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원의 아침편지, 출발은 11세 소녀에게 보낸 연애편지
글은 휴식이자 정신의 자양분, 연애편지 대필로 용돈 벌어
목사 꿈꿨으나, 유신시대 긴급조치 9호로 제적
무너질 수 없었던 젊은 시절, 빨간 도장과 유산의 아픔
활자냄새 따라 ‘뿌리깊은 나무’로, 중앙일보와 동교동으로

[스트레이트뉴스=김태현 선임기자] “6학년 때 목사 아버님 따라 새 교회에 갔는데, 아름다운 소녀가 있는 겁니다. 너무 아름다워. 저보다 두 살 어렸어요. 편지를 썼죠. 주일날 몰래 건네주다가 아버님한테 걸려서 혼나기도 하고, 그렇게 6년 동안 편지를 전해주면서 짝사랑을 했답니다.”

꿈을 이룬 이후를 생각하게 하는 <꿈 너머 꿈>의 작가, 춤사위 아닌 ‘꿈사위’로 가득한 <꿈이 그대를 춤추게 하라>, 삶과 치유의 중심으로 안내하는 <혼이 담긴 시선으로>, 고독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절대고독> 등을 집필한 작가 고도원, 그의 영혼을 온통 뒤흔들어 글쟁이로 만든 사람은 긴 생머리에 단아한 보라색 스웨터를 걸친 11살 소녀였다.

“딱 마주쳤는데,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심장이 튀어나오더니 눈앞에서 펄떡이는, 그런 느낌(웃음), 그렇게 쓴 편지들이 ‘고도원의 아침편지’로 이어졌습니다.”

힐링(healing)이 필요한 시대, 스트레이트뉴스는 ‘힐링코리아 365’ 릴레이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농림축산식품부 이개호 장관과 세계 생화학 분야 석학 천병수 박사, 이찬열 국회 교육위원장, 김재현 산림청장, 한국문인협회 이광복 이사장 등으로부터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치유의 방향에 대해 들어왔다.

이번 달에는 창간7주년 특집으로 이시형 박사, 고도원 작가 등 한국 힐링을 대표하는 ‘힐링 구루’들과 한국힐링협회 이제학 회장을 만나 그들이 보낸 시간과 꿈, 그리고 영혼의 궤적을 함께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국내 최대 힐링명상센터 ‘깊은산속 옹달샘’의 주인장과 만나기로 한 곳은 충북 충주시 노은면 깊은 산속에 위치한 ‘옹달샘’이 아니라, 경북 영주시-예천군 백두대간에 둥지를 튼 세계 최대 산림치유 메카, 국립산림치유원이었다.

국립산림치유원 원장실에서 인터뷰를 준비하며 기자와 환담하는 힐링구루 고도원 작가(2019.06.17) ⓒ스트레이트뉴스
국립산림치유원 원장실에서 인터뷰를 준비하며 기자와 환담하는 힐링구루 고도원 작가(2019.06.17) ⓒ스트레이트뉴스

새벽 댓바람부터 기자정신 챙겨들고 달린 지 3시간 여, ‘문필봉’ 옆 ‘주치골’의 품안에 들어 ‘웃음 많은’ 고도원 작가를 만나는 순간, 기자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작가 느낌이 꿈틀거렸다.

고도원 : “오랜만입니다, 기자님. 지난 4월 힐링페어 이후로 처음이네요.”

김태현 : “선배기자님, 오늘 드릴 질문이 많습니다.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고도원 : “하하하, 좋습니다. 빡세게 한번 해 봅시다.”

풀꽃으로 소담스레 꾸며진 테이블, 허브차 내음과 함께 시작된 인터뷰는 힐링으로 넘실댔다.

 

휴식과 여유와 동전, 참 좋은 '연애의 계절'

-6학년 때 연애편지가 글과 맺은 첫 인연인가?

“글과 첫 인연을 맺은 건 5학년 때다. 백일장대회에 나가서 글을 썼다. 밤늦게까지 일하면서도 콧노래를 부르시는 어머니와 비에 대한 이야기였다. 슬픈 이야기였지만, 그걸 오히려 희극적으로 표현하면 더 큰 여운이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썼는데 덜컥 장원을 했다. 그래서 글을 잘 쓰는 꼬마가 돼 버렸고, 문예반에 들어가서 대장도 하고, 밑줄 그어가면서 책도 많이 읽고 그렇게...”

