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오직 백성을 위해 평생을 가시고기 같은 삶을 살고 간 방촌 황희. 황희는 세종대왕과 함께 무려 18년간 영의정으로 재임하며 오직 백성들의 아픔과 더 나은 삶을 위해 일하며 세종과 함께 백성을 위한 정치에 날실과 씨실이 되어 지치(至治)의 시대를 이룩한 인물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세종과 함께 청렴함과 바른 정치로 백성을 위한 새로운 지치의 시대를 이룩한 황희의 삶을 지금 이 시대에 투영해 보고자 오기수 김포대학교 교수(경영관광학부)가 집필한 역사소설 「백성의 臣(신) 황희」를 13회에 걸쳐 연재한다.

부름

남원은 황희의 본향이다. 

그래서 태종은 황희에게 노모와 함께 처자식들을 모두 거느리고 남원에 가 편히 살도록 배려한 것이다. 

황희는 남원에 내려오자마자 조부 황균비의 묘소를 찾았다. 술을 올리고 절을 한 후 멀리 보이는 지리산을 바라보며, 고향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유유자적 하며 마음 편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임금의 장인인 심온마저 저리 죽은 마당에 목숨줄이라도 붙잡고 있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하지만 물설고 낯설은 깊은 산골의 시골살이가 녹녹치는 않았다. 25년이 넘는 관직생활에서 갑자기 물러나니 하루하루가 길고 길었다.

그래도 산목숨이니 남원에 귀양 온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지난해 5월 초여름에 내려와 한해를 보냈다. 늙은 나이에 시작한 시골살이도 곧 익숙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살까 했는데, 해가 뜨고 해가 지니 세월이 흐르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황희는 그해 여름 집 가까이에 있는 시냇가 소나무 숲 언덕에 조그마한 초당(草堂, 초가 누각)을 지었다. 그곳은 6대조 할아버지 황감평이 잠시 거처하던 일재(逸齋)라는 글방이 있었던 자리이다. 지대가 높고 평평한 곳이어서 더위를 식히고 마음을 다독이기에 좋은 곳이다. 풍광도 꽤나 아름다운 곳이어서 광통루(후에 광한루)라 이름 지었다. 

지금 생각하니 지난해의 여름은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하기도 싫은 1년이었다. 이제는 하루가 평안하다. 해가 뜨면 단정히 앉아 《예부운략(禮部韻略)》을 벗 삼아 세월을 보내고 있다. 아직은 세상 사는 이치를 따지기 싫어 경서와 사서(史書)는 멀리 하고 있다. 찾아오는 문객도 없지만 일체 손님을 맞지 않았다. 

이제는 산이 보이고 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을이 되니 산골 풍경이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감나무의 홍시가 먹음직해 보이고 떨어지는 밤톨을 줍고 싶어졌다. 들에서는 농부들이 벼 배기가 한창이다. 광통루에 앉아 곡식이 익은 들녘을 보니 붓을 들고 여유를 부리고 싶어졌다.

황희는 시를 지었다.

'대추가 발갛게 익은 골짜기에 밤까지 익어 뚝뚝 떨어지니, 벼를 벤 그루에 게까지 어찌 나와 다니는가? 술이 익어 체 장수가 체를 팔고 돌아가니, 술을 걸러서 먹지 않고 어찌하라.'

대추가 붉게 익고 알밤이 떨어지며, 벼를 벤 논에서는 게들이 떨어진 이삭을 찾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을날의 정취이다. 마침 햅쌀로 빚은 술이 익었는데, 술을 거를 새 체를 샀다하니 술 한 잔 하고픈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남원 살이가 제법 익숙해진 것이다. 

저 말리서 물레방아 찧는 소리도 제법 정겹다. 

해가 바뀌고 또 봄이 왔다. 벌써 남원에서 봄을 두 번이나 맞이하고 있다. 이제는 이웃집 사람들도 황대감 집이라며, 오가며 인사할 정도로 친숙해졌다.

어느 날 이웃집 농부가 찾아와 물었다.

“대감마님!

오늘이 저의 아버지 제삿날인데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그래도 선친의 제사는 지내야겠지요?” 

황희는 얼른 대답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네!” 

며칠 후 또 다른 이웃집 농부가 와서는 물었다.

“대감마님!

오늘 아버지 제삿날인데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제사를 안 지내는 것이 옳겠지요?”

황희는 즉시 대답했다.

“안 지내는 것이 옳겠네!”

부인이 이 말을 듣고 물었다.

“똑같은 일인데 왜 지난번 사람에게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하시고, 오늘 온 사람에게는 안 지내는 것이 좋다고 대답하십니까?” 

