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이란 핵협정은 허점 많은 나쁜 거래”
독단적 철회땐 북한에 잘못된 신호 보낼 수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핵협상의 선례라고 할 수 있는 '이란 핵협정(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을 파기할 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미국은 '핵합의 철회'를 연일 경고하고 나섰지만 이란이 '협상 불가'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작년 10월에 이어 올해 1월에도 일단 이란 제재 면제를 갱신했다. 그는 탄도미사일 관련 제재를 부과하고 일몰 조항을 손보지 않으면 다음 갱신 여부 결정 때는 협정을 정말로 폐기하겠다고 경고했다. 백악관은 90일마다 이란의 협정 준수 상황을 평가하고, 120일마다 제재 유예 갱신 여부를 결정한다. 다음 결정일인 오는 5월 12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이 결과가 북미 정상회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이목이 집중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29일 백악관에서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 대표부 대사가 초청한 유엔 안보리 이사국 대사들과 오찬을 함께 하고 있다. 헤일리 대사는 이날 국제사회가 압력을 통해 이란이 미사일과 관련한 안보리 결의안을 위반하지 못하도록 만들면 트럼프 대통령이 반대하고 있는 이란 핵협정이 유지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29일 백악관에서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 대표부 대사가 초청한 유엔 안보리 이사국 대사들과 오찬을 함께 하고 있다. 헤일리 대사는 이날 국제사회가 압력을 통해 이란이 미사일과 관련한 안보리 결의안을 위반하지 못하도록 만들면 트럼프 대통령이 반대하고 있는 이란 핵협정이 유지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뉴시스

이란과 주요 6개국(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5개와 독일)은 10여 년간 이어온 협상 끝에 2015년 7월 핵협정을 타결했다. 이란은 핵무기에 사용될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 개발을 포기하고 서방은 이란 경제 제재를 완화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이란은 고농축 우라늄 농축에 쓰이는 원심분리기 수를 줄이고 향후 15년 동안 전력 생산을 위한 저농축 우라늄만 보유하기로 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자국 핵시설 사찰도 약속했다.

이란 핵협정은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의 대표적인 외교적 성과로 꼽힌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허점이 수두룩한 '나쁜 거래'라고 비판했다. 그는 작년 1월 취임 이후 미국의 핵협정 탈퇴를 수차례 경고해 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이 핵협정 이후로도 탄도 미사일 개발을 계속하며 핵합의 정신을 위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협정 체결 15년 뒤인 2030년이 지나면 이란의 핵개발 제한이 도로 풀리는 일몰 조항도 문제 삼았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핵협정을 탈퇴할 경우 보복책을 마련해 놨다고 주장했다. 이란 원자력청은 협정이 파기되면 과거보다 훨씬 빠르게 핵무기용 우라늄을 농축할 것이며 IAEA 사찰도 거부하겠다고 경고했다.

미국을 제외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 등 다른 핵협정 참가국들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탈퇴를 만류하고 있다. IAEA 역시 정기적인 이란 핵시설 사찰 보고를 통해 현재로선 이란이 협정을 완전히 이행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서방쪽 협정 참가국들인 E3(영국, 프랑스, 독일)는 “이란이 먼저 협정을 위반하지 않았는데 미국이 탈퇴를 강행하면 협정이 실효성을 잃어 이란 핵위협이 다시 고조되는 것은 물론 서방의 외교 신뢰도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파트너십에 간 금이 더욱 벌어질 거란 지적도 많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은 파리 기후협약을 탈퇴하고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 체결을 유보하는 등 유럽과 함께 추진하던 다자협정들에 제동을 걸며 유럽 정상들과 숱한 갈등을 빚었다.

E3 의원 300인은 이달 미국 의회에 공동 서한을 보내 미국과 유럽의 강력한 파트너십 덕분에 이란 핵문제를 놓고 러시아와 중국까지 아우르는 대연합을 이룰 수 있었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이 협정 덕분에 이란의 핵농축 시설 대부분이 해체됐고 핵군비 경쟁 위험도 줄었다고 주장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4월 잇달아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에 이란 핵협정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기로 했다. 두 정상은 핵협정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폐기가 아닌 수정을 통해 협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E3는 미국의 탈퇴를 막기 위한 후속 협정을 준비 중이다. 이들은 미국이 지적한 일몰 조항 기한 연장과 이란의 핵시설 검증 규정 강화, 탄도미사일 시험개발 제한 등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 것만으로 미국의 불만을 잠재우고 다음달 협정 탈퇴를 막을 수 있을진 지켜봐야 한다.

미국의 5월 이란 핵협정 갱신 여부 결정에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 중 하나는 북미 정상회담 때문이다. 일각에선 이란 핵협정은 북한이 미국 또는 국제사회와 맺을 핵협상의 틀과 범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선례라는 점에서 북한 역시 이 협정의 운명에 관심을 두고 있을 거라고 관측하고 있다.

올해 3월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정상회담이 전격적으로 합의된 데 이어 북한이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에 앞서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 중단까지 선언하면서 한반도 대화 분위기는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본격적인 북핵 협상을 앞두고 이란 핵협정을 독단적으로 탈퇴한다면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보낼 거란 우려가 높다. 미국이 자국의 정책 방향에 따라 언제라도 합의된 내용을 무를 수 있다는 오해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밥 코커 미 상원 외교위원장(공화당)은 "어느 시점엔 북한과 매우 구속력 있는 합의를 하길 바란다"며 "물질적 위반이 없는데도 어떤 군사 합의에서 탈퇴한다면 사람들은 우리가 다른 합의를 준수할 거라고 믿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 역시 북핵 협상 추이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상대적으로 북한에 유리한 합의가 도출된다면 이란 역시 버티기를 하면 미국과 국제사회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고 보고 핵협정에 관해 훨씬 강경한 자세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북한의 양보가 이뤄지고 미국의 대북 최대 압박 전략이 성공했다는 인상을 준다면 이란 역시 굽히기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이란 핵협정을 대폭 손봐야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은 더욱 힘을 받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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