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오직 백성을 위해 평생을 가시고기 같은 삶을 살고 간 방촌 황희. 황희는 세종대왕과 함께 무려 18년간 영의정으로 재임하며 오직 백성들의 아픔과 더 나은 삶을 위해 일하며 세종과 함께 백성을 위한 정치에 날실과 씨실이 되어 지치(至治)의 시대를 이룩한 인물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세종과 함께 청렴함과 바른 정치로 백성을 위한 새로운 지치의 시대를 이룩한 황희의 삶을 지금 이 시대에 투영해 보고자 오기수 김포대학교 교수(경영관광학부)가 집필한 역사소설 「백성의 臣(신) 황희」를 13회에 걸쳐 연재한다.

반대

기미년(세종 21) 5월 초다. 

이제 제법 날씨가 덥다. 

시골에서는 보리 베기와 모내기가 한창이다.

그런데 대궐 안은 참담한 일로 소란스럽다.

도승지 김돈이 사색이 되어 편전에 들어 아뢰었다. 

“임영대군 이구(李?)가 기생 금강매를 좋아해 첩으로 삼고, 또 내자시의 여종 막비를 간통했사옵니다. 내자시의 계집종 막비의 어미가 덕수궁의 방자가 되면서, 막비가 그 어미를 따라 궁을 드나들었는데 이구가 비밀리에 사통했습니다. 그 뒤에 막비가 중전의 시녀가 되었는데도 또 구가 사통했습니다. 그리고 가야지는 상의원의 바느질하는 계집종인데 구가 사통하였고, 뒤에 소용(昭容, 후궁으로 정3품)의 시녀가 되었는데도 또 사통하여 잉태한 지가 이미 수개월이 된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더구나 막비가 중전의 시녀로 세자부(동궁전에 속한 관아)의 여종 금질지를 좋아하여, 늘 서로 만나 추잡한 짓을 벌였사옵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임영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14살(세종 15) 어린 나이에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부인 남씨와 이혼했다. 부인 남씨는 개국공신 남은의 손자인 남지(南智)의 딸이었다. 그런데 그 남씨에게 어릴 적부터 정신질환이 있었던 것이다.

혼인한 지 한 달 뒤에 세종은 영의정 황희?좌의정 맹사성?우의정 최윤덕 등을 불러, ‘임영대군의 아내 남씨는 나이가 12살이 넘었는데 아직도 오줌을 싸고 눈빛이 바르지 못한데다가 혀가 심히 짧고 행동이 미친 듯한 모습이니 내쳐야겠다.’고 말했다.

이 때 황희는 ‘부부는 일생을 같이하는 사람인데 이와 같이 몹쓸 병이 있는 사람을 어찌 대군의 배필로 삼겠습니까. 그 아비 남지가 애초에 계달하지 아니했으니 죄가 작지 아니하오나 추론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조부도 미친병이 있었고 남지의 장인에게도 이 병이 있었으니 속히 내보내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세종은 임영대군과 남씨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그해 12월 의정부 우찬성 최사강의 손녀이자 요절한 최승녕의 딸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게 했다. 

그 일이 있고나서부터 임영대군의 성품이 삐뚤어졌다.

세종은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두 계집종은 모두 나와 관계가 없으므로 무방할 듯하다. 그러나 구는 성품이 본래 글 배우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중전이 울면서 타일러도 오히려 깨우쳐 고치지 아니했다. 일전에 금강매를 범한 이후에도 음욕을 억제하지 못했으니 징계하지 아니할 수 없다.

내가 아들이 많은데 만약 지금 구를 용서하면 다른 아들들을 어떻게 가르치겠는가? 

영의정과 우의정을 은밀히 들게 하라.”

세종은 황희와 허조가 급히 편전에 들자 난처한 듯 말했다.

“이구는 학문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여색에 빠졌으니, 내 엄히 도리로 가르치고 조금이라도 범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꾸지람을 더했소.