황희가 대답했다. 

“부인의 말도 옳소.

저번 사람은 제사를 지내고 싶어 했기에 지내는 것이 좋다고 대답했고, 이번 사람은 제사를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기에 안 지내는 것이 옳다고 했소. 제사를 모시는 것이야 각자의 마음가짐과 성의가 중요하지 않겠소?”

부인이 행주치마로 주름진 입을 가리고 모처럼만에 웃었다. 

사실 지난 세자(양녕)의 일에 대해 태종이 물을 때에도, 태종이 세자를 감싸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서 ‘세자는 연소합니다.’라고 세자 편을 든 것이다. 그 말이 올가미가 되어 여기까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황희는 문득 그 때가 떠오르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렸다. 

그해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 남원부사가 이간이 찾아 왔다. 

행랑채 아범이 소리쳤다.

“대감마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문을 열고 보니 남원부사였다. 황희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멋쩍은 모습으로 마루로 나가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부사.”

방에 든 이간이 절을 했다.

“대감, 소인 문안드립니다.

이간이라 하옵니다.”

이간은 지난봄에 남원부사로 부임했다. 

“이 누추한 곳까지 찾아 주시다니…….”

황희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간 이리 찾아온 관원도 처음이고, 일면식도 없는 자이니 좀 어색해서이다.

“별 말씀을 하십니다. 좀 더 일찍이 찾아 뵀어야 했는데 송구스럽습니다.”

“아니오, 나 같은 시골 촌부를 이리 찾아 주시니 고맙소.” 

“대감!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감의 존명은 익히 알고 있사옵니다.

앞으로 자주 문안 올리겠습니다.”

“부사, 그러지 마시오. 

나는 죄를 받아 이곳에 머물며 근신하고 있소.

관아 일도 바쁘실 텐데 다음에는 절대로 그리하지 마시오.”

생각 같아서는 이것저것 한양의 소식이라도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저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또 무슨 트집을 잡아, 일충파들이 조정에서 언제 자신의 이름을 거론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황희는 다시 한 번 이간에게 부탁했다.

“부사, 찾아주신 것은 정말 감사하오. 하지만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마시오.”

이간이 돌아가고 황희는 괜스레 마음이 복잡해졌다. 황희가 남원에 내려온 지 2년이 넘었지만, 지난번 부사도 그렇고 자신들에게 불똥이라도 튈까봐 얼씬도 않던 자들이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곳에 온 이후 벼슬살이들과는 일체 왕래를 끊고 살았다. 사소한 시비 거리라도 만들지 않기 위해서이다. 혹시 이간이 자신을 염탐하고 간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 모든 생각이 초라해진 자신 탓일 수도 있었다.

아직까지도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 같은 자신의 처지가 갑자기 한스러워졌다. 하지만 황희의 짐작이 맞았다. 병조 판서 조말생이 이간을 시켜 염탐하게 한 것이다. 일충파는 아직도 황희를 죽이지 못해 안달복달하고 있다. 틈이 보이면 자객이라도 보낼 기색이다. 

한 달이 지나니 눈이 많이 쌓였다.

첩첩산중에 있는 산골의 겨울은 유난히도 춥다. 

올해는 다른 해보다 눈이 많이 오는 것 같다. 눈 쌓인 지리산 자락은 산 짐승들조차 다닐 수 없는 철옹성이 된다. 오늘따라 황희는 꺼져가는 화로의 불씨를 뒤적이며 한 쉼을 쉬고 있다.

갑작스런 냉기에 소름이 돋았다. 불기 없는 화로 탓은 아니었다. 불현듯 자신 때문에 출사할 수 없는 자식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냉냉해진 것이다.

태종은 황희를 남원에 보내면서, ‘서인으로 만들고 자손을 서용하지 말라’고 명했다. 그로 인해 맏아들 지성은 그 날로 호조 좌랑에서 파직되었다. 차남 오성은 이제 과거를 보고 관직에 나갈 나이가 되었는데, 이 시골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셋째는 아직 어리지만 걱정이다.

자식들의 앞날을 생각하니 이대로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물론 지금까지 한두 번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 밤처럼 절실한 적은 없었다. 자신이야 늙었으니 이리 초야에 묻혀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비가 자식들의 장래를 망칠 수는 없지 않는가!

자식들을 촌부로 지내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멍멍해진 것이다. 때때로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은인자중하며 근신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자식들은…….’

황희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흐느낌을 감추어 주려는 듯 때 마침 세찬 바람에 풍경소리가 요란하다. 황희는 멍한 마음에 불씨하나 없는 화로만 밤새 뒤적였다. 그 날 밤은 너무 춥고 길었다.

