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오직 백성을 위해 평생을 가시고기 같은 삶을 살고 간 방촌 황희. 황희는 세종대왕과 함께 무려 18년간 영의정으로 재임하며 오직 백성들의 아픔과 더 나은 삶을 위해 일하며 세종과 함께 백성을 위한 정치에 날실과 씨실이 되어 지치(至治)의 시대를 이룩한 인물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세종과 함께 청렴함과 바른 정치로 백성을 위한 새로운 지치의 시대를 이룩한 황희의 삶을 지금 이 시대에 투영해 보고자 오기수 김포대학교 교수(경영관광학부)가 집필한 역사소설 「백성의 臣(신) 황희」를 13회에 걸쳐 연재한다.

역적

황희가 유배를 떠난 다음날 태종은 좌의정 박은을 불러 말했다.

“내가 세자의 글을 보니 몸에 소름이 끼쳐 가르치기가 어렵겠다. 경 등은 이미 사부의 직임을 겸했으니 함께 의논하여 잘 가르치도록 하라. 나는 관용을 베풀어 세자에게 그 여자를 돌려주려는데 어떠하겠는가?” 

“전하!어찌 돌려 줄 수가 있겠습니까?일찍이 그 여자를 제거하여 그 유혹을 끊어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박은이 반대하자 태종은 설득했다.

“세자가 비록 마음을 고친다고 하더라도 그 언사의 기세를 본다면, 정치를 하게 되는 날에 사람에 대한 세자의 화복(禍福)을 예측하기가 어렵다.관용을 베풀어 그 여자를 돌려주고 서연관으로 하여금 간하여 나오게 하여, 잘 가르치고 키워야 마땅할 것 같다.이와 같이 하여도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고례(古禮)에 의하여 이를 처리하겠다.”

훗날 세자가 보위에 올라 이 일로 해코지라도 할까 두려운 것이다. 지금의 성품이라면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기세이다. 그러나 태종은 아비로서 다시 한 번 세자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박은이 나가자 태종은 즉시 환관 최한을 보내 세자에게 명했다.

“너는 어찌하여 스스로 새사람이 되어 속히 전날의 허물을 고치지 않는가? 부자의 사이에 어찌 객(客)이 매를 때려서 가르치겠는가?

지금 너의 글을 보니 사리를 아는 글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서연은 네가 하고 싶다면 할 수 있고 하지 아니한다면 할 수 없다. 날마다 빈객을 맞이하여 좋은 말을 구하여 듣도록 하라.”

하지만 태종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세자가 회심하기를 바란 것은 고목나무에 꽃이 피기를 바란 것이 아닌가!’란 의심이 들었다. 

난제 중의 난제이다. 종묘사직이 걸린 문제이다.

태종의 마음도 조석으로 변하고 있다. 그 날 밤 태종은 의정부 삼정승과 육조 판서들을 은밀히 불러 세자의 일을 논의했다. 

다음날 의정부·삼공신·육조·삼군 도총제부·각사의 신료들이 일제히 상소하여 양녕의 폐위를 청했다.

태종은 즉시 윤허했다.

“세자 양녕이 간신의 말을 듣고 함부로 여색에 미혹되어 불의를 자행했다. 만약 후일에 생살여탈(生殺與奪)의 권력을 마음대로 한다면 형세를 예측하기가 어려우니, 여러 재상들은 이를 자세히 살펴 나라에서 바르게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어젯밤에 그리 정한 것이다. 
결국 양녕이 폐세자 되었다. 

그 즉시 영의정 유정현을 비롯한 좌의정 박은, 우의정 한상경 등 삼정승과 육조 판서들이 조계청(朝?廳)에 모였다.

모두들 굳은 표정이다. 
양녕을 폐위했으니 빨리 새 세자를 세워야 한다. 자칫 일이 늦어지거나 잘못되면 또 무슨 사단이 일어날지 모른다. 하지만 전하의 뜻을 알지 못하니 우왕좌왕 할 뿐이다.