하지만 구가 여색 때문에 두 번이나 꾸지람을 듣고도 오히려 뉘우쳐 고치지 아니했소. 세상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고 소문이 떠들썩할까 두렵소. 구를 먼 지방에 안치하고 이를 부추긴 환관 김전을을 극형에 처하려고 하오.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황희는 순간 양녕대군의 생각이 떠올랐다.

황희는 만류하며 아뢰었다.

“전하!

너무 과하니 가벼운 죄로 처결하시옵소서.” 

허조도 황희의 의견에 따르기를 주청했다.

두 정승이 나가자 한참 후 세종은 침통한 표정으로 형조에 명했다.

“구의 고신을 거두고 집 앞을 군사로 지키게 하여 사람이 왕래하지 못하게 하며, 모든 노비를 다 빼앗아 들이라.

구로 하여금 황음을 펴게 한 환관 김전을은 장 1백대를 쳐서 충군(充軍)시키고, 악공 안막동의 고신을 빼앗고 장악원의 힘든 노역에 배속시키고, 응인(鷹人, 내응방에서 매를 부리던 사람) 김흥의 고신을 빼앗고 충군시켜라. 금강매는 본고향 공주로 돌려보내고, 막비와 금질지는 모두 소속 관아에서 노역을 시키게 하라.”

그러자 임영대군에 대한 소문이 삽시간에 궁궐 안에 퍼졌다.

다음날 도승지가 급히 편전에 들어 아뢰었다.

“전하!

사헌부에서 임영대군이 고신을 빼앗긴 이유를 캐묻고 있다 하옵니다.”

세종은 혀를 차며 도승지에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어제 그 일에 대해서 구에게 대답하지 말라 했다. 

대간을 불러 물어 보아라.” 

잠시 후 지평 정효강과 우헌납 황보공이 편전에 들었다. 

먼저 황보공이 아뢰었다.

“신 등이 듣건대 임영대군의 고신을 거두고 환관 김전을은 형장을 쳐서 충군시키라 명하셨다 하오니, 신 등은 그 죄목을 듣기 원하옵니다.”

세종은 난처해 하며 말했다. 

“구는 본래 성품이 배우기를 게을리 하고 행동이 망령된 경우가 많았다. 이에 형제들이 많기 때문에 그의 고신을 거두어 다른 아들들에게 경계하려 함이다. 무릇 사람이 젊어서 호화로우면 장성하여 교만하고, 젊어서 고생을 겪으면 커서 성취함이 있다.

지금 구의 죄는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일이고 또 종사에 관계되는 죄도 아니다. 이를 규찰함은 바로 종부시(宗簿寺)의 직책이니 대간에서 규찰할 일은 아니다.” 

그러자 지효강이 아뢰었다. 

“하오나 신 등이 임영대군의 고신을 거둔 이유를 살피지 못했사옵니다. 형조의 관문을 통해 김전을을 충군시키고 두 계집을 내어 쫓고, 기생 금강매를 본고향으로 돌려보낸 것을 알았사옵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구의 죄가 반드시 이 무리들과 인연한 것이라 짐작하고 있사오나,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이유를 캐물은 것이옵니다. 신 등만 특별히 의심하는 것이 아니오라 대소신료들 중 의혹하지 않은 이가 없사옵니다. 원컨대 의금부로 하여금 추국하게 하시고, 성상께서 특별히 자비를 베푸시어 너그러운 법에 따르셔도 무방하옵니다. 하물며 구는 나이가 젊으니 지금 범한 바는 반드시 아첨하는 작은 무리들의 소치이옵니다.

모름지기 그 무리를 중하게 논죄하여 규율을 엄히 하기를 원하옵니다.”

세종은 매우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임금이 이미 단정한 일을 사헌부가 직접 그 당사자에게 캐묻고, 또 그 잘못된 점을 찾아내려 하는 것은 무례에 가깝다.

지금 너희들이 아뢰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추국하려 함도 매우 무례하다. 내가 구의 범한 일에 대해 일일이 지적해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비록 말하지 않을지라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하물며 임금의 일언일동(一言一動)을 자세히 기록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내가 어찌 숨기겠느냐?

