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에서] 삼성의 사즉생(死卽生) 반도체 베팅, 이번에도 통할까?

2023-03-28     이호연 선임기자

미국이 중국의 화웨이 5G 통신장비 수출 규제에 이어 세계 4위의 중국 파운드리 업체인 SMIC 압박에 나서면서, 첨단기술 반도체 제품의 자국 내 생산체제 구축에 나섰다.

하지만, 우리가 미국의 매카시즘적 자국 내 첨단반도체 생산 정책을 순순히 따라간다면,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 우리나라의 반도체 경쟁력은 얼마 가지 않아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15일 삼성전자는 정부가 2042년까지 용인에 조성하는 710만㎡ 규모의 첨단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에 향후 20년간 300조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삼성은 ‘용인 클러스터 투자 올인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보인다.

전기차와 바테리 산업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안(IRA) 틀 안에 갇혀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동맹외교에만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는 가운데, 삼성이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의 각오로 능동적 대처를 한 점에 대해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현재 대한민국은 흥망성쇠의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선택하는가에 따라,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을 것인지, 아니면 우리 경제가 급하향 곡선을 타고 지옥으로 추락하게 될 것인지 판가름이 날 것이다.

핵심 쟁점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반도체 산업의 몰락이 불러온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반도체 산업은 미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일본은 경박단소(輕薄短小) 전략으로 야금야금 반도체 산업을 잠식해 나갔다. 1985년에는 도시바를 비롯한 일본의 6개 반도체 기업들이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80%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게 되면서, 미국은 일본에 반도체 종주국의 지위를 빼앗겼다.

급기야 미국은 1985년 국가 전략적 차원에서 치밀한 계획하에 일본의 반도체 산업 말려 죽이기 작전을 개시했다.

가장 먼저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가 무역대표부(USTR)에 일본 정부의 불공정한 반도체 민간기업 지원한 정책을 제소했고, 미국의 DRAM 업체인 마이크론은 일본 NEC, 히타치, 미쓰비시, 도시바 등을 반덤핑 혐의로 제소했다.

민관 합동의 집요한 공격 끝에 미국 정부는 1986년 일본 정부와 ‘반도체 무역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일본은 미국에 반도체 생산 원가를 공개해야만 했고, 일본 내 미국 반도체 업체의 시장점유율을 20%까지 양보해야만 했다. 1987년 미국은 슈퍼 301조를 통해 일본에 무역보복까지 가했다.

한편, 1985년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과 함께 서방 5개국 재무장관(G5) 회의를 열고, 일본 엔화와 서독 마르크화의 고평가와 미 달러 저평가가 이뤄지도록 환율조작을 압박했다.

10년간에 걸친 미국 정부의 환율 정책과 무역보복 등으로 일본의 반도체 산업 경쟁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시작됐다.

1997년 일본과의 반도체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의 인텔은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의 자리를 탈환했고, 모토로라, TI 등 미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경쟁력을 되찾았다.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사진=연합뉴스)

삼성의 반도체 산업에서의 승부수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은 1983년 일본에서 반도체 산업 진출을 선언했다. 미국의 일본에 대한 반도체 공격이 한창일 때 DRAM 제조라는 틈새시장을 찾아냈고, 제품개발도 하기 전에 기흥공장부터 짓기 시작했다. 1983년 삼성은 각고의 R&D 노력 끝에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자체적으로 64K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특허권 전쟁을 벌여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괴멸시키면서, 한국에서 싹트고 있는 반도체 경쟁력까지 말살해 버리려 들었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와 인텔 등의 미국기업은 삼성반도체 또는 금성반도체 등에 천문학적 규모의 특허료를 요구했다. 사과박스 분량의 계약서를 내놓으면서 계약서에서 한 글자도 바꾸는 등의 협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계약서에 싸인을 하든지, 아니면 반도체 생산을 중단할 것인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몰아붙였다. 순 매출이 아닌 반도체 매출 총액의 일정 퍼센트의 과도한 로열티를 요구했다. 반도체 입문 레벨의 특허권이 없는 우리 기업들은 눈물을 머금고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고 특허료를 부담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1992년에는 64M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에 성공했고, 1993년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한 이후 한 번도 왕좌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삼성은 여러 차례에 걸친 사운을 건 치킨 게임에서도 승리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초호황기인 2018년 60조원 가까운 영업이익을 달성하기도 했다.