태종은 아예 편전에 나오지 않았다. 

강녕전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다. 

신료들을 볼 면목도 없지만 다음 세자를 누구로 세워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중전은 ‘양녕의 아들을 왕세자로 세워야 한다.’고 종주먹을 대고 있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태종은 도승지 조말생에게 전지했다.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가 청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했다. 국가의 근본은 정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만약 정하지 않는다면 인심이 흉흉할 것이다.
옛날에는 유복자를 세워 조종의 유업을 이어 받게 했고, 또 적실의 장자를 세우는 것이 고금의 변함없는 법식이다. 양녕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장자는 나이가 다섯 살이고 차자는 나이가 세 살이니, 나는 양녕의 아들로써 대신 시키고자 한다. 장자가 유고하면 그 동생을 세워 후사로 삼을 것이니, 왕세손이라 칭할는지 왕태손이라 칭할는지 고제를 상고하여 의논해서 아뢰어라.”

태종은 중전의 말대로 양녕의 맏아들을 세자로 삼겠다고 했다. 그 때까지 영의정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퇴궐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비상시국이다. 명을 받은 대신들은 빈청에 모여 논의했다. 우의정 한상경 등 대부분의 신료들은 태종의 말에 따라 양녕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의정 유정현은 반대했다.

“나는 배우지 못하여 고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에는 권도와 도리가 있으니 어진 사람을 세자로 고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자 한평군 조연 등 15인도 유정현의 뜻을 지지했다.

어진 사람을 고른다는 것은 양녕의 아들을 세자로 삼은 것을 반대한 것이다. 폐위된 양녕의 후환이 두려운 것이다. 태종의 다른 아들 중 한 명을 세자로 택하자는 말이다.

좌의정 박은은 둘 다 좋다고 했다.

“아비를 폐하고 아들을 세우는 것이 고제에 있다면 옳습니다만 없다면 어진 사람을 골라야 하옵니다.”
그러자 유별난 이조 판서 이원은 점을 치자고 했다.

“옛 사람은 큰일이 있을 적에 반드시 거북점[龜占(귀점)]과 시초점[筮占(서점)]을 쳤으니, 청컨대 점을 쳐서 이를 정하시옵소서.” 

조말생은 급히 강녕전으로 달려가 태종에게 대신들이 논의한 말을 그대로 고했다.

태종은 말없이 그저 천정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눈을 지그시 감고 손끝으로 탁자를 두들겼다.

‘탁, 탁, 탁…….’ 

그 소리는 조말생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일각 쯤 지나서, 태종은 결심한 듯 게슴츠레 눈을 뜨고 말했다.

“나는 점을 쳐서 이를 정하겠다. 내 뜻을 대신들에게 전하라.” 

조말생은 불이 나게 빈청으로 달려가 전했다.

“전하께서는 점을 쳐 정하시겠답니다.”

그 말을 들은 신료들은 하나 둘 빈청을 나갔다.
태종은 교태전으로 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중전이 다급히 물었다.

“어찌하기로 하셨습니까?” 

태종은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아……. 예! 여러 신료들이 어진 이를 세자로 택하자고 합니다.”

중전의 성깔을 알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헛말을 한 것이다.

중전은 불같이 역정을 내며 말했다.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재앙의 근원이 됩니다. 절대로 그리할 수는 없습니다.” 

태종은 중전의 말을 듣고 쩔쩔매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그리 하겠습니다.” 

태종은 급히 교태전을 나왔다. 

태종도 혼이 절반정도는 나간 것이다. 신료들에게는 ‘점을 치겠다.’고 하고서는, 중전에게는 ‘양녕의 아들을 세자로 하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강녕전에 돌아온 태종은 주위를 물리쳤다. 

‘어찌 정해야 한다는 말이냐!’

‘양녕의 아들, 어진 자…….’ 

