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뉴시스]

화제의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서 조지 레이코프는 “보수진영의 실패와 거짓말을 공격하는 것만으로 유권자들이 진보진영에 투표해 줄 것이라는 환상은 버려야 한다.”고 일침을 가한다. 코끼리는 보수정당인 미국 공화당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보수진영이 만든 프레임을 공격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 틀 안에 갇히게 되므로, 아예 진보진영 주도의 새 프레임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레이코프의 말처럼 선거는 프레임의 전쟁이다. 2012년 19대 총선은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지지도가 10% 초반까지 급락한 가운데 치러지는 그야말로 여당에겐 최악의 조건이었다. 오세훈 전 시장의 무상급식 주민투표 불발로 2011년 상․하반기 재․보궐선거를 모두 패배한 한나라당은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체제를 출범시킨다. 민주당은 ‘정권심판론’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비판과 공격에만 몰두했다. 이른바 ‘이명박근혜 정권심판론’이다. 그러나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2008년 총선에서 자파인 친박계 의원들의 대거 공천 탈락으로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2010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한 세종시특별법 수정안에 대하여 공개적인 반대를 하고 나섰으며 지방선거 직후 개최된 국회 본회의에서 직접 반대토론까지 했던 당사자이다. 사실상 여당 속 야당 인사로 활동해온 그를 이명박 대통령과 동급으로 취급한 건 민주당의 명백한 전략적 오류였다. 게다가 박근혜 위원장은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당 색깔도 진보정당의 전유물인 빨강색으로 바꾸는 등 파격을 단행했다. 기존 상식을 벗어난 프레임 전쟁에서부터 이미 앞선 새누리당은 개표 결과 후보단일화로 사력을 다한 야당연합에 12석을 앞서며 과반수를 달성한다.

새정치연합 혁신위원회 활동이 23일 11차 혁신안 발표를 끝으로 종료됐다. 꼭 3개월 전 발표된 1차 혁신안은 선출직공직자평가위원회 구성을 골자로 하는 안이었다. 이는 평가위원회라는 공식시스템을 통해 의정활동과 지역구활동이 미비한 하위 20% 현역의원의 공천을 원천 배제하겠다는 내용이다. 23일 공개된 마지막 혁신안은 문재인, 안철수 두 유력 대선 후보의 부산지역 출마를 권유함과 동시에 정세균, 이해찬 전 당대표 등의 사지(死地) 출마 또는 사실상 용퇴를 요구하는 것이 핵심이다. 더불어 그동안 부패비리 척결을 요구해온 안철수 전 대표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여 하급심 판결 확정의 경우, 공천에서 원천 배제하는 조항을 추가했다. 이로써 일련의 혁신안은 공천 제도에서부터 시작하여 공천 후보 배치에 관한 전략까지로 마무리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공천제도이건 사지출마론 같은 선거 전략이건 이미 오래 전부터 대부분 사용돼온 낡은 프레임이라는데 있다. 특히 그것이 새누리당이 먼저 개발, 시행하고 있는 진부한 것이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전혀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혁신위원회는 야심차게 선출직공직자평가위원회 도입과 현역 20% 물갈이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19대 총선 때 이미 이 제도를 훨씬 강력하게 먼저 도입, 시행했다. 당시 박근혜 비대위원장 주도로 ‘시스템 공천’을 제안하였고 공천 심사를 통해 현역의원 25% 물갈이를 단행했다. 여당 강세지역 서울 강남은 유일호 의원을 제외하고 전원이 교체됐다. 부산에서도 측근으로 분류되는 김무성, 허태열 의원 등을 줄줄이 낙천시켰다.

부패비리 연루자 하급심 판결 확정 시 공천배제 원칙은 더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새누리당은 이미 2007년부터 더욱 강력한 윤리위원회 당규를 시행하고 있다. 여당의 경우, ‘파렴치한 행위 및 부정부패와 관련한 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당원은 기소와 동시에 당원권을 정지’시키고 있다. 따라서 현재 1심 판결 확정 전인 이완구 전 총리는 억울하지만 아예 공천신청 자체를 할 수도 없다. 야당에서도 2008년 총선을 앞두고 박재승 공천심사위원장이 부패비리 전력자 공천을 배제한 것은 바로 이 새누리당의 당규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었다.

