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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은 제헌절 67주년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헌법에 의한 통치라는 민주공화국의 이념을 부각하기 위하여 1948년 7월 17일 헌법 제정일을 이듬해부터 국경일로 제정하여 기념해오고 있는 것이다. 유진오 박사 등 헌법제정 전문위원들이 작성한 전문 10장과 102조의 제헌헌법 초안은 원래 내각제였다. 국회에서 간선으로 선출하는 대통령은 상징적인 국가원수였지만 제 1당을 차지한 이승만 국회의장이 국정운영의 안정성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대통령중심제를 들고 나왔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대통령과 부통령, 그리고 국무총리가 모두 포함된 내각제를 가미한 대통령제로 출발하게 된다. 내각제는 본래 정당 간 연합(연정)이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국회 내 소수파 대통령인 경우에는 야당과의 대화와 양보가 필수 불가결이다. 13대 총선 이전에는 왜곡된 선거제도를 통해 국회 다수파가 되는 방식으로 이를 극복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1981년 11대 총선과 1985년 12대 총선에서 민정당은 각각 35.6%와 35.2%의 득표율에 그쳤지만, 지역구 제 1당이 전국구 의석 3분의 2를 차지하는 규정에 따라 과반의석을 모두 넘겼다. 그렇지만 소선거구제와 득표율 배분 방식 전국구제로 개편된 13대 총선 이후 여당의 독자적인 과반수 획득이 어려워지면서 연합정치에 의한 국정운영은 불가피해졌다.

1노(盧) 3김(金)이 할거한 13대 국회는 우리 국회사에서 연합정치가 꽃을 피운 시기이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로 출범한 13대 국회는 지금까지도 남긴 족적이 크다. 지방자치법을 통과시킴으로써 30년 만에 지방자치선거를 부활시켰고,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남북관계에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미국식 청문회 제도를 도입하여 노무현, 이해찬 등 청문회 스타를 탄생시킨 것도 바로 13대 국회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처럼 여소야대였지만 이 국회가 활력 있게 돌아간 바탕은 여당의 양보 위에 이루어진 연합정치 때문이었다. 14대 국회는 정주영 회장의 국민당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여 정국 운영의 한 축을 담당한다. 13대에 이어 또다시 제3신당에 의한 다당제가 출현한 것이다. 이로써 14대 국회도 적지 않은 입법성과를 남겼다. 주요 법률로는 본격적인 정보통신시대를 맞아 이에 대비하기 위한 통신비밀보호법개정안이 통과되었다. 또한 사회보장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하고 국가의 의무 등을 규정하기 위하여 사회보장기본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에는 ‘모든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최저 생활을 보장하고 사회공동체의 참여가 가능하도록 개개인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복지사회를 실현하는 것을 사회보장제도의 기본이념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최근의 복지국가 초석이 바로 이 때 만들어진 것이다. 15대 국회 역시 50석의 자민련으로 인해 다당제이자 여소야대로 출범했다. 15대 국회는 임기 중 DJP연합으로 역사적인 정권교체를 맞이했지만, 새로 출범한 공동여당(국민회의-자민련)의 사정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과반수에 한참을 못 미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야 간 상생의 정치는 불가피했다. 15대 국회가 남긴 대표적인 복지관련 입법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이다. 이는 1997년 이후 외환위기를 계기로 사회안전망의 정비가 우리 사회의 최대과제로 등장하면서 저소득층에게 국가가 생계·의료·자활 등에 필요한 경비를 제공하는 공공부조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연합정치가 늘 성공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13대 국회는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주도한 3당합당에 의해 거대 민자당의 탄생으로 여의도는 양당체제로 되돌아갔다. 14대 국회 역시 대통령선거에서 실패한 정주영 회장이 정계를 은퇴하면서 국민당이 해체되고, 민자당이 이를 흡수하면서 국회는 민자-민주 양당체제로 개편됐다. 15대 국회는 김종필 총리 인준에 무려 6개월이 소요되면서 이를 견디다 못한 여권이 인위적인 정계개편을 시도했다. 야당의원 빼내기를 통해 공동여당의 의석을 과반수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국회 과반의석에 대한 조바심 때문이었다.

