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이창용, 시장 불안 속 ‘중앙은행 역할’ 재정의
“인플레 안정만으로 경기안정 장담 어려워” '부동산 시장의 불안정' 장기적 경제 건전성에 위협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한국의 통화정책 운영 경험과 통합정책-프레임워크(Integrated Policy Framework)에 기반한 대응 전략을 소개했다. 특히 기준금리 조정 같은 단일한 수단의 한계를 지적하며 다양한 정책수단 동원을 위해 중앙은행의 역할이 달라져야 함을 주장했다.
◆ “갈수록 힘든 경기 예측, 통합정책-프레임워크로 접근해야”
16일 한국은행은 서울 종로구 사옥에서 아시아개발은행(ADB)·국제통화금융저널(JIMF)과 함께 ‘포용적 성장을 위한 개발도상국과 신흥국의 재정·통화정책’을 주제로 컨퍼런스를 공동 개최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한국은행은 예기치 못한 글로벌 인플레이션 사이클을 직면했다. 이 총재는 “2022년 초부터 기준금리를 빠르게 인상했다”며 “이는 한국 통화정책 역사상 가장 빠르고 강한 긴축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신속한 조치 덕분에 물가 안정이 진전되었고, 한국은행은 다른 나라보다 먼저 통화정책의 기조를 전환할 수 있었다”며 “다만 급격한 금리 인상기에는 원화 약세와 금융시장 불안정성이 동반됐기에 단기 유동성 공급, 외환시장 개입, 회사채 매입 등 다양한 정책수단을 동시에 동원해야 했다”고 밝혔다.
이어 “외환시장 안정과 관련해 한국은행의 목표는 환율 절하를 막는 것이 아니라 그 속도를 완화해 시장 혼란을 방지하는 것이었다”며 “외환시장 구조적 취약성으로 인해 급격한 환율 변동이 기업들의 마진콜과 추가적인 달러 수요로 이어졌고 이는 시장 불안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이 총재가 제안한 통합정책-프레임워크(IPF)는 복잡한 경제 상황에서 금리뿐 아니라 거시건전성 정책(가계부채나 부동산 억제), 자본이동 관리, 외환시장 개입 등 다양한 정책 수단을 함께 조율해 쓰는 전략적 운영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기준금리 하나로 경기와 물가를 조절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오늘날처럼 인플레이션, 환율 급등, 자본 유출입, 금융시장 불안정, 가계부채 등 다양한 위험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단일 수단의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이창용 총재는 “서울지역 주택가격이 연율 10% 이상 오르고 가계부채가 10조원 가까이 증가했기 때문에, 기준금리 인하를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며 “중앙은행의 임무는 물가 안정이지만, 한국처럼 가계부채 비율이 높은 나라에서는 부동산 시장의 불안정이 장기적으로 경제의 건전성에 위협이 된다”고 지적했다.
이 총재는 “정부와 협력해 가계부채 관리에 필요한 거시건전성 조치를 먼저 강화한 뒤, 그 효과가 확인되면 금리정책을 조정하는 전략을 취했다”며 “통화정책과 거시건전성 정책 간의 효과적인 조율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강조했다.
정치 불확실성에 따른 시장 충격도 언급됐다. 이 총재는 “2025년 초, 국내 정치 불안과 외부 불확실성으로 소비자심리지수가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까지 하락했고, 환율은 1400원을 넘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기준금리를 내리면 환율 불안과 외국인 신뢰 저하를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고, 한국은행은 금리를 동결하는 대신 중소기업 등 실물경제를 위한 대출 지원 프로그램을 확대했다”고 설명했다.
