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오직 백성을 위해 평생을 가시고기 같은 삶을 살고 간 방촌 황희. 황희는 세종대왕과 함께 무려 18년간 영의정으로 재임하며 오직 백성들의 아픔과 더 나은 삶을 위해 일하며 세종과 함께 백성을 위한 정치에 날실과 씨실이 되어 지치(至治)의 시대를 이룩한 인물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세종과 함께 청렴함과 바른 정치로 백성을 위한 새로운 지치의 시대를 이룩한 황희의 삶을 지금 이 시대에 투영해 보고자 오기수 김포대학교 교수(경영관광학부)가 집필한 역사소설 「백성의 臣(신) 황희」를 13회에 걸쳐 연재한다.

민심

여름이 지나자 호조에서는 작년에 정한 공법의 세율에 부족함이 있다하여, 1결당 2말씩 증액시킬 것을 건의했다. 나라의 재정이 부족할 것을 우려하여 세율을 높인 것이다. 세종은 호조가 상정한 것을 즉시 윤허했다.
그리고 전국 8도 관찰사들에게 금년부터 이 공법에 따라 올해의 조세를 징수할 것을 전지했다. 세종이 공법을 시행하고자 한 지 꼭 10년 만이다.
공법의 시행이 하달되자 며칠 후 황해도 관찰사가 장계를 올렸다.
“본도는 을묘년(세종 17)부터 비와 홍수로 재해를 당하여 벼와 밭곡식이 여물지 못했고, 금년에는 한재로 인하여 더욱 흉년이 들었사옵니다. 비옵건대 백성들의 소망에 따라 옛 답험법대로 손실이 있는 만큼 조세를 감면해 주도록 하시고, 풍년을 기다려 곡식이 약간 잘된 뒤에 공법을 시행하시옵소서.”
세종은 황해도 관찰사의 요청을 단호히 물리쳤다.
얼마 만에 시행된 공법인데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하지만 의정부에 전교했다.
“함경도의 백성들이 근래에 북쪽 변방의 방어와 축성 및 사민(徙民)으로 인하여 노고가 다른 도보다 갑절이나 되니, 내가 심히 불쌍하게 여긴다.
함경도의 조세를 지금 행하는 공법의 수효에서 3분의 1을 감하라.”
처음 시행한 공법에 대한 민심을 생각하여 부역과 이민으로 힘든 함경도 인민에게 특별히 조세를 감면해준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함경도 관찰사가 장계를 올렸다.
“이제 공법을 정하시고 또 본도의 민생을 염려하시어 특별히 금년 조세의 3분의 1을 감하게 하셨사옵니다. 그러나 지난해 수세액이 1결당 2말이 조금 안되는 데도 인민들이 불평했사옵니다.
이번에 공법에 의거하여 하등(下等)으로 조세를 거두어도 거의 10만여 석에 이르오니, 비록 3분의 1을 감하더라도 작년의 갑절이 되옵니다. 금년은 본도의 곡식이 잘되지도 못했고 또 축성과 방어에 소용되는 비용이 많으니, 갑절이나 늘어난 조세를 어디서 충당하겠습니까?
원컨대 4진(鎭)이 튼튼해지고 각 군현이 안정되어 토지를 양전할 동안은 임시로 종전의 법을 좇아 답험법에 따라 조세를 거두게 하시옵소서. 
만약에 공법을 행하려면 모름지기 1, 2할은 더 감해야 도내 백성들이 싫어하지 아니할까 하옵니다.”
함경도 관찰사는 땅이 척박한 북쪽 지방의 경우 공법 시행으로 조세부담이 늘어날 것을 걱정하여 감면을 요청한 것이다. 
세종은 즉시 이를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게 했다. 
황희가 반대하며 아뢰었다. 
“양계 지역은 토지의 품질이 본래 하등이 아니오며, 벼곡식도 대체로 잘되어 다른 도와 다름이 없사옵니다. 이번에 공법을 정하고 모두 하등으로 매겨서 조세를 거두는 것은, 지경이 여진족 땅과 인접해 있으므로 배려하여 평안하고 화목하게 하려 함입니다. 또 공법은 많이 거두려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답험법과 비교하면 적게 거두려는 것이 명백하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오히려 북방의 민생을 깊이 생각하시어, 특별히 금년 조세의 3분의 1을 감하게 하시니 그 은혜가 지극합니다. 이번 장계에 함경도의 조세가 거의 10만여 석이나 된다고 말한 것은 그 수량을 잘 알지 못한 것이옵니다. 
