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은 갚아야 하는 것이지만 존엄한 삶을 포기해 가며 노예와 같은 처지에 내몰릴 때까지 갚으라고 강요해서는 안돼

27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주빌리은행 출범식이 열린 가운데 공동 은행장인 이재명 성남시장과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가운데) 등이 채권을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주빌리은행은 금융기관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해 악성채무자·장기연체자로 전락한 서민들을 구제해주는 은행이다. 2015.08.27.[사진제공=뉴시스]

27일, 서울시민청에서 주빌리은행이 출범했다. 주빌리은행은 돈을 버는 은행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은행이다. 주빌리은행은 암암리에 사고 팔리는 장기 연체자들의 부실채권을 사들여 서민들의 부채를 탕감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주빌리란 일정 기간마다 빚을 탕감해 주던 성경 속 '희년'을 뜻하는 말인 롤링주빌리(Rolling Jubilee)의 약칭으로 저신용자들의 부실채권을 헐값에 사서 탕감해 주는 운동이다.

돈을 빌려 쓰라고 꼬드기던 금융회사들이 그 빚을 감당하지 못하는 연체자들에게 언제 그랬냐는 듯 가혹해진다. 그리고 부실자산을 떨어버리기 위해 연체된 채권을 대부업체에 헐값에 판다. 한번 쥐어짜고 난 부실채권들은 또 다시 팔리기를 거듭하면서 연체자들은 비인간적인 추심에 시달리고,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주빌리은행의 출범 단초는 지난 2012년 미국에서 '오큐파이 월스트리트(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이 한창이었는데 그 일환으로 당시 155억 원어치의 부실 채권을 매입해 탕감해 준 데 이어, 지난해엔 대학생 학자금 채권 40억 원어치를 소각한 것을 본받아 우리나라에서도 사단법인 희망살림이 이어받아 지난해 4월 처음으로 117명의 빚, 4억 6700만원어치를 소각해 화제가 되면서였다.

여기에 성남시가 적극 호응하고 지역 시민사회단체와 종교계, 기업계까지 모금 운동에 동참하며 그사이 성남시에서만 3700여 만 원을 모아 486명의 빚 33억 원어치를 탕감했다. 이어 지난 7월에는 성남시기독교연합회에 속한 교회 30여 곳에서 모은 헌금 1억여 원을 기부했다. 이를 기념하려고 성남이 연고지인 프로축구팀 '성남FC'는 '롤링주빌리'를 새긴 유니폼을 입고 뛰고 있다. 이 기부금이 바로 비영리단체인 '주빌리은행'을 만드는 밑거름이다.

주빌리은행은 지금까지와 달리 빚을 100% 탕감해 주던 방식에서 벗어나, 채무자에게 채권 원금의 7%까지 형편껏 갚도록 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주빌리은행에서 원금 3~5% 정도에 매입한 장기연체 부실채권을 가난한 채무자에게 7% 정도 형편껏 갚게 함으로써 그동안 빚을 모두 탕감해 주면서 '도덕적 해이'란 비판에서 자유스러워짐과 동시에 차액으로는 더 어려운 이들의 더 많은 부실채권을 매입하는 데 쓸 계획이다. 채무자 형편이 되는대로 일부라도 기한 없이 갚게 하되, 사정이 정 안 좋으면 모두 탕감해 주기로 한 것이다.

실제 금융사 대출 채권 소멸시효는 5년이지만 채권 시장에서 7~10년이 지난 장기 연체 부실 채권도 활발히 거래된다. 대출자가 5년 이상 원리금을 연체하면 빚을 갚지 않아도 되지만 은행은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을 대부업체에 매각하고, 대부업체는 온갖 편법을 동원해 소멸시효를 연장해 왔다. 소멸시효를 넘겨 7~10년 넘게 장기 연체한 부실 채권은 수차례 손바꿈하며 원금의 1~3% 수준까지 떨어진다. 하지만 채권자는 여전히 채무자에겐 원금 100%에 가까운 상환을 요구한다.

2013년 8월 말 현재 국내 채무불이행자는 350만 명 정도이고 채무 상환이 사실상 불가능한 장기채무자도 114만 명에 이른다(한국금융연구원). 서울연구원과 에듀머니가 지난해 3월 부채 보유자 903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10명 중 4명이 채권 추심을 경험했고, 이들 가운데 4명 중 3명 꼴로 정신적 고통, 생명의 위협, 가족·직장생활 곤란 등 피해를 호소하고 있었다. 때문에 빚 탕감 프로젝트가 확산되면서 채권자 중심이었던 부실채권 매각제도를 채무자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주빌리은행은 은행법에 근거해 설립된 은행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은행의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 묻는 사회운동이기도 하다. 채권 추심 행위가 사회적 정당성을 넘어 채무자의 인간다운 삶을 침해하거나 권리 남용에 해당하는 경우 규제할 필요성이 있고 채무자 소득이 중단되면 일시적으로 채권 추심을 중단하는 등 채무자 보호 방안이 필요하다. 아울러 부실채권이 어떻게 거래되는지 채무자가 알 수 있도록 매각 이력관리 제도 도입도 필히 요구된다.

주빌리은행이 시민들의 모금을 통해 오래 연체된 채권들을 매입해 특정 채무자만을 구제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만이 아닌 궁극적으로는 제도적 안전망 마련과 구멍 난 틈에서 벌어지는 금융의 약탈적인 행태를 함께 지적하고 개선하고 틈을 메우는 것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정부는 그동안 부실기업을 구조하기 위해 천문학적 혈세를 투입해 왔고 그 중 50조원 정도를 회수하지 못했다. 하지만 개인 채무에 대해서는 도덕적 해이 운운하며 손 놓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만약 정부가 기업회생을 위해 날린 돈의 10%인 5조원만 회생 불가능한 빈민들의 부채탕감을 위해 쓴다면 총 50조원 이상의 채권을 소각 할 수 있고 그들이 다시 삶의 노동현장에 복귀할 수가 있다. 그야말로 그들에게 죽음과 같았던 빚이 생명의 빛으로 환생하는 것이다.

빚은 갚아야 하는 것이지만 존엄한 삶을 포기해 가며 노예와 같은 처지에 내몰릴 때까지 갚으라고 강요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주빌리은행의 대한민국이 빚 대문에 사람이 죽어야 하는 비정하고 가혹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일에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동참을 부탁드린다.

 

김상환(전 인천타임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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