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왕국의 균열③] 돈의 속도 vs 산업의 속도…전략광물·제련산업이 남긴 마지막 질문

제련업을 시장에만 맡길 수 없는 이유

2025-11-20     박응서 기자

<편집자주> 11월 14일 영풍이 2025년 3분기 실적을 공시하면서, 고려아연 vs 영풍·MBK의 경영권 분쟁 이후 1년간 성적표가 드러났다. 2024년 10월부터 올해 9월까지 이어진 1년 간의 실적이 자본의 효율과 산업의 공공성이 맞부딪쳤던 경영권 분쟁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성을 말해준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이번 시리즈를 통해 단순한 경영권 다툼을 넘어, 돈의 논리로는 지탱할 수 없는 산업의 본질을 짚는다. 금속왕국의 균열은 곧, 국가기간산업이 어디까지 시장에 맡겨질 수 있는가에 대한 경고이자 질문이다.

올해 1월 23일 열린 고려아연 임시 주주총회에서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경영권 방어에 성공하면서 전략광물 분야를 더 강화해가고 있다. 사진은 박기덕 고려아연 사장이 1월에 열린 고려아연 임시 주주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고려아연과 영풍·MBK의 경영권 분쟁은 400여일 동안 정치·재계·법조계를 뜨겁게 달궜고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이 싸움의 본질은 어느 쪽이 회장 자리를 차지하느냐가 아니다. 아연과 은, 동과 게르마늄, 리튬 같은 전략광물을 제련하는 국가기간산업을 ‘돈의 속도’에 맡겨도 되는가, 아니면 ‘산업의 속도’에 맞춰 관리해야 하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에 있다. 앞선 1편이 실적의 결과를, 2편이 가상의 미래를 보여줬다면, 이번 3편은 이 싸움이 한국 산업에 남긴 구조적 질문을 이야기한다.


◆‘한 번 멈추면 되돌리기 어려운’ 제련업의 시간


전략광물 제련업은 단순한 제조업이 아니다. 고온의 용융과 전해, 정련 공정을 수백 단계 쌓아 올린 초정밀 장치산업이다. 공정 온도 0.1도, 전해조 전압 1% 차이가 수율과 안전을 흔들고, 한 번 멈춘 설비를 원상 복구하는 데만 수개월 이상이 걸린다. 이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은 장비가 아니라 ‘시간’이다.

이 때문에 미국·EU·일본은 전략광물 기업을 사실상 공공재처럼 다룬다.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전략광물 기업을 공급망 안보의 핵심 축으로 규정해 외국자본 지분, ESG 의무, 장기 투자 조건을 강하게 묶어두고 있다. EU도 전략원자재법을 통해 장기 공급계약 의무, 공공투자 확대, 환경·안전 모니터링 강화를 추진 중이다. 이들 국가가 공통으로 전제하는 것은 하나다. “전략광물은 한 번 무너지면 다시 세우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이 든다”는 사실이다.

지난 400여일 동안 숫자는 냉정했다. 고려아연은 매출이 3조4000억원대에서 4조원 위로 올라섰고, 어느 분기에서도 전년 대비 매출이 줄지 않았다. 영업이익은 일시적 비용 부담으로 주춤했다가 1년 안에 80% 이상 반등했다. 온산·울산 라인 증설, ESG 비용 선제 집행, 헝가리·캐나다·인도네시아 프로젝트를 동시에 끌고 가면서도 실적 그래프는 완만한 우상향을 그렸다.

이 숫자는 단순한 성적표가 아니다. 전문경영인 체제, 현장 기술인력 중심의 의사결정, 규제 리스크를 ‘선제 비용’으로 처리하는 경영 방식이 장치산업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산업의 속도는 느리지만 방향이 한 번 잡히면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상승하는 선형 그래프를 만든다는 사실이 통계로 입증된 셈이다.

고려아연 온산제련소는 안티모니를 포함해 다양한 전략광물을 생산해 글로벌 공급망 안정화에 기여하고 있다. 고려아연 제공

반대로 같은 기간 영풍의 그래프는 ‘출렁임’ 자체였다. 매출은 6300억원대에서 7500억원대로 회복된 듯 보이지만, 그 사이에 전년 대비 20% 이상 매출 감소, 영업손실 900억원대, 1개월 30일 조업정지, 환경부채 2000억원 돌파, 제련부문 손실 200배 증가라는 굴곡이 촘촘히 박혀 있다. 한 분기만 놓고 보면 “나아졌다”는 해석이 가능하지만, 1년을 통째로 놓고 보면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는 진단을 피하기 어렵다.


◆영풍 10년, MBK 1년이 보여준 또 다른 단면


영풍이 겪고 있는 위기는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석포제련소가 수차례 환경법 위반으로 과징금과 행정처분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환경투자와 설비 교체가 후순위로 밀려났다는 지적은 수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그 결과가 2024~2025년 조업정지와 대규모 환경부채, 200배 늘어난 제련부문 손실이라는 숫자로 돌아온 것이다.

영풍의 지난 10년은 ‘숫자를 앞세운 경영이 장치산업에서 어떤 결과를 낳는가’에 대한 일종의 실험 기록처럼 보인다. CAPEX와 환경비용을 줄이고, 단기 실적을 관리하는 방식은 초기에는 ‘효율’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효율의 이면에는 설비 노후화, 공정 불안정, 환경 리스크 누적이라는 그림자가 깔린다. 결국 이 그림자가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최근 1~2년의 실적이다.