지금 새로 공법을 세웠으니 경솔하게 답험법으로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신설한 4진의 인민과 경성과 길주는 사민으로 이주한 백성들이 생업을 이루지 못했으니, 금년의 조세는 지난번 감한 것에 추가적으로 그 반을 감하는 것이 편리할 것 같사옵니다.”
황희 역시 함경도 관찰사의 요청은 거부했지만 백성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더 감면하자고 했다.
오랜만에 공법에 대해 전하의 뜻과 같았다. 
물론 이는 황희가 공법을 지지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황희는 한번 만든 법은 시종일관 집행되어야 하며 고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고집했을 뿐이다.
세종은 황희의 뜻에 따라 그대로 함경도 관찰사에게 전교했다.
“4진과 길주ㆍ경성의 인민들에게 거두는 조세는 이미 여러 사람의 의견을 좇아 결정했으나 그 지방 백성들의 생계가 어려워 원망과 탄식이 없지 않을까 염려되니, 추가적으로 지난 번 감면한 절반을 더 감하라. 공법은 이미 정해졌으니 법을 세운 초년의 상황을 보아 다시 고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세종은 며칠 후 의정부에 다시 명했다.
“지금 공법을 행하는 것은 본래 백성들에게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 금년은 각도의 풍흉이 한결같지 아니한데, 법을 세운 초두에 법대로 행하면 근심과 탄식이 일어날까 염려된다.
그러므로 금년의 조세는 경상과 전라 양도는 공법에 의하여 시행하고 그 나머지 충청도는 4분의 1을 감하며, 경기ㆍ강원ㆍ황해ㆍ평안 등 4도는 3분의 1을 감하라. 함경도 각 군현은 근년 이래로 다른 도에 없는 방어와 축성의 일이 조금 많았으므로 금년의 조세는 특별히 2분의 1을 감하도록 하라.
또한 함경도의 새로 설치한 4진과 새로 옮긴 백성, 평안도의 새로 옮긴 백성은 3분의 2를 감하게 하라. 이주해서 살고 있는 인민은 온 집안이 옮겨 가서 생활이 제대로 되지 못할 것이므로 더욱 가련하다.” 
흉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어려움을 걱정하여 공법에 따른 조세를 대폭 감면하게 한 것이다.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는 진정한 마음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평안도의 인민 15명이 공법에 불평하는 상소를 올렸다.
“지금 공법으로 조세를 징수할 때 농사짓지 않는 묵은 토지에서도 거두니 백성들이 모두 민망하게 여깁니다.
바라옵건대 《법전》에 의거하여 예전대로 답험법에 따라 손실된 것만큼 감해 주시든가, 또는 다시 토지를 양전한 뒤에 공법을 행하시든가, 혹은 여진족을 방비하는 일을 그만두게 하소서. 반이 황무지가 되면 절반의 조세를 덜어 주게 하시옵소서.”  
이제 막 시행하려는 공법에 대한 반발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조세가 증가할 것을 걱정하여 공법에 대한 민심이 좋지 못하다. 특히 척박한 땅이 많은 북쪽 지역에서의 반발이 거셌다.
그러자 도승지 신인손이 공법을 정지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근자에 들으니 도성과 외방에서 민심이 흉흉하고 공법을 싫어하여 신문고를 치면서 상언하는 자까지 있다고 합니다. 대개 공법은 풍년이면 백성들에게 좋고 흉년이면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 것이오니, 다시 풍년을 기다리는 것이 심히 편리하겠사옵니다. 
우선 공법을 정지하고 다시 답험법을 행하시옵소서.”
이런 이야기를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다.
세종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의 뜻도 또한 그러하다.
다만 이미 정한 것을 경솔하게 고치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지금 억지로 공법을 행하게 되면 백성들이 떠돌게 되거나 사망하는 자가 있을까 참으로 염려된다. 마땅히 대신들과 이를 의논하라.”  
다음날 세종은 도승지 신인손과 좌부승지 권채를 불러 명했다. 