최근 몇 년간 화웨이나 SMIC의 반도체 추격속도는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제재가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반도체나 휴대폰 산업이 조선업이나 석유화학 산업의 전철을 밟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반도체 공급망 배제 전략이 우리에게는 행운을 안겨다 준 셈이다.

우리가 절대로 반도체 산업을 양보할 수 없는 이유

박근혜 집권 기간 중인 2015년 말 한중 FTA가 발효되면서, 우리 정부는 ▲관세 철폐 효과로 소비재와 화학업종 ▲비관세장벽 완화 효과로 소비재, 화학, 전자, 전기, 농식품 등의 업종 ▲밸류체인 개선 효과로 전자, 섬유, 농식품, 소비재 등의 산업 분야가 수혜업종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화장품 등의 소비재 업종이 잠시 빤짝 특수를 누렸을 뿐, 대다수 업종에서는 정반대의 효과가 나타났다. 특히 노동집약적인 뿌리 산업이나, 주얼리 가공이나 봉제 등의 다수 소공인 업종에서의 경쟁력은 급격하게 추락했다. 중국의 중간재 국산화 전략이 성공한 셈이다.

2018년까지만 해도 중국은 우리나라의 최대 흑자국이었으나, 올해부터는 최대 적자국으로 바뀌었다. 올해 2월까지 누적 무역적자 규모가 50억 7,400만(약 6조 5,809억 원)달러에 달한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을 것이다.

중국과의 교역에서 석유화학이나 철강을 비롯한 대다수 산업의 구조적인 무역적자 행진이 개선될 조짐은 보이질 않는다. 대중 무역적자 현상이 단기는 물론 중기적으로도 해결될 가능성도 희박하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무역적자 규모는 역대 최대인 472억달러에 달했다. 지난 3월 20일까지의 무역적자는 241억3백만달러로 집계됐다.

그동안 반도체 착시현상으로 대중교역 적자나 전체적인 무역적자의 심각성이 가려져 있었다. 반도체가 없었다면 과연 우리나라가 무역흑자를 유지하면서 선진국에 편입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저성장과 무역적자 기조 속에서 우리가 사즉생의 각오로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보다 혹독한 침체기로 빠져들 위험성이 크다.

미국의 반도체지원법에 의한 무차별 공격

미국은 지난해 8월 반도체지원법을 통과시켰고, 향후 5년간 반도체 생산 보조금 390억달러와 연구개발(R&D)지원금 132억달러를 포함해 총527억달러의 예산을 편성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23일 조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 정책을 총괄하는 지나 러몬도 미 상무부 장관은 워싱턴 DC 조지워싱턴대에서 '미국의 기술 리더십을 위한 칩스법 및 장기 비전'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반도체 제조 위축은 우리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이고, 외국 반도체 공급망에 대한 의존은 우리 경제에 해를 끼친다"며 "반도체 지원법에 의해 촉발된 연구와 혁신, 제조를 통해 미국은 기술 초강대국이 되어 향후 수십 년 동안 경제 및 국가안보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이 연구개발과 대량 생산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가 미국이 되길 바란다”고 말해, 미국이 세계 최고의 유일한 반도체 왕국이 될 것이라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시스템반도체 분야의 1위와 2위를 달리고 있는 TSMC와 삼성 파운드리 공장의 미국 내 생산체제 구축인 것으로 보이지만, 메모리 반도체에 대해서도 예외를 허용치 않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미국은 한편으로 보조금을 미끼로 TSMC나 삼성의 대규모 미국 내 투자를 유치하면서, 칩4 동맹으로 중국을 첨단 반도체 공급망에서 배제하는 투트랙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미국이 인텔이나 마이크론, TI, 퀄컴, 엔비디아(Nvdia) 등의 자국 기업만으로는 첨단반도체 생산능력을 갖출 수 없어, TSMC나 삼성전자를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핵심은 보조금 지급과 관련된 조건이다. 초과이익 환수, 영업비밀 공유 등의 독소 조항이 문제다. 최근에 공개된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 세부 규정에 따르면, 미국 정부가 자국의 반도체 지원법에서 규정한 투자 보조금을 받으면 향후 10년 동안 중국에서 반도체 생산 능력을 5% 이상 확장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33조원을 투자해 낸드플래시의 40%를, SK하이닉스는 35조원을 투자해 D램의 40%와 낸드의 20%를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미국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경찰국가로 군림하면서 부동의 G1의 위상을 유지해왔다. 일본이나 독일의 추격 조짐이 보이면 무역전쟁을 벌여 따돌렸다. 우리나라도 미국으로부터 관세 부과, 반덤핑, 지식재산권 압박, 특허료 수취, 무역 쿼타 제한, 이전가격 세제, 시장개방 압박, 환율 조정 등의 무자비한 압박을 당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 미국이 인플레이션감축법 또는 반도체지원법에 따른 압박은 굳이 WTO 자유무역체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시장 경제체제하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무리한 조치들이다.