이 총재는 “일각에서 중앙은행의 대출지원이 준재정활동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적절한 한도 내에서 다양한 정책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며 “정부와 중앙은행 간의 긴밀한 정책 공조, 다중 목표를 지닌 신흥국 중앙은행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전략, 단기 대응과 함께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통찰력 있는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중앙은행의 역할이) 인플레이션 타게팅 하나로는 부족하다”며 “경기 정책의 복원력을 키우고, 미래의 리스크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 “포용적 성장 위해선 재정 규모보다 ‘지출 목적’ 더 중요”
가지 살라 우딘 스웨덴 린셰핑대학교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공공지출은 증가하고 있으나, 여전히 많은 국가에서 소득 불평등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며 “이는 정부 지출이 적절한 부문에 타겟팅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그는 교육, 보건, 사회보호에 대한 투자야말로 가장 확실한 불평등 완화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우딘 교수는 “교육과 사회보장 지출은 지니계수를 유의미하게 낮추는 데 효과가 있고, 특히 저소득 계층일수록 실질적 혜택이 크다”며 “환경·주거·문화 분야에 대한 지출도 일정 부분 인간개발지수 향상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출은 불평등 완화 효과가 크지 않거나 오히려 오락적인 지출로 전락할 우려도 있다.
우딘 교수는 “총지출의 규모보다는 ‘누구를 위한 지출인지’, 그리고 ‘제대로 집행되고 있는지’가 정책효과를 좌우한다”며 “포용적 지출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제도적 기반과 통치 역량이 탄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제도 신뢰도가 낮거나 부패가 심한 국가에서는 지출 효과가 제한된다”며 “동남아시아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정부 지출이 오히려 불평등을 확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가 재정지출 양을 늘리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교육·보건·사회안전망에 대한 ‘정밀 타겟팅’과 함께 제도적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며 “그래야만 포용적 성장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 “저급한 공공투자 질은 재정만 확대하고 리스크 키워”
아맷 아다로프 월드뱅크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공공투자의 질(Public Investment Quality, PIQ)이 낮은 국가는 공공지출 확대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아다로프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가령 1달러의 공공투자를 하더라도 반드시 그만큼의 생산적 자본을 의미하진 않는다”며 “이른바 ‘하얀 코끼리(white elephant)’ 처럼 효율이 낮은 투자 프로젝트는 성장에 기여하지 못하고 부채만 늘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얀 코끼리’는 보기에는 거창하고 멋져 보이지만, 실제로는 돈만 많이 들고 별다른 쓸모가 없는 공공사업을 말한다. 왕이 신하에게 하얀 코끼리를 선물로 주면 신하는 이를 버릴 수도 없고 노동에 쓸 수도 없기 때문에 막대한 사육비만 부담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아다로프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PIQ 지수가 낮은 국가에서 공공투자를 확대하면 신용부도스와프(CDS) 스프레드가 확대되고, 국가 신용등급이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며 “반면 PIQ가 높은 국가에서는 동일한 수준의 투자 확대가 오히려 국가위험도를 낮추고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공공투자 품질은 단지 프로젝트의 성패를 넘어, 거시경제 안정성과 국가의 신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며 “특히 투자 사전평가, 조달 투명성, 정치적 중립성 확보가 PIQ 개선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PIQ가 낮은 국가에서 무리한 확장재정은 오히려 부채비율을 가파르게 악화시킬 수 있다”며 “공공투자의 양을 늘리기 전에 그 품질을 먼저 끌어올려야먼 리스크를 낮추고 장기적으로 부채를 감당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재원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장은 “오늘날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포용적 성장의 실현을 위해 학계와 글로벌 거버넌스 간 연결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재원 원장은 “중앙은행의 일차적 책무는 건전한 통화정책을 통한 거시경제 안정이지만, 이제는 글로벌 기후 위기에 대한 연구와 정책 자문 기능 역시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의 경우, 지역 간 불균형, 이중적인 노동시장 구조, 교육 접근성 격차 등의 구조적 문제가 장기적인 성장잠재력과 직결된다”며 “한국은행은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위한 연구와 정책협의에 전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스트레이트뉴스 조성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