“나는 처음부터 대신들과 더불어 의논하여 공법을 정하고 한두 군현에 먼저 시험해 보고자 했다. 하지만 대신들이 ‘한 도에서 시행하여 본 뒤에야 그 편의 여부를 알 수 있다.’고 청했고, 뒤에 또 다시 ‘8도에서 시행하자.’고 청했다. 나 역시 금년 6월 이전은 비가 적당이 와서 혹시나 풍년이 들어 공법을 시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미 전국 8도로 하여금 시행하게 했다.
하지만 7월 이후에는 비와 가뭄이 고르지 못하여 여러 도의 농사가 부실하고 풍재와 충재도 있어 백성들이 살 수 없게 되었으니, 공법을 갑자기 시행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당초에 대신들과 더불어 논의하여 정한 일이라 내 혼자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공법상정소 제조(提調)들과 의논하여 아뢰라.”
세종은 처음부터 일부 지역에 공법을 시험한 다음 전국적으로 시행할 것을 여러 차례 말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세법의 통일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전국에 동시로 시행하게 했었다. 세종은 그 과정에서 공법을 보다 자세히 논의하고 시행하기 위하여 임시 기구인 공법상정소는 설치했었다. 제조에는 신개와 허조 그리고 호조 판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때문에 세종은 왕이지만 조정 대신들과 함께 논의하여 정한 공법을 마음대로 정지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에 영의정 황희가 아뢰었다.
“실로 전하의 하교가 지당하시옵니다. 
금년 조세는 우선 전례대로 경차관(敬差官)을 8도에 나누어 보내 답험법에 따라 조세를 징수하시옵소서.”  
황희가 마음을 바꾸어 공법을 정지하고 답험법으로 조세를 징수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찬성 신개는 공법 시행을 주장하며 아뢰었다.
“이미 시행하게 된 것을 경솔히 고칠 수는 없사옵니다.
공법을 그대로 시행하시되 모든 사람이 함께 알만한 전손(全損)된 곳은 관원을 보내 살펴보게 하여 조세를 감면하시옵소서.”
얼마 전에 황희가 했던 말을 신개가 하고 있다. 신개는 오르지 전하의 뜻에 따르려는 것이다.
대신들의 의견이 분분하니 세종이 명했다.
“제조들의 의논이 같지 않으니 의정부와 육조가 함께 의논하여 아뢰라.” 
세종은 공법 시행을 정지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공법 시행의 명분을 남기고 싶었다.
다음날 편전에서 공법을 다시 의논했다. 
참찬 최사강은, 
“시행해야 합니다.” 하고, 
우의정 노한과 병조 판서 황보인 등은, 
“금년만은 우선 정지하시옵소서.” 하고, 
참찬 조계생은, 
“경차관을 각도에 보내어 각 군현의 풍흉을 살펴보고, 공법으로 차등하여 조세를 거두소서.” 하고, 
예조 판서 권제 등은, 
“영구토록 시행할 수 없습니다.”고 했다. 
역시 어제와 같이 대신들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세종이 명했다. 
“공법은 옛일을 상고하고 지금의 실정을 참작해서 대신들과 더불어 의논하여 정한 것이고, 본래 백성들에게 편리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내가 부덕하여 20여 년을 왕위에 있으면서 일찍이 한 해도 풍년이 없었고, 해마다 흉년이 들었으나 뒷세상의 풍년도 기약할 수 없으니 공법은 결코 시행할 수 없겠다!
그러나 공법을 이미 정해서 전국에 반포했은즉, 후세의 자손이 필시 행할 때가 있을 것이다.
올해는 황희 등의 의논에 따르라.” 
어제 황희는 공법 시행을 정지하고 답험법으로 조세를 거두자고 했다. 세종의 10년만의 꿈이 다시 무너졌다. 전하가 고배를 마셨다. 이 또한 백성을 위해서이다.
세종은 도승지에게 즉시 전지를 내렸다. 
“각도의 조세는 공법을 버리고 예전대로 답험법에 따라 징수하여 민생에게 좋도록 하라.” 
세종이 공법의 정지를 선포한 것이다. 
민심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세종은 공법을 폐지하지 않고 정지시킨 것이다. 아직은 희망이 있다.