우리는 천문학적인 특허료를 부담하면서도 기술을 이전받지 못해, 엄청난 연구개발 노력을 투입한 끝에 간신히 개발에 성공했다. 세계 최초로 64MD램을 개발 이후 현재까지 메모리 분야에서의 혁신 개발 기술은 온전히 대한민국 삼성의 공이다. 이럼에도 공정 효율화 및 수율 제고 등의 노하우나 공정기술까지 공개하라는 요구는 언어도단일 것이다.

현재로서는 초과이익 환수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도 불분명하고, 변동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재무적 타당성을 기대하기 힘든 실정이다.

미국이 반도체 제조를 포기한 이유는 원가경쟁력 때문이다. 치솟는 건설 원가와 인건비 부담을 고려하면, 보조금 수취액보다 원가 부담 규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순리를 따르자면, 미중 갈등 현상을 주도면밀하게 관망하면서 미국 투자를 최소화하고, 공장 가동 시점을 최대한 늦추고, 국내 투자를 조기에 확대하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정부의 지원 방향

삼성은 메모리 분야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파운드리 분야에서는 약세를 보이고 있다. 파운드리 분야에서 대만의 TSMC가 50% 정도의 점유율로 1위를 차지하고 있고, 2위인 삼성전자는 16% 정도를 확보하고 있다.

퀄컴, 애플, 앤디비아, AMD 등의 글로벌 팹리스 기업들이 파운드리 업체로 삼성전자 대신 TSMC를 선택하는 이유는 삼성에 비해 TSMC가 공정의 안정성에서 앞서고, 자사 제품이 없어 기술 유출에 대한 우려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팹리스 기업들은 경쟁을 통해 칩 제조단가를 낮출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삼성에게는 기회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가능하다면, 반도체 부문을 물적분할 방식으로 기업분리하는 방안도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우리 정부는 ▲국내외 팹리스·소부장 선도기업 최대 150개 유치 및 우수 인재 확보 ▲디자인하우스-IP-파운드리 협력 강화 ▲2035년까지 전력, 차량 또는 AI 등의 유망 반도체 R&D에 총 3.2조원을 지원해 매출 조(兆) 단위 스타 팹리스 10개사 육성 등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반도체 산업은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가 요구되는 산업이기 때문에 글로벌 가치 사슬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생존을 할 수는 없다. 팹리스 기업이 원하는 것은 왕성한 첨단기술 생태계다. 지리적 요건은 중요하지 않다.

향후 반도체 산업을 견인할 분야는 인공지능과 IOT 분야로, 정부는 산업 생태계를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퀄컴 직원 몇 명이 CDMA 기술 상용화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해당 기업은 직원 몇십 명에 불과한 벤처기업이었다. ETRI를 중심으로 무수한 우리나라 엘리트 엔지니어들이 피땀 흘려 CDMA를 상용화시켰지만, 우리가 천문학적 규모의 특허료를 부담해야만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당시 정부나 개발 참여 기업 의사결정자의 혜안이 있었더라면, M&A 또는 상용화 이후 지적재산권 지분을 확보하는 결과를 확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몇 해 전 삼성이 소프트뱅크에 영국의 ARM사 인수기회를 뺏긴 점도 아쉽다.

반도체 산업은 이제 기업간의 전쟁이 아닌 국가간의 전쟁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안보를 내세워 첨단반도체 기술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대만도 중국의 침략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실리콘 실드(방패)’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일본도 반도체 부활을 꿈꾸며 구마모토에 TSMC 공장 유치에 4조5천억원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급했다.

우리 정부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을 통해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 시설투자세액공제율을 대기업과 중견기업은 현행 8%에서 15%로, 중소기업은 16%에서 25%로 확대할 예정이다.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민관이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힘을 합쳐 메모리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파운드리 경쟁력 확보를 위해 투자와 R&D 노력을 투입해야 할 때다.

▲이호연 선임기자

 

[스트레이트뉴스 이호연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