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전 12시22분께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날 숨을 거뒀다. 향년 88세.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고인은 경남 거제 출신인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3김(金)시대를 호령하던 인물 중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제외한 두 명의 거목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사진은 1987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게 통일민주당을 창단하기도 했다. 2015.11.22. (사진은 독자 정태원씨 제공)

6월 민주항쟁을 통해 5공 독재를 무너뜨린 1987년 체제를 흔히 ‘민주화’의 시작으로 명명한다. 현행 9차 헌법을 보면 유신헌법과 이를 승계한 5공 헌법에 의해 제한되었던 국민의 기본권 등이 대부분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 통신의 비밀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한 기본규정이 ‘국민의 권리’ 조항으로 담겼다. 유신헌법 성립 당시 간선제로 바뀌었던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원 직선제는 각각 5년 단임제 형식과 당초대로 부활하였다. 국회 국정감사 및 국정조사도 16년 만에 되살아났으며 5·16 쿠데타 직후 폐지된 지방선거까지 그 실시근거를 마련하였다.

6월 민주항쟁의 주요 동력은 크게 보아 4개의 세력이었다. 부산·경남을 대표한 김영삼(YS), 호남을 대표한 김대중(DJ), 학생·재야운동을 포함한 양심적인 화이트칼라, 노동자·농민·영세 자영업자 등 기층민중의 4세력 연합이 오늘날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것이다. 양심적인 화이트칼라들은 일명 ‘넥타이부대’로 6월 항쟁 당시 점심시간이나 퇴근시간이 되면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사무직 노동자들이 주축이었고, 그들은 자발적으로 거리에 나와 민주화를 위해 시위대에 합류한 3050세대였다. 6월 항쟁으로 인한 정치민주화에 자극을 받은 기층 노동자들은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3천여건 이상의 노동자 대투쟁을 벌여나갔으며, 이러한 파업투쟁을 계기로 노동조합의 조직화가 급속히 증대되었다.

그러나 그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정치사회 등 모든 분야를 지배하게 만든 변곡점은 두 가지 계기에서 찾아왔다. 1987년 대선에서의 양김 분열과 1990년 YS의 3당 합당 결행이 그것이다.

1987년 대선은 절호의 정권교체 기회를 양김 분열로 놓쳤으니 무슨 말로도 변명할 수 없다. 김영삼 후보 28%, 김대중 후보 27%, 합계 55%였으나 노태우 당선자는 겨우 36.6%에 불과했다.

1990년 YS의 3당 합당은 지역주의를 온존·강화시킨 ‘1990년 체제’의 출발점이었다. ‘1987년 체제’가 법과 제도에 의한 민주주의의 스타트 라인이라면, ‘1990년 체제’는 국민들의 생각을 ‘지역주의’라는 괴물 속으로 몰아넣은 시발점이었다는 것이다.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도입, 5·18특별법 제정, 전두환·노태우 구속 및 군사반란 심판, 지방자치선거 실시 등 대통령 당선 이후 YS가 남긴 공은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3당 합당이라는 비정상적인 절차를 거쳐서 집권을 했다.

3당 합당은 당초 대구경북의 노태우 대통령과 부산경남의 김영삼 총재, 그리고 대전충청의 김종필 총재가 내각제를 고리로 합의한 밀약이었다. 호남을 기반으로 한 김대중 총재만을 배제했으니 명백한 ‘호남고립 전략’이었다.

실제로 이 ‘호남고립 전략’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져서 3당 합당 이후 실시된 모든 국회의원 총선에서 호남 기반 정당은 단 1번도 승리를 하지 못했다. 17대 총선의 경우,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과 호남 기반의 새천년민주당과 결별한 신당(열린우리당) 창당의 효과가 컸기 때문에 예외였다. 실제로 14대 총선부터 의석 67석(19대 국회 기준)의 영남을 새누리당(민자당)이 81.2% 석권해왔고, 이에 대항하여 의석 30석의 호남도 새정치연합(민주당)이 87.8%를 싹쓸이했다. 인구와 의석수가 많은 ‘영남당’은 연전연승일 수밖에 없었다.

지역구도에서 절대적인 약세에 놓인 새정치연합(민주당)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연합(DJP 연합) 전술을 구사하거나 기업인 출신 후보와 단일화(노무현, 문재인) 하는 방식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이질적인 세력 간 연합으로 지속가능하지가 않았다.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 당시 대구 출신 박정희 후보의 대구경북 득표율은 75.6%였다. 그런데 41년이 흐른 2012년 박근혜 후보의 득표율은 이보다 더 높은 80.5%였다.

마찬가지로 1971년 당시 전남 출신 김대중 후보의 호남 득표율은 62.3%에 머물렀으나 2012년 문재인 후보의 호남 득표율은 무려 90%에 이르렀다. 문 후보는 경남 거제 출신이었지만 ‘호남 기반 정당’의 후보였기 때문에 호남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이것이 바로 심화될 대로 심화돼 있는 망국적 ‘지역주의’의 현주소이다.

2009년 8월 김영삼 前대통령은 투병 중인 김대중 前대통령을 문병하며 22년 만의 ‘양김 화해’를 선언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DJ는 나와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고 협력관계이었으며 세계에서 유례없는 특수한 관계이었다.”라며 DJ를 향한 각별함을 표시했다.

이번 국가장 기간 중 언론을 통해 알려진 YS의 마지막 유언도 바로 ‘화합과 통합’이다. 비록 1987년 YS와 DJ가 독자 출마로 민주세력 분열의 단초를 낳았지만 이제 YS의 영면을 계기로 재통합하라는 당부다. YS와 DJ는 일찍이 5공 신군부와 맞서 1984년 민추협을 조직하고 민주화투쟁을 함께 이끌었다. 그 민추협 출신들이 YS계와 DJ계를 가리지 않고 YS의 유언에 따라 대부분 이번 김영삼 前대통령의 장례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김영삼 前대통령의 장례식이 분열되었던 민주세력 재통합의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YS계와 DJ계의 ‘화합과 통합’은 단순한 민주세력 재통합, 재화합이 아니다. 영남과 호남의 통합, 호남과 영남의 화합은 ‘1990년 지역주의 체제’의 종말 선언이다. 그것은 생전 YS가 남긴 오점을 마지막 유언을 통해 바로잡음이다. 큰 산(巨山)의 명복을 빈다.

 

최 광 웅

참여정부 인사제도비서관
현 데이터정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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