무오년(세종 20) 춘분이 지나고 날씨가 풀리자 시골에서는 농사 준비로 분주했다.
세종은 흥천사 사리각의 수리를 시행하라 명했다. 
사리각의 수리는 3년 전인 지난 을묘년(세종 17)에 신료들의 거센 반대를 물리치고, 세종이 끝내 공사하기로 결정한 일이다. 그러나 그 공사는 흉년 등으로 지금까지 실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여 세종은 공사를 시작하게 한 것이다.
공사는 6백여 명의 승도를 사역시키고, 방패군과 보충군을 배정하여 수리하게 했다. 방패군은 임금과 궁궐을 호위하는 군인이다. 보충군은 아비가 양반이고 어미가 천인일 때 일정한 기간 복무하면 양인이 될 수 있도록 편성한 군사인데, 이번에 공사에 동원된 것이다. 
공사에서 승도로 자원하여 30일 동안 노역한 자는 도첩을 주고, 특히 양식을 가지고 온 자는 15일만 노역해도 도첩을 주도록 하니, 전국 각지의 도첩 없는 승도들이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한양으로 모여 들었다. 관에서는 이들을 승군(僧軍)이라 불렸다. 
세종은 공사가 시작되자 책임자들에게 명했다.
“사리각은 태조께서 지으신 것이므로 무너지게 할 수가 없어 고쳐 지으라 명한 것인데, 반드시 사치하고 화려하게 할 것이 아니라 튼튼하게 하고자 할 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기울지 않게 하라.” 
세종은 신료들의 반발을 의식해서 태조가 세운 사리각을 수리하는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신료들에게 불교를 숭상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최대한 몸을 낮춘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리각 수리가 진행된 동안에는 신료들의 반대는 없었다. 공사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4월에 실시된 과거시험에서 발생했다. 영의정 황희는 이 과거시험의 상시관이었다. 

오기수 김포대 교수
오기수 김포대 교수

세종은 33명이 응시한 3차 시험인 전시(殿試)에 친림하여 책문을 내렸다. 
“대간(臺諫)이란 임금의 이목이며 조정의 중한 청렴한 벼슬아치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어진 이를 택하여 이를 제수하고 서열의 구애 없이 벼슬자리를 옮기는 것은 충성스럽고 곧은 언로를 개방하고 그들의 풍채와 절개를 권장하려는 것이다.
근래에는 으레 자격에 따라 인명하니 보통 관원과 다름이 없다. 혹자는 ‘이렇게 되면 대간이 한자리에 오래 머물게 되어 격려하는 뜻도 없으려니와, 언로가 장차 막히게 되어 정직하게 진언한 자가 적을 것이다.’고 말하는데, 그 말이 과연 그러한가 그렇지 않는가?
답하여 쓰라, 내가 채택하여 쓰겠다.”  
대간이란 임금에 대한 간쟁(諫諍, 왕의 과오나 비행을 비판하는 일)과 관리들을 감찰하여 탄핵하는 임무를 맡은 사헌부와 사간원 소속의 관원들을 말한다. 이번 책문은 이 대간들의 중대성과 어떻게 처우해야 적임자를 뽑을 수 있는지를 논하게 한 것이다. 
이 과거시험에서 하위지가 쓴 대책(對策)이 장원으로 뽑혔다. 
하위지가 쓴 답안이다. 
“대간이란 구중궁궐의 귀와 눈이며 백관의 법도로서 조정의 중책입니다. 그러기에 임금의 좌우에 서서 임금과 더불어 시시비비를 다투며, 임금은 ‘행할 만하다’고 하는데도 대간은 ‘결코 행할 수 없습니다’ 하고, 임금은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하는데도 대간은 ‘결코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고 합니다.
대간은 진노에 부딪치면서도 용안을 보며 항거하는 자이니 그 임무가 매우 무겁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나서 벼슬을 하지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벼슬을 한다면 반드시 대간이 되어 임금과 가까이 하려는 것은, 족히 그 말씀을 듣고 계책을 행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언책(言責, 말로써 잘못을 꾸짖고 나무람)을 맡은 자는 도끼를 앞에 놓고,  죄인을 삶아 죽이던 가마솥은 뒤에 두어 어떤 위협 속에서도 그 일신을 돌아보지 않고 기탄없이 말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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