조금만 기다리면 그 상세한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종친이 범죄한 바가 있으면 비록 매우 심하다 할지라도 의금부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지 않았으니, 이는 예부터 종친을 후하게 대접한 뜻이다. 먼 종친에게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친 아들인데 어찌 그리하지 않겠는가?

구의 죄는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일도 아니며 또 종사에 관계되는 일도 아닌데, 어찌 사헌부에서 감히 논의할 바이겠는가? 구의 일은 작은 과실이니 내가 비록 논하지 아니하여도 좋다. 하지만 내가 아들이 많기 때문에 징계하여 다른 아들들을 경계함이니 이것은 구의 불행이다.

너희 사헌부는 알 필요가 없다.” 

그러자 효강이 물러서지 않고 아뢰었다. 

“의금부로 하여금 캐묻게 함이 바로 여러 아드님을 경계하게 하시는 것이옵니다.” 

세종은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 높여 말했다. 

“종친을 돈독히 하고 후하게 함은 예부터 그리했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허물을 듣지 못하게 하려고 처결했는데, 사헌부가 캐묻고자 함은 무례하지 않느냐?

다시는 더 논하지 말라.” 

그들이 나가자 세종은 황희를 급히 불러 말했다. 

“영상, 참으로 참담하오.

지금 사헌부에서 구의 일을 가지고 추국하고자 하니 더 이상 논의되지 않게 해주시오.”

황희가 대답했다.

“예, 전하. 

성심을 다하겠사옵니다.”

황희가 대사헌을 불러 더 이상 구의 일이 논의되지 않도록 부탁했다. 황희가 나서니 사헌부가 잠잠해졌다.

자식들의 일은 군신에 관계없이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경상도 관찰사 이선이 장계를 올렸다. 

“전하!

공법을 행하여 거두는 세수가 예전보다 많사옵니다. 

공법의 시행을 중지하시옵소서!” 

참으로 맹랑한 말이다. 

어떻게 시행한 공법인데!

세종은 안색을 붉히며 전지했다.

“이선이 보낸 장계의 뜻이 본래 백성을 위하는 일에 관계되므로 나는 지나치다고는 생각하지 아니한다. 다만 처음에 공법을 의논해 정할 때에 조세가 전의 수량보다 더한 것을 미리 요량하지 못하고 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비교해 보면 답험할 때에는 관리와 그 하인들을 시중들며 술과 고기로 접대하는 등 이름 없는 비용이 조세보다 갑절이나 더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산천이 험하고 막히어 평지와 언덕이 감돌고 굽이돌아서 다른 세법은 행할 수 없고 오직 공법만을 시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공법을 행하고자 한 것도 벌써 20여 년이 되었고, 대신들과 모의한 것도 무신년(세종 10년) 이후 12년이나 되었다.

공법을 2년 전에 이미 정했으나 혹시 백성들에게 불편이 있을까 염려한 까닭으로 전라와 경상 두 도에서만 행하여 그 편의의 여부를 시험하게 했다. 이제 겨우 시험한지 1년 밖에 안 되어 그 이해를 판단하지 못하겠는데, 너의 말이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순행하여 교화를 펴는 직책으로 한 도를 다스리면서도 오히려 이처럼 말하는데, 하물며 저 시골의 무지한 백성이겠는가!

너의 말한 바가 비록 옳을 지라도 실로 대체에 어긋나니 너는 그리 알지어다.”

세종은 공법의 타당성과 편의성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이선의 상소를 물리쳤다. 다른 일 같으면 의정부나 육조에서 논의하게 했을 것인데, 귀찮은 일이 일어날까 염려하여 그렇지 아니했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황희는 한걸음에 편전에 들어 아뢰었다.

“경상도 관찰사 이선이 주청한 상소는 틀린 말이 아니옵니다.

공법의 세율을 낮추어 백성들을 넉넉하게 하시옵소서.”

이럴 줄 알아 바로 이선에게 전지한 것이다.

세종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영상!

과인이 백성들에게 많이 거두려 한다고 생각하오. 경이 그리 생각했다면 섭섭하오. 이선에게 전교한 것이 나의 뜻이오.

더 이상 논하지 마시오.” 