지난 1년 동안 MBK가 보여준 행보 역시 이번 분쟁을 해석하는 키워드다. 대표 인수기업인 홈플러스는 경영 악화로 올해 3월 기업회생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MBK는 점포 구조조정과 자산 매각에 속도를 냈고, 전국 곳곳에서 매장이 문을 닫았다. 마트산업노조와 시민단체가 국회에서 “점포 폐점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자구 노력을 하라”고 요구하는 장면은 단기 재무개선을 위해 지역 고용과 상권을 희생하는 구조조정 방식에 대한 사회적 반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롯데카드에서는 297만명에 달하는 고객 정보유출 사고가 발생했다. 금융당국은 정보보호 예산이 오히려 전년보다 줄어든 점을 문제 삼았다. 단기 수익성 중심의 구조가 보안·리스크 관리 같은 ‘눈에 바로 보이지 않는 비용’을 후순위로 밀어낸 결과라는 지적이 금융권에서 나왔다. 결국 사고 이후 카드사 대표와 MBK 부회장이 동반 사임하는 사태로 번졌다.

이 두 사례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단기 수익성에 초점을 맞춘 의사결정 구조가 장기 신뢰와 시스템 안정성, 안전·보안 같은 영역을 희생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제련업은 바로 그 ‘장기 신뢰’와 ‘시스템 안정성’이 핵심 경쟁력인 산업이다.


◆‘돈으로 되는 산업’과 ‘돈만으로는 안 되는 산업’


모든 산업이 사모펀드와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유통·소비재·일부 서비스 산업에서는 자본의 속도와 효율이 큰 가치를 만들기도 한다. 문제는 전략광물·제련업처럼 공정·안전·환경이라는 3대 공공성을 품고 있는 산업이다. 이 영역은 돈을 투입할 수는 있지만 돈만으로는 생산기술·현장 노하우·설비 정합성·환경 규제 대응력을 대체할 수 없다.

제련업의 핵심은 ‘축적된 시간’이다. 설비를 어떻게 깎고, 어느 온도에서 전류를 얼마나 흘리는지, 비가 많이 올 때와 건조할 때 공정을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험이 10년, 20년씩 쌓여 공정의 안정성을 만든다. 이 시간의 가치가 재무제표에 바로 찍히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가치를 깎아내리는 순간부터 산업은 서서히 균열을 일으킨다.

산업부와 기재부, 환경부, 금융위가 지난 1년간 고려아연 분쟁에 민감하게 반응한 건 이 갈등이 단순한 기업지배구조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략광물 공급망이 흔들리면 그 여파는 배터리와 자동차, 반도체, 방산, 전력망 등 산업 전방위로 퍼져 나간다. 한 번 무너지면 복구 비용이 수십조원에 이르는 산업을, 완전히 시장 논리에만 맡길 수 있느냐는 질문이 정부와 국회, 시민사회 전반에서 제기됐다.

고려아연 최고기술책임자(CTO)인 이제중 부회장이 온산제련소 내 인듐 공장을 찾아 생산된 제품을 확인하고 있다. 고려아연 제공

세계 주요국은 이미 답을 내렸다. 전략광물 기업의 지배구조를 공공정책의 틀 안에서 관리하고, 특정 자본의 과도한 영향력을 견제하는 장치를 법과 제도로 마련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 이번 분쟁은 상당 기간 ‘형제 간 갈등’과 ‘사모펀드 vs 가족기업’의 프레임으로 소비됐다. 정작 중요한 질문인 “국가기간산업을 어떤 속도와 철학으로 운영해야 하는가”는 뒤늦게 조명되고 있다.


◆산업의 본질을 우선 순위에 두는 경영


400여일 동안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고려아연은 모든 분기에서 전년 대비 매출이 늘었고, 수익성이 회복됐다. 영풍·MBK는 모든 분기에서 실적과 리스크가 출렁였다. 이 차이는 누가 더 ‘투자에 능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쪽이 산업의 속도에 맞는 경영모델을 가지고 있었는가의 문제에 가깝다.

전략산업에서는 전문성과 안정성, 축적된 시간, 환경 대응 능력이 자본·속도·효율보다 우위에 선다. 고려아연이 분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실적과 미래 투자를 동시에 가져갈 수 있었던 이유는 돈의 논리를 거부해서가 아니라 산업의 본질을 우선순위에 두는 경영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금속왕국의 균열은 한국 산업에 남는 질문이다. “국가기간산업은 누구의 속도로 움직여야 하는가. 돈의 속도인가, 산업의 속도인가.” 400여일의 기록은 이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시사한다. 전략광물·제련산업에서만큼은 자본이 산업을 이끌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의 본질이 자본의 방식을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고려아연은 앞으로 한국이 겪게 될 모든 전략산업 관련 논쟁에서 하나의 기준점이 될 것이다. “돈의 논리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그리고 어디서부터는 산업의 본질을 위해 멈춰 세워야 하는가.” 그 기준을 세우라는 요구가, 이번 금속왕국의 균열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다.

[스트레이트뉴스 박응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