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5시간씩 일하며 세계 최상위 로펌의 고문 변호사로 경력의 정점을 구가하던 추 와이홍. 생활에 필요한 모든 수발을 해주는 전업주부 아내가 있어 안락한 가정생활을 누리는 남성 동료들과는 달리 그에게는 아이도 가족도 취미생활도 인간다운 삶도 허락되지 않았다. 사표를 내던지고 세계여행에 나선 그는 중국 윈난성의 모쒀족 마을에서 난생 처음으로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느끼고 6년 넘게 살고 있다.

중국계 싱가포르인인 저자의 아버지는 사업차 들르는 항구도시마다 애인을 뒀다. 아버지와 달리 절대로 바람을 피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어머니와 이 모든 상황을 견디며 살아온 저자는 남성에게만 성의 자유가 허용되는 무늬만 일부일처제인 세상, 여성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인간다운 삶을 포기해야 하는 남성중심사회에서 페미니스트의 본능을 키워왔다.

모쒀족은 자유롭게 성관계를 하며 결혼, 이혼, 불륜이라는 개념이 없다. 모쒀족 여성들은 성년이 되면 화려한 의식을 치르고 혼자만의 방 ‘꽃방’을 쓰게 된다. 마을 축제와 공동노동, 식사와 담소, 온천욕 중에 구애의 눈빛과 대화가 오고가고 여성의 마음을 얻은 남성은 밤중에 그녀의 방문을 두드린다. 남성은 방문에 모자를 걸어두고 꽃방에 모자가 걸려있으면 아무도 그들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유롭게 성생활을 누리다가 임신하면 아이는 오로지 어머니의 자식으로 인정받으며 혈통은 모계로 이어진다. 가모장인 할머니, 할머니의 딸과 아들, 딸이 낳은 손주들로 이뤄진(아들과 여자친구 사이에 생긴 아이들은 그 여자친구의 가계에 속하므로) 모계 대가족이 모쒀족 가정의 기본 단위다. 

50여 언어로 번역돼 수십 년간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오래된 미래>를 통해 우리는 일처다부제가 잘 작동하는 라다크 사회를 알게 됐다. 라다크인과 모쒀인은 각각 인도와 중국 국경지대의 고산지역에 살며 티베트불교를 믿는다는 비슷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이들 사회를 발견한 것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 문화인류학 연구의 성과였다. 

절경으로 이름난 중국 윈난성의 루구호에 사는 모쒀족은 우리나라에 문화관광의 대상으로 먼저 알려졌고, 그동안 TV 교양 프로그램이나 여행잡지 등에서 종종 다루어졌음에도 가모장제 모계사회의 전통이라는 문화인류학적 의의가 대중에게 충분히 알려지지 못했다.

가수가 돼 서구 사회로 진출한 모쒀족 소녀의 성장기를 다룬 <아버지가 없는 나라>는 모쒀족의 역사와 문화를 비중 있게 다루면서 전통사회에서 벗어나 현대 도시에서 꿈을 펼치고 싶은 시골 소녀의 욕망이 중심이 된 이야기다.

이 책은 최첨단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성공한 변호사가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중국 오지의 모쒀족과 가족이 되어 6년 넘게 거주하면서 모쒀족의 세계를 철저히 탐색하고 체험한 페미니스트의 여정을 그렸다. 실재하는 가모장 사회에 대한 치밀한 기록인 동시에 여성이 중심이 된 사회가 남성에게도 합당한 자리를 내어주는 평등한 사회임을 보여준다. 

모쒀족 사회는 여성이 남성을 억압하는 사회가 아니다. 할머니의 남자 형제와 어머니의 남자 형제는 가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만큼 존중받는다. 남성은 경제력으로 평가받지 않고, 혼자 부양의 책임을 떠맡지 않고, 모든 가족 구성원이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눈다. 모쒀족 사회에서는 연장자에 대한 공경을 강조하지만, 나이가 적은 아이들도 존중받으며 자유롭게 의사를 개진한다. 고용주와 일꾼을 대등한 관계로 인식하며 권력과 힘으로 약자를 누르는 문화를 낯설어한다. 

현대 가부장제 사회는 남녀의 성적 결합을 기초로 한 핵가족 제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주로 여성의 성욕을 억압하고 남성에게는 암암리에 일탈을 허용하는 이중적인 기준 속에서 성매매가 일부일처제 사회의 필요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연인과 배우자에 대한 구속과 집착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누가 누구와 잤느냐”는 문제는 가족의 테두리를 넘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선거의 쟁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쒀족 사회에서는 각자 자유로운 성생활을 하며, 타인의 성생활을 알려고 하거나 입에 올리지 않고, 연인에게 집착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나라」 추 와이홍 지음·이민경 지음(흐름출판·2018)
「어머니의 나라」 추 와이홍 지음·이민경 지음(흐름출판·2018)

더 이상 가족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이 당연하지 않게 여겨지면서 현재의 가족제도는 위기에 처해 있다. 이혼율의 급증을 넘어 아예 결혼을 하지 않는 경향이 전 세계적으로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이미 혼외출산 비중이 절반을 넘어섰다(유럽연합 공식 통계기구 유로스타트, 2016년). 유럽 국가들은 이런 현실에 발맞추어 제도를 개편하고 가족의 개념을 재정립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이혼율이 매우 높고 가족의 해체가 심각한 상황이나 현실과는 달리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완강히 자리잡고 있다.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연애하고 헤어지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는 바람직하나 남녀의 성적 결합에 기초해 가족을 구성하다 보면 연애 상대가 바뀔 때마다 가족이 깨지는 것을 반복해야 한다.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연애 상대와 생계를 함께 하거나 아이를 함께 키우기란 어렵다. 현재의 가족제도 하에서 자유로운 연애는 불안정한 가족이라는 대가를 낳는다. 경제적 어려움과 정서적 불안정을 피하기 어렵다. 특히 안정된 환경에서 양육되어야 할 아이들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모쒀족은 가부장제 핵가족이 주류인 사회처럼 결혼과 이혼, 동거와 결별로 가정이 생기고 깨지고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태어난 모계 가정에서 죽을 때까지 안정되고 평화롭게 생활한다. 남성들도 동생들과 조카들을 돌보는 양육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아이들은 이모들을 엄마라고 부르며 이모들도 조카들을 자식으로 여긴다.

부모의 집착과 과잉보호 혹은 방임과 애정결핍 속에서 자라는 가부장제 핵가족 사회의 많은 아이들과는 달리 모쒀족 아이들은 어머니의 남자친구가 몇 명이든, 얼마나 자주 바뀌든 상관없이 언제까지나 어머니 곁에서 이모들과 삼촌들, 할머니와 할머니의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넘치는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다. 아버지는 누군지 모르거나 누군지 알더라도 서로 상관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특히 어머니와 오랜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에는 자신의 아이들을 계속 돌보는 경우도 있다. 

가부장제 부계사회도 가모장제 모계사회도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제도일 뿐이다. 모쒀족 사회는 관광지로 변모하고 중국 주류 사회에 흡수당하며 점차 전통문화를 잃어가고 있지만, 현대사회보다 더 자유롭고 평등한 이 ‘오래된 미래’는 연애, 결혼, 가족, 가정과 일의 양립, 자녀양육 등 삶의 모든 방면에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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