편전을 나온 황희도 안색이 좋지 못했다. 

‘전하께서 저리 공법에 매달리시니……’

며칠 후 황희가 도승지 김돈에게 말했다.

“내가 옛날에 하혈병이 있었는데 근래에 다시 일어나고, 귀와 눈의 어두움이 날마다 더 심해져 임무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글을 올려 사직하고자 한다. 그러나 지난날 여러 번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모두 윤허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성상이 두려워 감히 다시 아뢰지 못했다.

자네가 대신 내가 지은 이 시(詩)를 전하께 올려 잘 아뢰어 주게.”

김돈은 급히 편전에 들어 황희가 준 시를 임금께 올렸다.

내가 진실로 나라에 털끝만한 도움이 없음은 행인도 아는 바인데, 근래에 노병이 더욱 심하고 몸이 구부러져서 조회에 참석하려 걸으면 넘어지며, 귀가 어둡고 잊음이 많아 정신이 혼미합니다. 

한산직에 버려둠이 분수에 마땅하건마는, 다만 상달할 길이 없어 부끄러운 얼굴로 따라 다니다가, 감히 속된 글로써 상감께 우러러 올리오니, 한 번 보시고 웃으시기를 바랍니다.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나이에, 벼슬에 머물면서 일없이 도당에서 밥을 먹으니 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얼굴입니까? 

향로를 놓아 두는 탁자에 임 모시고,나의 노병 아뢰어 백발 늙은이 고향 산천을 대하게 하시옵소서."

황희는 전하께서 자신의 사직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시니 시로서 마음을 전한 것이다.

세종은 한참 말이 없다가 김돈에게 물었다.

“영상이 과연 정신이 흐리고 눈이 어두운가?

너의 보는 바는 어떠하냐?

모름지기 치사(致仕)해야 마땅하겠느냐?

무슨 서운함이 있어서 그러한 것인가?

상세히 알아 명일에 다시 아뢰어라.”

세종으로서도 난감한 일이다. 늙은 황희가 여러 번 사직을 청했지만, 그 때마다 야멸차게 물리쳤다. 그러나 몸에 병이 있다고 하니 더 이상 붙잡는 게 미안했다. 하지만 황희를 떠나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황희가 조정에 있으니 국사가 물 흐르듯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황희가 없는 정치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공법만 빼고는……’

세종은 어찌 할 바를 몰라 답을 못했다. 

다음날 김돈이 아뢰었다. 

“신의 소견으로는 귀가 어두운 것은 사실이오나 정신은 혼미한 데 이르지는 아니했사옵니다. 

도덕과 지량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바이오니, 비록 늙고 병들어 허리가 굽었을지라도 치사함은 마땅하지 아니하옵니다. 집에 누워서 대사를 처결하게 함이 또한 옳겠사옵니다.” 

김돈은 세종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하가 황희를 얼마나 믿고 의지하고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리 아뢴 것이다. 물론 정말 황희와 같은 인물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오기수 김포대 교수
오기수 김포대 교수

세종은 그제서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도다.

영상을 즉시 직무에 복귀하게 하라.

다만 황희의 거동이 불편하다 하니 당분간 상참에 참석하지 말도록 하라.”

어떻게든 황희를 붙들고 싶었다.

이날 세종은 오랜만에 인사를 단행했다. 허조를 좌의정에, 신개를 우의정에, 이맹균을 좌찬성에, 성억을 우찬성에, 하연을 좌참찬 겸 판이조사에 제수했다. 작년에 맹사성이 죽은 이후 공석인 좌의정을 임명한 것이다.

이번 인사에서 단연 돋보인 자는 우의정 신개이다. 사실상 서열로 보면 안순이나 이맹균이 우의정에 오르는 것이 합당하다. 안순은 신개가 의정부 참찬(정2품)일 때 찬성(종1품)으로 있었으며, 이맹균이 참찬일 때 신개는 대사헌(종2품)이었다. 두 사람은 신개보다 나이도 3살이나 많으며 얼마 전까지 신개보다 윗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역전이 되어 신개가 상급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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