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저리는 듯한 이 고요.

그 어떤 표현도 지금의 느낌을 온전히 전달하기 어렵다. 들리는 소리라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와 자글자글 물 끓는 소리. 가끔 옆집에 보일러 돌아가는 기계음이 들린다.

작년 이맘때에는 밤마다 호랑지빠귀가 쉬익쉬익 하고 울어댔는데 올해는 잠잠하다. ​그 대신 낮에 동고비가 주변을 알짱거린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아서 옆구리를 스치듯이 휘익 지나가기도 한다. 내가 나무나 바위로 보이는 모양이다.

​곁채에 있는 온돌방으로 옮겼다. 이불, 노트북, 커피포트만 옮기면 되니까 1분이면 이사 끝이다. 방이 따습다.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으면 삭신이 노글노글해진다. 이웃들 얘기로는 겨울엔 곁채가 따뜻하고 여름엔 안채가 시원하다고 한다. 철 따라 마음 내키는 데서 살아도 좋겠다. ​새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앉듯.

황토로 보수한 부뚜막은 벌써 몇 군데 금이 갔다. 흙이야 많으니까 틈틈이 덧칠하면 된다. 무쇠솥은 고물상 차지가 되었다. 녹을 떼려고 망치로 톡 쳤더니 아뿔싸, 별 모양의 구멍이 나 버렸다. 새 솥은 농사 동무인 선배가 입주 선물로 사 주었다.

오전에는 선배와 함께 오미자 밭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었다. 밥을 먹기에는 봄볕이 따사로운 마당이 좋다. 곁채의 처마에 덧대어 길게 친 차양 아래는 이 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다.

차양의 일부는 해가 비치는 투명 판넬이고 나머지는 불투명이어서 ​그늘막 구실을 한다. 차양 밑 흙바닥에는 단조로운 테이블과 짝이 안 맞는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다. 전부 버려진 물건들인데 어쩌다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삐걱거리는 나무의자는 네 다리의 이음매마다 못을 쳤더니 한결 튼튼해졌다.
 
왼쪽으로 얕은 개울물이 졸졸 흐르고 오른편에 동네 선배가 빌린 밭이 있다. 원래 다랭이논이었는데, 조각조각 이어붙이면 2천 평쯤 된다. 선배는 나보고 하고 싶은 농사를 맘껏 지어 보라고 하지만 ​전업농부가 될 생각은 없다. 나는 글 농사를 지으러 왔다. ​농사로 돈 벌 생각은 없다.

어쨌든 저 밭에 감자며 옥수수 따위를 심을 생각이다. 밭 한가운데 쓰러져가는 농막이 있고, 밭둑에는 뽕나무 몇 그루가 서 있다. 달고 굵은 오디가 잔뜩 열린다. 작년에 입이 시커매지도록 따 먹었다. ​이 동네에는 뽕나무가 많다.

어린 시절 고향 집 뒷밭에도 뽕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산딸기는 지천이었다. 지금도 뒷동산에 철 따라 열리던 온갖 열매들을 상상하면 입에 침이 고인다. 딸기만 해도 종류마다 익는 시기가 다르고 맛이 달랐다. ​아이스크림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그 황홀하고도 미묘한 맛의 차이를 모를 것이다.  ​

삼월도 다 갔다. 무계획이 나의 계획이지만 하루하루 시간을 잘 쓰고 싶다. 내가 가진 건 시간밖에 없기 때문에. 주어진 건 봄바람처럼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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