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거듭된 일본 무대응에 지소미아 ‘유지’에서 ‘종료’로 급선회
격앙된 반응 보인 일본, 미일 군사협력 강화 전망
한미일 안보체제 균열, 역내 영향력 축소 우려에 실망한 미국
지소미아 종료, 일본을 대화로 끌어내려는 우리 정부의 지렛대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일본 고노다로(河野太郞) 외무상이 베트남 하노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하고 있다(자료:Reuters/Kham)(2018.09.13)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일본 고노다로(河野太郞) 외무상이 베트남 하노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하고 있다(자료:Reuters/Kham)(2018.09.13)

[스트레이트뉴스=김태현 선임기자] 지난달 말까지만 해도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 ‘유지’로 가닥을 잡았던 우리 정부가 결국 ‘전격 파기’라는 강수를 둠에 따라, 한일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지난 2일 일본이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 제외한 후에도 우리 정부는 ‘지소미아는 유지하되 정보를 교류하지 않는 방안’을 검토한 바 있다. 정치권에서는 “어두운 밤에 가장 두려운 것은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이낙연 총리)”, “칼은 칼집에 있을 때 위력을 발휘한다(박지원 의원)”는 격언들이 회자됐다.

그러나 일본이 우리 정부의 거듭된 대화 제안과 두 차례 특사 파견, 문재인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보인 유화적인 신호, 미국의 ‘스탠드 스틸(standstill, 현상 유지 협상)’ 권고 등을 모두 거부하자 청와대 내 기류가 바뀌었고, 21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담까지 성과 없이 끝나자 결국 ‘지소미아 전격 종료’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한일관계의 신뢰 상실과 안보상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경제보복 정책을 취했다. 일본이 과거사 문제를 안보 문제로 전위시킨 상황에서, 지소미아의 효용성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명분도, 실리도, 국민의 자존감도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실리적 측면을 함께 검토했다.”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

한국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 종료 결정에 항의하며 담화문을 발표하는 일본 고노다로(河野太郞) 외무상(자료:Kyodo통신)(2019.08.22)
한국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 종료 결정에 항의하며 담화문을 발표하는 일본 고노다로(河野太郞) 외무상(자료:Kyodo통신)(2019.08.22)

일본, 격앙된 반응 속 미일협력 강화 전망

22일 오전만 해도 스가 요시히데(菅 義偉) 관방장관과 이와야 다케시(岩屋毅) 방위상이 기자회견을 열어 지소미아 연장을 강력 희망하는 등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지소미아 종료를 택하지 않기를 기대했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 단호하게 항의한다.”

일본 고노다로(河野太郞) 외무상의 반응이다. 고노다로 외무상은 22일 밤 9시가 넘은 시각, 남관표 주일대사를 외무성으로 초치해 강하게 항의했다. 퇴근길에 소식을 들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말없이 퇴근했고, 일본 방위성의 관계자는 “한국이 어디까지 가려고 하느냐”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본 내 강경파들은 지소미아가 종료되더라도 미국을 통해 군사정보를 입수할 수 있으니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청와대 역시 “한반도의 주변 안보는 우리 정부의 정보 자산과 한미 연합 자산을 통해 대비와 감시가 가능하다”며 한미 간 협력을 내세운다.

양측 모두 미국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똑같다. 아베 총리가 북한 발사체와 관련, “미일 간에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한 발언, “한미동맹은 끊임없이 공조를 강화하면서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발언에서 보듯, 우리 정부와 일본 정부 공히 한미일 안보체제에서 상대국을 빼고 미국과의 연계를 강화할 전망이다.

특히 ‘전쟁 가능국’이 되기 위해 개헌을 추진 중인 아베 총리는 우리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자위대를 헌법에 명기할 수 있는 호재로 판단할 수 있다. 우리 정부의 협정 종료 결정을 일본의 안보 위기 상황으로 몰아갈 경우, 안보를 위한 개헌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위대를 사열하는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자료:월스트리트저널TV 화면 갈무리)(2014.10.26)
자위대를 사열하는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자료:월스트리트저널TV 화면 갈무리)(2014.10.26)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개헌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도쿄 중심가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자료:월스트리트저널TV 화면 갈무리)(2015.07.16)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개헌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도쿄 중심가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자료:월스트리트저널TV 화면 갈무리)(2015.07.16)

그러나 북한이 최근 단거리 미사일을 연이어 발사하고 북미대화가 다시 꿈틀거리며 기지개를 켜는 상황이라, 한미일 안보체제의 연결고리 중 한 축이 무너지는 것은 우리보다 일본에 더 많은 타격을 입힐 것이라는 관측이다.

