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추락하는 것은 참회가 없다

| 에밀리의 분노,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 분노에 유독 예민한 비행(卑行) 가족
| 세습 비행에 강화되는 사회적 분노의 방아쇠

 

땅콩회항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업무회의 석상에서 연장자를 향해 컵을 내던지고, 여승무원들에게 청바지를 입혀 괴롭히고, 밀치고 발길질까지 해대면서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질러댔다. 한마디로 ‘못돼먹은’ 갑질 비행(卑行) 가족이다.

한진칼과 진에어의 주가가 오너리스크(owner risk) 탓에 급락을 거듭 중이다. 9일 한진칼의 주가는 전고점(4월 24일) 대비 14%, 진에어의 주가는 10% 이상 빠졌다. 그뿐이 아니다. 6년 동안 진에어의 등기이사를 맡았던 둘째 딸 조 에밀리 리(조현민)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토부가 진에어의 항공 면허 취소까지 검토하고 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단지 돈일까? 그렇지 않다. 이들의 갑질은 지금까지 여타 그룹 오너들이 벌여온 갑질 행태와 달리, 배후에 유달리 강한 ‘부정 감정’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가족에 대해 “교육 참 잘도 시켰다. 엄마가 저러니 딸도 저러지. 크면서 뭘 보고 배웠겠어?”라며 혀를 찬다. 잘못된 교육에 대한 질타다. 정말로 이것 하나뿐일까? 그들이 비행(卑行)을 저지르며 날아다니게 했던 ‘부정 감정’이라는 팩트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그들의 행태가 우리 사회에 어떤 생각거리를 던져주는지 메타팩트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에밀리의 본성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본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리의 관심사로 좁혀서 다시 질문하자. 미국인 조 에밀리 리(이하 에밀리)가 가진 분노와 분노 행동의 기원은 태어날 때 이미 유전자에 새겨져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경험에 의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모두 유전자에 새겨져 있었던 것(유전자결정론)이라면 지금까지 갖가지 부정의 감정을 드러내고 살았던 에밀리는 정당해지고, 에밀리가 보인 분노와 분노 행동의 모든 책임은 부모인 조양호 회장(이하 조양호), 이명희 이사장(이하 이명희)을 포함한 조상에게 전가된다.

모두 경험에 의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문화결정론)이라 해도 책임을 진화심리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밈(meme)’에 떠넘기면 그뿐이다. 밈이란, 에밀리라는 존재가 형성된 이후 조양호, 이명희 및 사회가 전해준 문화까지 포괄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럼 에밀리는 뭐지? 그동안 구질구질 성깔을 부리며 살아왔던 이명희는? 그저 그렇게 하기로 정해진 대로 살아왔던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많은 가설이 존재해왔다. 불교는 감정의 근원에 아무것도 없음을 가르쳐왔다. 경험주의 철학자였던 존 로크는 “인간(에밀리)의 본성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 서판(blank slate)과 같은 상태로 시작해서 경험을 토대로 이성과 지식의 모든 재료를 갖춘다”고 했다. 거기에는 당연히 감정도 포함된다.

영육 이원론을 설파하는 종교들이 감정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물리적 원리로 작동되는 육체에 깃든 영혼(ghost in the machine)’이다. 특히 천주교와 기독교에는 감정과 행동의 최고선인 원형(idea)도 존재한다.

그런가 하면 계몽사상가 루소는 “인간(에밀리)은 좋은 성질을 갖고 태어나지만, 문명이 나쁘게 만들기 때문에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말한 좋은 성질에는 좋은 감정, 즉 긍정의 감정도 포함될 것이다. 맹자와 순자를 떠올리게 하는 주장이다.

에밀리의 부정 감정, 이미 유전자에 들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보이고 수긍하는 가설은, 에밀리가 처음부터 긍정의 감정이나 부정의 감정을 갖고 태어난다거나 감정을 지닌 영혼이 하늘 저 어딘가에서 내려와 에밀리의 몸으로 들어왔다는 가설보다는 아예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상태로 삶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면 실제로 그럴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런 흥미는 빈 서판 이론이 지금까지 누려온 막강한 영향력에 의한 것이다. 20세기 심리학의 주류였던 행동주의 심리학자들, 문화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문화인류학자들, 사람들 간의 선천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사회주의자들이 텅 빈 공터를 지지한 대표자들이다. 그리고 그 이론은 지금도 법칙처럼 신봉되고 있다.

빈 서판 이론이 세습왕권과 귀족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인종차별과 계층 간 불평등, 남녀차별 등 각종 차별에 맞설 수 있는 이론적 토대의 역할을 수행해 온 점은 인류 정신의 발전에 밑거름이 된 대단한 장점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심리학의 선두주자들은 학문적인 열정과 의혹을 기반으로 빈 서판 이론의 허구성을 밝혀내는 데 진력해 왔으며, 이제 그들의 주장은 새롭고 강력하며 진실에 조금 더 근접한 가설로써 사회 전 분야에 걸쳐 큰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에밀리의 본성이 타고났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의 주제인 분노로 좁히면, ‘에밀리가 그동안 보였던 분노와 분노 행동의 기작이 유전자에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는 의미이다.

유전자란 그저 어떤 단백질을 만들라는 명령을 가진 화학물질일 뿐이다. 그런 유전자에 감정의 기작이 들어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 ‘화학조미료(msg)에 감정이 들어있다’는 식의 엉터리 궤변으로까지 들릴 수 있다. 분노로 범위를 좁혀서 하나하나 따져 들어가 보자.