입구에서 올려다 본 국립산림치유원 내 건강증진지원센터(2019.06.17) ⓒ스트레이트뉴스
입구에서 올려다 본 국립산림치유원 내 건강증진지원센터(2019.06.17) ⓒ스트레이트뉴스

-원래부터 책을 좋아했나?

“좋아하기도 했지만, 아버님한테서 특훈도 받았다. 아버님은 늘 마음이 단단해야 하고, 그러려면 독서, 특히 어려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셨다. 함석헌 선생님이 쓰신 ‘뜻으로 본 한국역사’,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이런 책들을 밑줄 그어가면서 읽고 독서카드를 만들고 그랬다.”

-6학년 때 짝사랑 시작해서 6년이면, 혹시 중・고교 시절도 온통 ‘연애의 계절’ 아니었나?

“하하하. 본의 아니게 연애가 확장됐다. 지금 50, 60대 되는 분들은 ‘연애편지 대필’, 이거 이해하실 거다. 전주북중, 전주고를 다녔는데, 줄곧 문예반과 교지 편집장을 맡았고, 백일장 때 시도 많이 써 냈다. 자랑을 좀 하자면, 교지에 글 발표할 때마다 여중, 여고에서 팬레터 날아오고 화제가 되곤 했다. 그러다 보니까 친구들이 연애편지를 부탁하더라. 처음에는 공짜로 해줬다. 그런데 효과가 좋았다. 그거 맨입에 해 줄 수 있나. 돈 내라 그랬지.(웃음) 글 쓰는 게 저에게는 휴식이고 정신에 자양분이 돼서 좋고, 또 호주머니에 동전도 굴러다니고, 참 좋은 연애의 계절이었던 것 같다.”

 

유신의 추억과 'F'선상의 아리아

-연세대 신학과를 나와서 석사는 정치학으로 받았다. 목사나 정치인이 되고 싶었나?

“정치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목사가 되려고 했다. 어머니가 저를 가졌을 때 아들을 주시면 종으로 드리겠다는 ‘서원기도’를 하셨는데, 그 얘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어린 마음에 ‘내가 허락했냐’면서 막 화를 내고 반항도 하고 그랬다. 그런데 고2 때 기도 드리다가 ‘어머니 서원기도를 들어드리는 것이 내가 갈 방향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시골교회에서 두 살 어린 소녀를 짝사랑했다는 고도원 작가. 그는 “사춘기 이전의 사랑 체험은 참 소중하고 좋다”고 했다. ⓒ스트레이트뉴스
시골교회에서 두 살 어린 소녀를 짝사랑했다는 고도원 작가. 그는 “사춘기 이전의 사랑 체험은 참 소중하고 좋다”고 했다. ⓒ스트레이트뉴스

-결국 목사와는 다른 길로 가게 됐다. 무슨 일이 있었나?

“대학 들어가 보니까 ‘연세춘추’라는 학내 신문이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 유일한 한글 전용 신문이었는데, 거기서 기자도 하고 편집국장도 했다. 교수님들도 좀 특이한 놈이 들어왔다면서 기대를 많이 가져주셨다. 그런데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왔다. 70년대는 유신헌법과 민청학련 등 고난의 시대였다. ‘악의 꽃’이라고 있다. 보들레르의 시집이다. 그 내용을 빌어서 ‘십계명’이라는 제목으로 시대를 형상화했다. 헌법의 ‘ㅎ’자만 비판해도 당장 잡아가던 엄혹한 시절이었는데, 겁도 없이... 그러고 다니느라 3, 4학년 때 성적이 ‘F선상의 아리아’였다.(웃음) 생각해 보면 학생의 의분, 기자의 정의감, 아니면 대의에 몸을 던지는 느낌? 그런 것 아니었나 싶다. 그게 문제가 돼서 곧바로 긴급조치 9호로 적발돼 제적당했다. 운명이었다.”

 

빨간 도장과 아내의 유산(流産)에 타들어간 영혼

번민하던 시인 보들레르의 영혼은 ‘악의 꽃’으로 승화됐지만, ‘악의 시대’에 타오른 작가 고도원의 의분은 고통으로 내리쳐박혔다.

-긴급조치 9호라면 정치사범 아닌가. 힘이 많이 들었을 텐데.

