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대전충남녹색연합 제공)

4대강 개발 결과는 후대에게 심각한 국가적 난제를 남겨놓았다. 매년 3조씩 투입해도 낙동강, 영산강, 금강은 심각한 녹조라떼로 죽어가고 있으며, 가뭄을 해갈하겠다고 건설한 보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6일에는 국립환경과학원의 '수돗물 중 미규제 미량유해물질 관리방안 연구Ⅲ'를 분석한 결과, 4대강 이후 수돗물에서 발암위해도가 100만 명 당 1명 기준을 초과한 물질이 3종 발견된 것으로 나타났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설악산 케이블카 승인을 두고 시민사회단체들이 “산으로 간 4대강 사업”이라고 반대하고 나섰다. 설악산 케이블카를 계기로 모든 명산들에 케이블카가 설치 될 염려가 커지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 행위들은 국가 정책과 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정책이란 무엇인가? 정책의 정치화는 어떤 결과를 낳고 있나? 정책 속에는 어떤 권력 기제들이 작동하는가? 등과 같은 문제들은 정치사회 뿐 만 아니라 국민의 일상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4대강을 통해 이러한 문제들을 관조해 볼 필요가 있다. 실상, 4대강은 우리사회의 정치 및 정책 행위의 실질적 수준을 잘 보여준다.

근대 프로메테우스로서의 운하

운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다. 운하의 건설은 인간 개인의 삶의 영역뿐만 아니라 국가 더 나아가 국제 차원의 커뮤니케이션 관계를 구축하는 네트워크의 건설을 의미한다. 운하에는 사회·정치·문화 그리고 개인의 삶의 영역들이 반영된 역사적 흔적들이 각인되어 있다. 따라서 운하의 건설은 사회·철학 및 역사적 배경들이 고려되고 인식론적 사유를 통해 정책적 과제로 추진되었다.

18세기 계몽주의와 산업 혁명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던 시기에 운하는 철도와 더불어 지리 정치(geographical politics)의 수직적 체계를 수평적 체계로 전환하는 커뮤니케이션 망이었다. 즉운하는 중앙과 주변, 대도시와 지방, 도심과 변두리 같은 전통적 수직 체계를 가로지르는 수로를 따라 수평적인 연립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기제였던 것이다.

생시몽(Saint-Simon C.-A)은 “유럽 사회의 재조직에 대하여(1814)”에서 유럽ᐨ지중해 프로젝트를 제시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유럽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확충하고, 상업 및 교환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지중해 시스템을 만드는 비전이 제시되었다. 생시몽 주의자들이 1869년 수에즈 운하 건설을 주도한 것은 바로 유럽과 아시아의 시·공간 뿐 아니라 문화적 지형의 재조직 화를 위한 네트워크 건설의 일환이었다.

한편, 국내적으로 운하는 도시에 용수를 공급하고, 지역 간의 물물교환과 인적교류, 여가와 문화 공간으로서 개인의 삶을 확장시키는데 기여해왔다. 따라서 운하는 근대 프로메테우스로서 사회의 재조직화와 자본주의 발전, 그리고 도시 형성에 기여하면서 근대 시민성, 시민적 생활 영역에 깊숙이 들어가서 소비사회의 생활공간으로, 또한 인간관계 매개의 장으로 기능하며 발전해왔다.

운하, 상징의 정치 기제

공동체적 삶을 이루는 교환과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네트워크적 성격으로 인해 운하는 물리적 거버넌스 체계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행위의 장치로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기술 및 지리적 네트워크들은 단순한 물리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국토와 사회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정치적 상징이 되었다. 즉 운하는 사회의 변혁이나 발전을 상징하고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미지를 생산하는 상징체로 기능하는 것이다.

오늘날 센느강은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적 정체성을, 템즈강은 영국의 번영, 라인강은 전후 독일의 기적을 상징한다. 이처럼 운하 건설은 지역 혹은 국가 차원의 변화와 발전을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를 생산하면서 국민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운하의 상징적 정치 기능은 국민적 인식과 동의, 통합을 끌어내는데 기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정치적 상징체는 사회 내 다양한 이질적인 것, 대립적인 위치들을 균형 있고 조화롭게 통일시키는 힘으로 작동하면서 미래사회를 약속한다. 이 과정에서 운하는 시민들에게 특정한 정치적 인식을 각인시킨다. 무엇보다 권력자의 정치적 치적을 상징화하면서 지배 권력을 안정화하고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 예를 들어 1800년대 나폴레옹은 파리 지역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운하를 건설하면서 그의 위대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결론적으로 운하는 통치자들의 재임 기간 동안 국가 발전과 근대화의 치적을 상징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4대강, 잘못 잉태된 프로메테우스의 비극

권력의 현현화(incarnation)와 미래사회에 대한 약속의 상징체인 운하는 철도의 발전과 더불어 18세기 근대 시민사회와 국가 형성의 중요한 인프라였다. 생시몽을 비롯한 계몽주의 시대 엔지니어들은 유럽 사회에서 도시 간에 그리고 국가 간에 유기체적 활력을 주는 기술적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운하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의 발전, 더 빠르고, 더 효율적인 이동수단의 발전으로 운하는 더 이상 프로메테우스적 지위를 지킬 수 없었다. 그런데 근대 프로메테우스적 프로젝트였던 운하가 3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중요한 정치, 사회적 화두가 된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22조 2000억 원이 소요된 4대강유역종합개발과 2조6000억 원이 소요된 아라뱃길로 대표되는 운하 개발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토목공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대 강으로 대표되는 이 난 개발은 인류의 삶과 함께 진화해 온 운하의 실체에 대한 깊은 고민, 무엇보다 운하가 가지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로서 본질과 역할에 관한 재고를 찾아볼 수 가 없다. 또한 도시 및 사회 발전에 따른 운하의 실체에 대한 정책적 진단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경제만능주의적 토목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결국 국민의 공감을 얻기 위해 ‘4대강 살리기’라는 상징적 조작까지하면서 추진했던 4대강사업은 오히려 자연을 상대로 한 야만적 개발의 상징이 돼 버린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국민의 반대에도 그토록 4대강에 집착했던 이유 중 하나는 경제만능주의와 더불어 바로 자신의 치적을 영구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상징물로서 대운하를 건설하고자 하는 시도였음을 볼 수 있다. 이명박 정부는 해양문화와 육지문화의 결합, 노마디즘적 떠남의 삶, 물이 주는 풍요로움, 경제발전이라는 유토피아적 이상사회로의 진화를 표현하는 거대한 상징체로서 4대강을 개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4대강은 유토피아를 추구하다 폐망한 디스토피아(distopia)의 상징체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운하는 수평적 거버넌스와 지정학적 공간 조직 주체로서의 운하, 시민적 삶의 여정이 동반하는 운하, 정치적 행위 장치로서 운하, 그리고 기술과 유기체의 결합체로서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되는 사회적 네트워크로서의 운하에 대한 사유와 해석을 담지하지 못하고 개발된 것이 4대강 비극의 출발점인 것이다. 4대강은 사유화된 정치와 권력의 논리에 포섭된 국가 정책이 어느 정도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만큼이나 국가와 국민에게 고통을 남겨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이 땅에 잘못 잉태된 프로메테우스, 4대강의 비극이 갈수록 더해질까 걱정이다.

박태순
파리1대학 정치학 박사
성균관대학 초빙교수
미디어로드 연구소장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 스트레이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키워드

Tags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