분노의 방아쇠를 당기는 메커니즘

동물의 몸이 지닌 물질적 구조와 기능은 환경 변화에 더 잘 적응하기 위해 발전을 거듭해왔고, 앞으로도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계속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는 다윈의 자연선택으로 매우 잘 설명되며, 과학계에서도 이견을 달지 않는 정설이다.

그렇다면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에밀리의 두뇌, 즉 감정의 본산인 두뇌를 탐구하는 작업에 자연선택이 적용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이 질문은 인간의 마음 역시 오랜 기간에 걸쳐 조금씩 다듬어지고 구성되어 왔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수긍될 만한 질문이다.

정신분석과 고전적 행동주의, 인지주의 등 감정이 후천적으로 학습된다고 주장한 전통 심리학들은 에밀리의 분노가 행동으로 발현되는 원인과 양상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들은 분노라는 현상이 인지되는 메커니즘, 즉 에밀리가 분노를 인지하고 조절하는 뿌리는 어디에 있으며, 에밀리의 분노가 어떤 과정에 의해 촉발되는지에 대한 관심은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분노의 뿌리’(David Kocherhans)
‘분노의 뿌리’(David Kocherhans)

손가락이라는 물리적 현상의 뿌리가 유전자에 있는 것처럼, 긍정의 감정이건 부정의 감정이건 에밀리의 감정이 어떤 원인에 의해 현상으로 드러나려면, 감정을 인지하고 조절하는 뿌리, 즉 감정의 컨트롤타워가 존재해야 한다. 에밀리가 감정을 경험으로 습득하고 현실에 드러내려면 그 감정 자체를 습득하는 뿌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뿌리 없는 가지는 없기에 이 논리는 너무도 타당하다. 그래도 미진하다 느껴진다면,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의 “학습을 하려면 학습 내용을 습득하는 본성이 필요하다”는 말에서 학술적인 타당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감정 자체를 습득하는 뿌리를 설명하기 위해 진화심리학의 선구자들은 ‘사전 배선’이라 부르는 감정의 모듈module이 에밀리의 두뇌에 깔려 있음을 상정한다. 모듈은 특정 조건에 특정 패턴으로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특정 조건이 외부에서 가해질 때, 그 조건이 에밀리의 모듈을 건드리면, 다시 말해서 감정의 방아쇠를 당기면, 거기에 맞는 감정이 촉발되고, 촉발된 감정이 비로소 물컵을 던진다든지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질러댄다든지 하는 행동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에밀리, 유전자와 문화의 꼭두각시

물론, 에밀리의 모든 감정이 이미 깔려 있는 모듈, 즉 유전자에 의해서만 지배받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에밀리에게는 유전되는 감정의 모듈이 있지만, 이 모듈을 발현시킬 방아쇠 역할을 하는 새롭고 특정한 환경들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즉 에밀리가 출생한 이후에 경험하는 환경도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100% 유전자결정론도, 100% 문화결정론도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지점에서 정해진 대로 살지 않을 기회와 권리가 생겨나며, 에밀리가 느낀 부정의 감정과 그에 따른 행동을 조절하고 통제할 책임이 에밀리에게도 맡겨진다.

에밀리가 기억에 저장되어 있는 대로만, 출생 이후에 배운 대로만 느끼고 행동한다면, 에밀리야말로 모든 결정론을 삶으로 증명해 보이는 유전자의 인형, 문화의 꼭두각시이다. 그런 에밀리에게서 정신의 발전을 기대하는 것은 붕어빵에서 잉어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일 것이다.

사회적 질타에 참회와 성찰로 응할 때

에밀리는 ‘부의 세습’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세습왕권과 귀족의 정당성은 빈 서판 이론이 무너뜨렸지만, 인종차별과 남녀차별, 계층 간 불평등은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특히 ‘부의 세습’은 자본주의의 종교적 신봉자 막스 베버 덕에 도덕적 정당성까지 획득하며 지구촌 인류 문화의 정점에 자리해 있다.

빈 서판 이론이 하지 못한 일, 천주교와 기독교의 ‘물리적 원리로 작동되는 육체에 깃든 영혼(ghost in the machine)’이 해결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과학과 종교를 불문하고, 지금까지 제시된 모든 이론들은 결정론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에밀리가 유전자결정론과 문화결정론을 몸소 시현해 보이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꼭두각시’였음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이제 망아지처럼 날뛰는 부의 세습은 최소한의 사회적 환원인 ‘노블리스 오블리제’마저 기대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한때 재벌의 사회적 순기능이 돋보였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문제시되는 사회적 역기능에서 재벌은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그중 특히 2세, 3세들의 안하무인적 행태와 비행(卑行)은 시민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다.

부의 세습이 초래하는 사회적 혼란은 시민들로 하여금 또 다른 분노의 방아쇠를 당기게 하며, 그 자체로 엄청난 기회비용을 유발한다. 그 손실로부터 사회를 지켜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왕재를 위한 교육을 주문했던 플라톤처럼, 부를 세습 받을 이들을 한데 모아서 특별교육이라도 시켜야 하나?

이번 에밀리 사태가 보여준 한 가지 사실은, 돈과 인성의 반비례 관계가 보다 강력해졌으며, 따라서 스스로 행동을 조절하고 통제할 책임을 망각해 버린 ‘돈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질타 역시 강력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사태를 거부하거나 축소하는 것으로는 이제 강력해진 사회적 질타를 피해갈 수 없게 된 형국이다. 에밀리와 그 부모들이여, 땅콩회항에서 무엇을 배웠던가? 추락하는 것은 참회가 없다. 자업자득이니 가족이 둘러앉아 자기반성한 연후에 모든 사회적 지위에서 물러나 성찰에 매진할 일이다.
김태현bizlin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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