 시위에 가담하지 않은 시민들도 그 폭력의 대상이 됐다.

이에 분개한 시민들은 이들에게 대항했고, 계엄군의 총칼에 광주는 그야말로 전쟁터가 따로 없는 참혹한 상황을 마주한다.

저자는 바리케이드를 치기 위해 몇 년 동안 모아 두었던 헌 타이어를 내놓는 타이어 가게 아저씨, 신문 보급소의 책상이랑 의자를 꺼내 놓는 찬호 아빠, 또 고민 끝에 멋진 공예품을 만들기 위해 아껴 두었던 나무뿌리를 내놓는 대서소 할아버지, 보도블록을 깨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불의에 맞서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물론 시민들이 결코 무력하지만은 않았음을 보여준다.

찬호 엄마 아빠가 큰누나의 야학 활동을 끝내 반대하지 못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무자비한 폭력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저항하며 서로 돕고 희망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광주 정신이다.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저자 또한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예민하게 살피고, 진실이 왜곡되지 않도록 지켜보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찬호와 현조가 일상 속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해낸 것이, 이 거대한 역사의 시작이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역사가 어떤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이기만 한 게 아니라, 우리와 가까운 누군가의 이야기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케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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