“다행히 구속은 피했지만, 구치소에서 흠씬 두들겨 맞고 강제징집을 당했다. 강원도 산골짜기 부대로 배치 받아 갔는데, 가는 날부터 만기 제대할 때까지 거의 3년 동안 매일같이 집단폭행을 당했다. 요즘 같으면 블랙리스트에 오른 놈이 간 셈이니까. 사회적 폭력, 제도적 폭력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때만 해도 군대는 폭력의 장이었고, 저는 맹수 우리에 던져진 양처럼 ‘겨냥된 대상’이었다. 더블백 동기 하나 없이, 정말로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긴급조치 9호로 휴교령이 내려진 고려대 정문 앞(자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스트레이트뉴스
긴급조치 9호로 휴교령이 내려진 고려대 정문 앞(자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스트레이트뉴스

-그런 문제 등으로 군 의문사가 많았던 시절이다. 용케도 버텨냈다.

“실제로 무너진 친구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런 걸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아니, 나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절대로 무너져서는 안 되는 거였다.”

-긴급조치면 무조건 ‘빨간줄’ 아니었나? 제대 후 사회생활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맞다. 주홍글씨다. 호적등본이고 뭐고, 모든 공문서에 빨간 도장이 큼지막하게 찍혔다. 그게 있으면 취직은 언감생심, 이력서도 못 내던 시절이다. 뭐라도 해 볼 셈으로 연세대 부근에 포장마차를 차렸다가 하루 만에 거덜이 났다. 마음에 드는 곳에 그냥 자리 잡고 장사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 세계는 군대보다 더 무서운 조폭들 세계더라. 그 후로 한 10년 동안 확실한 직업 없이 지냈다.”

-사기도 당했다고 들었다.

“누군가가 재고 걱정 없고 마진도 괜찮은 ‘땅 짚고 헤엄치는 장사’가 있다고 했다. 문방구였다. 대원고등학교 학생들 첫 등교하는 날부터 괜찮을 거라고. 솔깃해서 집사람과 함께 모은 돈에 친구 돈 좀 빌리고 해서 학교 앞 길목 좋은 곳에 있는 새집을 계약했다. 그런데 입주하려는데 계약자가 어디로 사라지고 없었다. 사기였다. 분노와 절망감 때문에 새까맣게, 꼬챙이처럼 타들어갔다. 그때 죽으려고 했다. 매일 부부싸움 하고, 어후...”

작가 고도원이 스트레이트뉴스 독자들에게 보내는 ‘고도원의 아픔편지’. 그가 그린 ‘꿈’과 ‘꿈 너머 꿈’의 속살에는 긴급조치 9호로 인한 제적과 빨간 도장, 군 폭력, 조직폭력배의 구타, 사기 등이 깊은 생채기로 담겨 있었다.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작가 고도원이 스트레이트뉴스 독자들에게 보내는 ‘고도원의 아픔편지’. 그가 그린 ‘꿈’과 ‘꿈 너머 꿈’의 속살에는 긴급조치 9호로 인한 제적과 빨간 도장, 군 폭력, 조직폭력배의 구타, 사기 등이 깊은 생채기로 담겨 있었다.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빨간 도장 때문에 취직은 꿈도 못 꾸고, 그래서 장사를 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그것마저. 그래도 무너지지 않았다. 살아야 하니까. 6개월 만에 마음 추스르고 할 일을 찾다가 아내 친구가 명동에서 하는 웨딩가게를 간 적이 있다. 일에 비해서 마진이 정말 좋다고 했다. 제가 그림을 그리고 손재주가 조금 있는데, 장사하는 거 보니까 ‘할 수 있겠다’ 싶더라. 마침 이화여대 입구 아현동 고개에 작은 가게가 하나 나와서 있는 것 닥닥 긁어모으고 빚도 내고 해서 ‘행복의 문’이라는 웨딩드레스 가게를 열었다. 방은 그 동네 제일 높은 꼭대기에 월세 싼 방 하나 얻어놓고.”

-더 이상 사기는 당하지 않았을 테고, 장사는 어땠나?

“또 당하면 안 되지(웃음). 그런대로 잘 됐다. 그때 제 나이대가 동기들, 선후배들 모두 결혼할 나이대였으니까. 여기저기 소개들도 많이 해줬다. 그런데 거기서도 많이 아팠다. 신부 드레스 대여해 주려면 일일이 세탁해서 다려야 하고, 시간 맞춰 예식장으로 들고 뛰어야 하고 정말 바쁜데, 아내가 추운 겨울에 그걸 갖고 경사진 빙판길을 종종걸음으로 내려오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유산을 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두 번째는 거의 실성할 지경이었다. 우리 부부, 서로 위로하지 않고 또 싸워댔다. 글쓰기도 잊고, 돈 버는 재미, 핀발이(가봉) 재미에 갇혔던 시간들이다.”