‘정말로 점을 쳐 정해야 될까?’ 

아무튼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태종은 조말생을 급히 불러 전지했다.

“논의 가운데 점괘를 따르도록 원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그리 하고자 했다. 그러나 국가의 근본을 정하는 것이니 어진 사람을 고르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나는 이제의 아들로서 세자를 대신 시키고자 했으나 많은 신료들이 ‘불가하다’고 말하니, 마땅히 어진 사람을 골라서 아뢰어라.” 

조말생은 빈청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하지만 빈청에는 영의정만 홀로 남아 있었다. 이미 대신들은 흩어진 후였다. 

조말생은 급히 삼정승과 육조 판서들을 다시 빈청으로 모이게 하고 전하의 교서를 전했다. 

“전하께서 어진 사람을 골라라 하십니다.”

논의를 마친 대신들이 모두 편전으로 몰려갔다. 
아니 논의라 할 것도 없다. 신료들이 어찌 세자를 정한단 말인가!

편전에 전하는 아니 계셨다.
대신들은 그저 발만 동동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환관의 ‘주상 전하 납시오.’ 소리와 함께 태종이 편전에 들었다.

유정현이 먼저 고했다.

“전하!

아들을 알고 신하를 아는 것은 군부(君父)와 같은 이가 없사옵니다.”  
전하의 뜻에 맡기겠다는 말이다. 

태종은 결심을 굳힌 듯 말했다.

“옛 사람이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의 복이 된다.’고 말했다. 효령대군은 자질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전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 두려워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했었다. 그러나 나의 큰 책을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정치의 요체를 알아서 매양 큰일에 헌의(獻議, 윗사람에게 의견을 아룀)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생각 밖에서 나왔다.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치니, 중국의 사신을 손님으로 권하여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다. 그 아들 가운데 장대한 놈이 있다. 효령대군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 또한 불가하다. 그러니 충녕대군이 대위를 맡을 만하다.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유정현 등 모든 대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합창했다.

“전하! 지당하신 하교이시옵니다. 신 등이 말한 어진이도 충녕대군이옵니다.”

충녕대군이 세자로 정해졌다.

대신들은 한숨을 돌렸다.

‘만약 양녕의 아들이 세자로 되었다면…….’

신료들이 모두 나가자 홀로 남은 태종은 목이 메이도록 통곡했다. 

어찌 아비로서 장자인 양녕을 내치는 것이 좋기만 했겠는가! 
오장육부가 끊어지는 고통이다. 

하지만 태종은 곧 마음을 추스린 뒤 조말생에게 하교했다.

“대저 이와 같이 큰일은 시간을 끌면 반드시 사람이 상하게 된다. 너는 명령을 내어서 속히 하례하게 함이 마땅하다.” 

태종은 혹시 나쁜 일이 일어날까봐 조급한 마음이 들어, 충녕을 세자로 삼을 것을 신료들에게 하례하게 했다. 온 천하에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었음을 선포하도록 한 것이다.  

다음날 조정의 모든 문무백관들이 어전에 들어 충녕이 세자가 된 것을 하례했다.

하례를 마치고 태종은 즉시 장천군(長川君) 이종무를 개경에 보내어 종묘에 고하게 했다.

“세자 이제가 지난해 봄에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꾸짖는 글을 지어서 고했으므로 신이 오히려 보존하였는데, 일 년이 되지 못하여 다시 전날의 잘못을 저질러서 자못 심함이 있었으나 신이 또 가볍게 꾸짖어 그가 뉘우치고 깨닫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 글을 지어서 고하였는데 그 사연이 심히 사람됨이 온화하지 못하고 거칠며, 전혀 신하의 예가 없습니다. 모든 대소신료가 함께 상소하여 폐하기를 청하고 충녕대군이 효성스럽고, 우애스럽고, 온화하고, 인자하여, 진실로 세자에 합당하다는 여망이 있었으므로 이것을 감히 고합니다.” 