 

<중진용퇴 요구가 정당한가?>

사지(死地) 출마론 또는 중진용퇴론, 그리고 지역구 이동 출마론은 명분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은 이름만 달리하는 강제 정계은퇴 요구 또는 반대자 죽이기에 다름 아니다. 박정희 장군은 5.16 군사정변 이후 무소불위의 최고회의에서 정치정화법을 제정하여 구 정치인 269명을 정치 피규제자로 묶는다. 4.19 혁명에 가담한 재야인사와 야당 정치인 등 정적들의 입을 봉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장군도 국보위에서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야당인사 등을 포함한 567명을 강제로 정치권에서 내몰았다. 이처럼 아주 오래 전에는 군부가 나서서 철권으로 반대파를 제거했다면 이제는 여론몰이를 통한 세련된 방식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정당한 경쟁이나 규칙도 없는 일방적인 점령군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정동영의 강남(을) 출마, 손학규의 수원(병) 출마 등과 같은 대표적인 사지 출마는 대표적으로 정적 죽이기의 악의가 담겨 있다. 이동 출마한 정세균, 이해찬은 다행히 당선은 되었지만 결코 옳은 전략이 아니다. 정당이 가치와 노선, 그리고 정책을 갖고 승부해야 하지 한 두 명 인물을 앞세워서 선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 경우에도 정세균 전 대표를 비롯한 당의 지도자들을 토끼몰이 하듯이 공개적으로 사실상 몰아내는 것은 정치 도의가 아니다. 종로구는 13대 소선거구제 부활 이후 정세균 전 대표가 총선에서 처음으로 당선되었다. 그의 명예를 존중한다면 은퇴도 명예롭게 할 수 있도록 더 좋은 대안을 먼저 내놓고 양보를 부탁해야 한다. 당 지도부조차 당원들의 위임을 받은 한낱 대의기관일진대 혁신위원회가 더 더욱 점령군은 아니지 않은가?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OECD 국가 어디에도 인위적 물갈이를 실시하는 나라는 없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정치 상황에 따라 진퇴를 스스로 고민한다. 일례로 미국 케네디 가의 정치활동 무대는 매사추세츠주이다. 암살된 비운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정치적 성장은 매사추세츠주에서였다. 1947년 매사추세츠주 제11지구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953년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의 바로 밑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도 매사추세츠주가 선거구였다. 2009년 타계한 막내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 역시 1962년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당선으로 공석이 된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보궐선거에 나와 30세에 당선되면서 정치권에 발을 내디뎠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무려 47년간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상원의 사자(Lion of the Senate)’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1964년 민권법, 1965년 투표법, 1990년 장애인법 등 굵직굵직한 법안이 통과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80년대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故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명운동을 비롯하여 미국 망명생활과 귀국에 큰 도움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2008년에는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오바마 후보를 지지해 최초의 흑인 대통령 탄생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케네디 가의 예에서 보듯이 60년이 넘도록 한 지역구에서만 정치활동을 해도 그 누가 비난을 하지 않으며 지역구를 공화당 강세지역인 플로리다주로 옮기라고 강제하지도 않는다.

사지 출마론 또는 지역구 이동 출마론이 야당의 총선 승리론인지 혹은 지역주의 극복론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혁신위원회가 한때 비례대표 확대를 골자로 하는 정치개혁 방안을 내놓았다가 여론에 떠밀려 후퇴한 것은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비례대표 확대는 다원화된 사회의 이해와 요구를 그대로 현실정치에 반영하기 위한 매우 좋은 수단이다. 4당 체제였던 13대 국회가 민주주의를 가장 잘 꽃 피웠다는 점을 상기해보라. 전혀 손대지 않기로 한 지금의 선거제도로는 20대 국회에서도 양당 구도는 필연적이다. 양당 독과점이 허물어지지 않는데 야당이 승리한들 국민의 팍팍한 삶이 얼마나 나아지겠는가? 그러므로 국민에게 새정치 혁신안은 야당의 승리 지상주의가 낳은 정치공학으로 비쳐지기 십상일 뿐이다.

 

최 광 웅

참여정부 인사제도비서관
민주당 조직사무부총장
현 데이터정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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