일본 언론들은 관련 소식을 발 빠르게 전했다. 아사히(朝日) 신문은 “한미일 협력을 축으로 하는 안전보장체제가 크게 흔들릴 뿐 아니라, 징용문제와 수출규제로 대립 중인 한일관계 악화가 불가피하다”고 보도했고, NHK는 청와대 발표를 속보로 다루면서 정부 고위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 “일본에 대한 영향은 그다지 없다”고 전했다.

역내 영향력 축소 우려에 실망한 미국

미국 마이크 폼페이오(Mike Pompeo) 국무장관의 “실망스럽다”는 말 한마디에 미국의 입장이 담겨 있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22일(현지시간) 캐나다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외교부 장관과 회담을 마친 후 “오늘 아침에 한국의 외교부 장관과 통화했다. 한국이 정보공유 합의에 대해 내린 결정을 보게 돼 실망스러웠다”며 한일 간 대화를 촉구했다.

미국은 그동안 지소미아 유지를 강하게 희망했다. 마크 에스퍼(Mark Esper) 국방장관은 이달 초 일본과 한국을 방문했을 때, “지소미아는 우리에게 핵심이다. 한미일 안보 협력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으므로 정보 공유가 계속되도록 권장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이어나간 바 있다.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ASEAN, 동남아국가연합)에서 대화를 마치고 포즈를 취한 한국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미국 마이크 폼페이오(Mike Pompeo) 국무장관, 일본 고노다로(河野太郞) 외무상(자료:Reuters)(2019.08.01)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ASEAN, 동남아국가연합)에서 대화를 마치고 포즈를 취한 한국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미국 마이크 폼페이오(Mike Pompeo) 국무장관, 일본 고노다로(河野太郞) 외무상(자료:Reuters)(2019.08.01)

한미일 삼각 안보체제에 생긴 균열은 동북아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축소로 이어지므로 트럼프 행정부는 현 상황이 조속히 복구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미국 내 언론들의 보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은 북한을 둘러싼 동맹국들 간의 정보 공유를 중시하는 미국 내에서 우려와 맞닥뜨릴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

“지소미아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병력 이동 등 예민한 군사정보와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역내 강대국들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직통 채널이다. 미국의 동맹 네트워크가 약화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통상 조치와 역사적 고통을 둘러싼 불협화음이 안보 협력 분야로 확대됐다." -블룸버그(Bloomberg)-

특히 우리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신속 보도한 뉴욕타임스(NT)는 “이 협정은 미국이 북한의 미사일 활동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기 위해 2016년 한일 양국에 밀어붙였던 것”이라면서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 정부에 ‘유지’를 종용했지만, 스티븐 비건(Stephen Biegun)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청와대 국가안보실 고위층(김현종 2차장)과 만난 지 몇 시간 후에 종료 결정이 발표됐다”며 경과를 전했다.

미국의 역내 영향력과 관련, 신문은 "미국에 경보음을 알리는 결정”이라면서 “한국의 결정은 한일 간의 긴장이 극적으로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움직임이자, 역내 미국의 영향력이 얼마나 축소되는지를 보여주는 최신 증거"라고 진단했다. 신문은 또 일본의 반응에 대해 ”아베 신조 정부는 이 결정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했다.

2016년 11월 국방부 앞에서 진행 중인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반대 시위(AP/by Ahn young-joon)
2016년 11월 국방부 앞에서 진행 중인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반대 시위(AP/by Ahn young-joon)

“박근혜 정부가 공론화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졸속하게 밀어붙인 것이다. 일본은 군사대국화의 길을 가고 있다. (중략) 이런 마당에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는 게 적절한지 의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한 발언이다. 이번 결정에 문 대통령의 평소 의중이 반영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우리 정부가 종료 결정을 내림에 따라, 총 29회 정보를 교류하면서 3년 동안 지속된 한일 간 군사정보교류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우리 정부는 일본이 부당한 경제보복 조치를 철회하고 우호 협력관계 회복에 나선다면 지소미아 종료를 재검토할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을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지소미아 종료를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 대목이다.

‘강제징용 배상판결’이라는 과거사 문제에서 시작된 한일 갈등이 경제보복으로, 다시 안보로 옮겨 붙었다. 오는 28일이면 한국은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서 완전히 빠지게 된다. 한일 어느 쪽도 물러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싸움은 국제적인 명분과 실리를 두고 오히려 더 치열해지는 양상이다.

bizlink@straigh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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