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수교수, '백성의 臣(신) 황희'로 황희 업적 재조명
"백성 위해 임금에 맞선 신하...2인자적 인재 절실해"

오는 5월 15일은 세종대왕 탄신 621돌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인 세종의 시대에는 명재상이 많았다. 그 중 한 분이 황희 정승이다. 그는 평균수명이 40세인 조선에서 다 늙은 나이라 할 수 있는 60세에 세종과 함께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황희의 위대함은 젊었을 때부터 바로 관후, 정대, 검소, 총명의 네 가지를 인간가치의 덕목으로 삼은 데서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태조와 정종 그리고 태종을 보필하면서도 그러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격 탓에 몇 번이나 좌천·파직을 당해도 끝내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황희. 최근 「백성의 臣(신) 황희」라는 소설로 조선시대 정승으로서 삶과 업적을 조명해 화제에 오른 오기수 김포대학교 교수(경영관광학부 세무회계정보과)로부터 이 시대에 황희가 던지는 메시지를 들어봤다.

오기수 김포대학교 경영관광학부 세무회계정보과 교수
오기수 김포대학교 경영관광학부 세무회계정보과 교수

- 세종과 황희간 신군관계에 주목한 배경은
▲ 세종이 제정한 공법(貢法)을 연구하면서 세종 때 18년간 영의정을 지낸 황희 정승의 백성을 위한 위대한 정치를 알게 됐다. 세종은 즉위하면서부터 세법을 개혁해 백성이 편히 살 수 있는 공법을 만들기 위해 세종 10년부터 조정에서 좌의정 황희 등과 논의를 시작했다. 그 공법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혼신을 다했다. 그런데 황희는 좌의정과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그 공법의 제정과 시행을 무려 17년 동안이나 반대했다. 정말 군주시대인 조선에서 생각할 수도, 일어 날 수도 없는 최대의 군신간의 대립이었다. 이는 세종이나 황희 모두 다 오직 백성을 위한 사사로움 없는 정치적 대립이었기에 가능했다. 때문에 세종은 그런 황희의 반대 의견을 수용하면서, 그 긴 시간 공법에 대한 여론조사와 시범실시 등을 거쳐 법을 개정해 마침내 세종 26년에 전분6등 연분9등의 공법을 최종 완성완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민주적이고 과학적으로 입법한 세법이 탄생된 것이다.

- 황희를 '백성의 신(臣)'이라 칭했는데
▲ 세종이 계획한 핵심 정책을 17년 동안 반대한 2인자 황희, 그 반대를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면서 하나씩 개선해 나가는 1인자 세종의 정치는 지치(至治)의 시작과 끝이었다. 지치란 더 이상 바랄게 없는 아주 잘 다스려진 정치를 말한다. 그 바탕에서 세종의 위대한 치적이 이룩된 것이다. 민주시대인 지금에서도 보기 힘든 세종과 황희, 1인자와 2인자의 정치적 협력과 대립은 저에게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이에 「세종 공법」에 이어 황희 정승에 대해 좀 더 깊이 연구하게 됐고, 그 결과 「황희, 민본 시대를 이끈 행복한 2인자」이란 책을 출간한 데 이어, 황희에 대한 이 감동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감하면서 쉽게 전하고 싶어 소설 「백성의 臣(신) 황희」를 쓰게 됐다. 황희 정승은 왕의 신하이기 전에 진정한 백성의 신(臣)이었다.   

- 소설 속 이야기의 정점을 꼽는다면
▲ 태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육조(六曹) 판서를 두루 지내며 출세가도를 달리던 황희는 주색에 빠진 세자 양녕에 대한 태종의 물음에 ‘세자는 연소합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단지 이 한마디의 말로 황희를 눈의 가시처럼 여긴 정적(政敵)인 하륜 등은 그를 ‘간사한 소인(小人)’으로 낙인하고, 결국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반역으로 몰아 죽게 한 영의정 유정현 등으로부터 역적으로 몰려 죽음의 나락에서 4년간 남원에서 유배생활을 한다. 그 때 세종이 새 임금으로 즉위한다. 세종에게 황희는 단지 자신이 세자가 되는 것을 반대한 부왕 태종의 불충한 역신이었다. 그런 황희는 기사회생으로 세종의 부름을 받고 60살의 늙은 나이에 정치에 복귀한다. 태종이 죽고 홀로서기를 해야 할 세종에게 새 인물이 필요했고, 황희가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 주었다. 

- 황희에 대한 세종의 평가가 인상적이다
▲ 세종은 황희를 부른지 5년 만에 “경은 세상을 다스려 이끌 만한 재주와 실제 쓸 수 있는 학문을 지니고 있도다. 모책은 일만 가지 정무를 감당하기에 넉넉하고, 덕망은 모든 관료의 사표가 되기에 족하도다. 과인이 의지하고 신뢰하는 바로서 정승 되기를 명하였더니, 진실로 온 나라를 돌보는데 부응하였도다. 묘당에서 의심나는 일이 있을 때이면 경은 곧 시귀(蓍龜)이었고, 정사와 형벌을 의논할 때이면 경은 곧 권형(權衡)이었으니, 모든 그때그때의 시책은 다 경의 보필에 의지하였도다”라고 칭송한다. 시귀는 국가의 운명을 점칠 때 쓰는 도구이며, 권형은 저울을 말한다. 좌의정이 된지 1년 만이다. 어느 왕이 신하를 그리 높이며 칭송할 수 있겠는가? 황희의 위대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말이다.

- 무엇을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나
세종의 믿음과 의지는 황희가 87세로 영의정에서 치사할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영의정에서 물러난 황희는 90세에 죽는다. 이 때 신숙주는 황희의 신도비에 “수상(首相)으로 23년간을 있으면서도 가세가 빈약하여 마치 포의지사(布衣之士)와 같았다”라고 적었다. 포의지사란 벼슬을 하지 아니한 가난한 선비를 말한다. 청렴하면서도 관후하고 정대한 황희의 성품을 한마디로 잘 묘사한 표현이다. 황희는 오르지 백성을 위해 가시고기 같은 삶을 살았다. 소설 「백성의 臣(신) 황희」에서 이러한 황희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 이 시대, 소설이 던지는 메시지는
▲ 황희 정승에 대한 청렴 등에 이야기는 어린 아이들도 알고 있을 만큼 많이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황희에 대한 깊이 있는 위대한 사상과 철학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이 소설에서 황희에 대한 위대한 인간적 가치를 태종과 세종 때의 정치적 갈등을 통해 투영해 보고자 했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는 황희 정승과 같은 2인자적 인물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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