겨울이 깊으면 봄날이 멀지 않다고 했던가!

응달진 산골에 잔설이 있던가 싶더니 벌써 이산저산 곳곳에 진달래꽃이 피었다. 황희도 광통루에 올라 지난 겨울의 답답한 마음을 봄바람에 날려 버렸다. 막 돋아나는 푸른 새싹들을 보니 어느덧 마음이 한결 가볍다.

봄기운이다.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으니 마치 신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황희는 해질 무렵까지 꼼짝하지 않고 그리 앉아 있었다.

황희는 저녁상을 물리고, 붓을 들었다.

'맑은 냇가 초가집 밖에 봄은 어이 늦었는고.배꽃은 흰 눈 향인데, 버들 빛은 황금색 새싹이 예쁘다.구름 덮인 깊은 골짝이 소쩍새 소리에 봄 날은 아득하여라.'

지난 겨울부터 미련을 두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만 한양 소식이 그리워진다. 이미 바깥 세상에는 봄이 왔건만 황희의 마음에는 아직도 봄은 멀고 먼 것 같다. 황희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한양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삶을 이대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자식들도 자식들이지만 잃어버린 욕망이 봄바람을 타고 불현 듯이 되살아났다. 황희는 그동안 멀리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들을 얼마 전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해 초겨울 의정부의 찬성이 된 맹사성으로부터 남원에 온 지 처음으로 서신이 도착했다. 한양에서는 새 임금이 즉위한 후 모두 옛날과 변함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맹사성은 요즘 몸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도 적었다. 황희는 맹사성이 일충파에 에워싸여 관직 생활이 쉽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언제 만나 못다 한 회포를 풀 수 있을까!

황희는 이번 겨울도 꽁꽁 언 심신산골에서 화롯불을 의지하며 살았다.

겨울이 물러갔다. 

임인년(세종 4) 봄이다. 경칩이 지난 지 며칠이 되었다. 뒤뜰에 있는 매화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황희에게도 인생의 봄이 왔다. 지금 막 한양으로부터 돌아오라는 교서를 받았다. 그렇게 꿋꿋하게 4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해오던 황희도 북쪽을 향해 사배를 올리고, 그대로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있다.

고진감래라 했던가! 

그 동안 날개 꺾인 새처럼 오갈 수 없는 남원에서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황희는 60세의 노인이 되어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 얼마나 그리운 곳인가!

세종은 황희가 돌아오자마자 고신(告身, 직첩)을 돌려주었다. 

태상왕은 황희가 귀경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궁궐로 불렀다. 상왕으로 있던 태종은 지난해 9월 임금이 강권하여 태상왕으로 존숭되었다. 황희는 시골에서 이제 막 상경한 모습으로 입궐을 했다. 자신의 자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큼직한 몸체에 통이 높은 갓을 쓰고, 푸른색의 거친 베로 만든 단령(團領)을 입고, 남색 조알(條兒)을 띠고 있었다.

황희인 줄 모를 정도로 늙고 남루했다. 

지난 4년간 그리 다녔다.

창덕궁 수강전에 들어서니 태상왕은 황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황희는 부복하여 태상왕에게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절을 올렸다.

“태상왕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소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불충한 신을 용서하시옵소서.”

황희는 복받치는 설움에 한참동안 흐느끼며 엎드려 있었다.

태상왕은 헛웃음을 지며 말했다.

“그만 일어나거라.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이리 볼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구나…….”

하지만 황희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쉬이 일어나지 못했다.

태상왕이 재촉했다.

“자!, 그만……. 

그만 일어나 앉으라. 

어서…….”

태상왕도 애써 마음을 추스린 듯한 촉촉한 말투였다.

그 자리에는 세종도 함께 있었다. 황희는 다시 일어나 세종을 항해 절을 올렸다.

“주상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소신 이제야 문안드리옵니다.

불민한 신을 용서하시옵소서.”

오기수 김포대 교수
오기수 김포대 교수

세종은 그저 옅은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그제서야 황희는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황희는 새 임금을 처음 뵌다. 대군시절에 먼발치에서 몇 번 뵌 적은 있지만 이리 가까이 뵙기는 처음이다.

태상왕은 주상에게 말했다. 

“이직과 황희는 비록 죄를 범했으나 정사에 익숙한 구인(舊人)이므로 버릴 수 없으니 가히 불러서 쓸 만하다. 더구나 황희는 전날에 잘못은 있지만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이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 

세종은 웃으며 답했다.

“알겠사옵니다. 태상왕 전하!

명심하겠사옵니다.”

세종은 또다시 미소를 지으며 황희를 바라보았다. 황희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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