한편, 정치개혁의 전도사를 자부했던 노무현 대통령조차 결코 여소야대를 용인하지 않았다. 그는 2005년 상반기 재보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전패, 과반의석이 무너지자 색깔이 전혀 다른 한나라당에 대하여 대연정까지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당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소야대는 정상적인 정치구조가 아닙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여소야대의 구조로 국정을 운영하는 사례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88년 이래 여러 차례 여소야대 정치의 실험을 해 왔습니다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역대 정권 모두 3당 합당이나 정계개편으로 여소야대의 구조를 해소해 버렸습니다. 여소야대로는 국정운영이 어렵다는 것을 증명한 셈입니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이다. 내각제를 하는 유럽 대부분의 나라는 여소야대 자체가 나타나지 않으며, 연정이 불가능해지면 의회를 해산해버리고 총선을 다시 치르면 그만일 뿐이다. 순수대통령제의 기원인 미국은 행정부의 법안 발의권도 없고, 국회의원의 당론투표가 없으며 크로스보팅을 하기 때문에 여소야대라고 해도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하는데 거의 지장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대통령제는 본래 내각제가 가미된 제도이기 때문에 의회와의 협력이 필수 요소인 것이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은 1년 만에 당으로 돌아간 유인태 정무수석 후임을 임명하지 않고 아예 직위 자체를 없애버렸다. 그래놓고도 여소야대로 국정운영이 어렵다고 지지자들에게 대연정을 호소한 것이다. 전임 대통령인 DJ 역시 YS 때까지 존속하던 정무장관직을 폐지해버리고선 대야관계가 여의치 않게 되자 결국 선택한 것이 야당의원 빼내기였다.

국회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한 6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 이후, 여당 원내대표가 사퇴하고 의원들은 납작 엎드려있다. 김무성 대표의 2기 당직에는 황진하 사무총장, 이장우 대변인 등 친박계 인사들이 전진 배치되고 있다. 그러나 진짜 우려되는 대목은 국회 선진화법 관련 언급이다. 13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소수 독재가 정당화되고 법안 연계투쟁이 일상화되면서 ‘망국법’, ‘소수독재법’이라는 비난을 듣고, 국정의 발목을 잡는 주요인이 되고 있다.”라고 선진화법을 맹비난하였다. 이튿날 신임 정책위의장으로 선출된 김정훈 의원은 한 술 더 떠 “야당이 동의하면 통과되고, 야당이 반대하면 통과가 안 되는 사실상 만장일치제법”이라며 비꼬았다. 정말로 위험천만하고 정치시계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여당 지도부의 오도된 발상이다. 그동안 국회 선진화법은 여야 합의를 통해 대화정치를 복원시켜온 매우 유력한 도구였다. 임기가 약 9개월 정도 남은 지금, 19대 국회는 의원발의법안 통과 건수가 1,694건으로 18대의 1,663건을 이미 넘어섰다. 정부제출 법률안도 925건 중 280건(30.3%)을 통과시켰고 265건(28.6%)은 이미 대안으로 반영시켰다. 남은 376건(40.6%)은 이번 정기국회 중 대부분 처리가 가능하다. 선진화법이 결코 방해되고 있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선진화법이 없었던 18대 국회는 정부제출 법률안 통과비율이 40.7%였다. 대안이 반영된 것을 포함하면 76.1%이다. 결코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는 국회, 대화와 타협이 있는 상생정치인데, 왜 과거로 되돌리려고 하는지? 대한민국은 연합정치 공화국이다.

 

최 광 웅

참여정부 인사제도비서관
민주당 조직사무부총장
현 데이터정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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