 

'운명 너머 운명', 활자냄새에 이끌린 글쟁이

글쟁이 고도원은 강연을 다닐 때마다 청중에게 묻는다. “꿈이 무엇입니까?” 무엇인가가 되고 싶다는 답이 돌아오면, 다시 묻는다. “그거 돼서 뭐 하시게요?” ‘꿈 너머 꿈’, 즉 꿈을 이룬 후의 꿈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악의 시대’가 선물한 운명 앞에서, 그는 운명 너머에 있는 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국내 최대 힐링명상센터 ‘깊은산속 옹달샘’의 주인장이자 국립산림치유원장으로서 자신의 ‘꿈 너머 꿈’을 만들어가는 고도원 작가(2019.06.17) ⓒ스트레이트뉴스
국내 최대 힐링명상센터 ‘깊은산속 옹달샘’의 주인장이자 국립산림치유원장으로서 자신의 ‘꿈 너머 꿈’을 만들어가는 고도원 작가(2019.06.17) ⓒ스트레이트뉴스

-글을 다시 쓰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생활인 고도원 안에 갇혀 있던 글에 대한 갈망, 그것이었다. 어느 날, 동아일보 사진기자 하던 연세춘추 선배가 ”여기 갇혀 있으면 큰일난다“고 하더라. 그 말에 갑자기 활자냄새가 났다. 활자 있는 곳에서 일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그분이 공채를 한다고 응모해 보라고 해서 응모했다. 빨간 도장인데도 됐다. 그곳, 유일하게 저를 받아준 사람이 월간 ‘뿌리깊은 나무’의 한창기 사장님이셨다.”

아픔으로 지난날을 더듬던 그의 눈에서 활자냄새가 배어나왔다. 새벽잠 많은 고도원이 출근시간보다 30분 먼저 나가서 제일 늦게 퇴근했고, 기사를 가장 많이 쓴 시기라면서 5년 동안 정말 행복하게 일했다고 했다. 그러다 금세 표정이 어두워졌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직후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뿌리깊은 나무가 강제 폐간됐다. 또 나락이었다.”

-5년의 노력이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참 고마운 일이 있었다. 뿌리깊은 나무 독자 중에 저를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중앙일보 최우석 부장이었다. 그분이 ‘고도원이라는 기자가 요즘 오갈 데 없이 놀고 있다는데 불러다가 신문기자 한번 시켜보면 좋겠다’고 추천해서 특별 케이스로 입사할 수 있었다. 사회부 3년 반 하고, 바로 정치부로 들어갔다. 시대가 어떤 땐가. 군부독재다, 김대중이다, 이러면서 정말로 엄중할 때 아니었나. 그런데도 분통 터뜨리던 학생 때처럼 신문 찢고 편집국장 책상 엎어버리고 그러면서 정말 재밌게, 또 열심히 했다. 돌이켜보면, 이런저런 시련들이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대통령 연설비서관까지 지냈다. 글쟁이로서는 상당한 영예일 것 같다. 어떤 인연이 있었나?

“중앙일보에서 평민당 출입기자로 보내더라. 95년에 조간으로 바뀌었지만, 당시 중앙일보는 석간이어서 새벽 4~5시부터 움직였다. 가는 장소는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이었다. 새벽에 가서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때 새벽 이슬 맞던 동반자 중 한 사람은 지금 총리하시는 동아일보 이낙연 기자였다. 문이 열리고 총재 나오실 때까지 거실에서 또 기다렸는데, 그 사이 맞아주신 분이 이희호 여사님이었다.”

▲ 다음 기사에는 ‘글쟁이’ 고도원이 본 이희호 여사, 대통령 연설비서관 시절의 기억, 고도원의 '꿈 너머 꿈', 그리고 작가가 스트레이트뉴스 창간7주년에 보내는 축하영상이 담깁니다.

고도원 작가가 걸어온 ‘꿈’의 여정(왼쪽부터 월간 ‘뿌리깊은 나무’ 창간호, 중앙일보 창간호, 김대중・이휘호 부부, 동아일보 기자를 지낸 이낙연 국무총리의 새천년민주당 대변인 시절)(자료:한국학중앙연구원/김대중평화센터/중앙일보)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고도원 작가가 걸어온 ‘꿈’의 여정(왼쪽부터 월간 ‘뿌리깊은 나무’ 창간호, 중앙일보 창간호, 김대중・이희호 부부, 동아일보 기자를 지낸 이낙연 국무총리의 새천년민주당 대변인 시절)(자료:한국학중앙연구원/김대중평화센터/중앙일보)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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