곧이어 태종은 상호군(上護軍, 정3품 무관) 문귀를 전지관(傳旨官)으로 삼아 백관들이 양녕을 폐하자고 청한 상소를 가지고 개경으로 가서 이제에게 보이고, 폐하여 내친다는 뜻을 전지하게 했다. 

양녕은 지난달 초부터 개경의 옛 궁궐에 거처하고 있었다.

영의정 유정현 등이 편전에 들어 청했다. 

“이제(양녕)와 그 가속을 춘천으로 내치소서.”

태종은 그리하라 윤허했다. 

하지만 유정현이 나가고 조금 있다가 다시 전지했다.

“성녕대군이 죽은 이후부터 중전이 하루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날이 없다. 또 큰 아들 이제를 가까운 고을에 두기를 청하여 소식이라도 자주 듣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 물이 깊어서 떠나보내기가 어려우니, 그를 사저에 내보내어 물이 줄기를 기다려 곧 보내도록 하라.”

사실 태종도 그리하고 싶었다.

그러자 유정현 등이 몰려와 강하게 반대했다,

“양녕을 개경에 머물러 둘 수는 없사옵니다.” 

어쩔 수 없이 태종은 다시 명했다. 

“첨총제(삼군도총부의 무관) 원윤을 배치관으로 삼아 개경에 가서 근수비(根隨婢, 시녀) 13명, 종 6명, 어린 환관 4명을 주어, 양녕을 경기도 광주에 안치하라.”  

그리고 태종은 도승지 조말생을 불러 신하와 백성에게 전지했다.

오기수 김포대 교수
오기수 김포대 교수

“세자를 어진 사람으로 세우는 것은 곧 고금의 대의요, 죄가 있으면 마땅히 폐하는 것은 오로지 국가의 항구한 법식이다. 나는 일찍이 적장자 양녕을 세자로 삼았는데, 나이가 성년에 이르도록 학문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주색에 빠졌다. 나는 그가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라 여기고 장성하여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새사람이 되기를 바랐으나, 나이가 20이 넘어도 도리어 군소배와 사통하여 불의한 짓을 자행했다. 지난해 봄에는 그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자도 몇 명 있었다. 이에 양녕이 그 허물을 모조리 써서 종묘에 고하고, 나에게 상서하여 스스로 뉘우치는 듯했으나, 얼마 가지 아니하여 또 간신 김한로의 음모에 빠져 다시 전철을 밟았다. 내가 부자의 은혜로써 다만 김한로만을 내쳤으나, 양녕은 뉘우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망하고 노여운 마음을 품어 분연히 상서했는데, 그 사연이 심히 패역하여 전혀 신하의 뜻이 없었다. 의정부·훈신·육조·대간 및 문무백관이 합사(여러 관원이 합동하여 상소함) 하고 소장에 서명하여, ‘세자의 행동이 종사를 이어받아 제사를 주장하거나 막중한 국사를 맡을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태조의 개창한 어려움을 우러러 생각하고, 또 종묘사직의 대계를 생각하여 대소신료의 소망에 굽어 따르시어 공의로써 결단하여, 세자를 폐하여 외방으로 내치도록 허락하고, 종실에서 어진 자를 골라서 즉시 세자를 세워서 인심을 정하시옵소서.’ 말하고, 또 이르기를, ‘충녕대군은 뛰어나게 슬기롭고 총명하며, 공손하고, 검소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고, 학문을 좋아하고, 게을리 하지 않으니 진실로 어진 세자의 여망에 부합합니다.’고 말했다. 내가 부득이 양녕을 외방으로 내치고 충녕을 세워 왕세자로 삼는다. 옛 사람이 ‘화와 복은 자기가 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 말했으니, 내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애증의 사심이 있었겠느냐? 아……아! 중외의 대소신료는 나의 지극한 생각을 본받으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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