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보다 중요한 연합정치 전통을 만들자

박정희 대통령의 총통제 음모를 제기한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경향신문 1971년 4월 1일 기사

미국에서 활동한 토머스 엘리엇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읊조렸지만 그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면 4월과 10월 모두 잔인한 달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은 짧은 현대사 속에서 현직 대통령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경험을 안고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4·19 혁명 발발 일주일 후 그 직에서 물러난다. 27년 전 10월 26일은 바로 박정희 前대통령이 현직에서 시해당한 날이기도 하다. 이를 촉발시킨 부마항쟁은 그로부터 10일 전인 10월 16일 시작됐다. 부마항쟁의 시발은 바로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 의원 제명파동이다.

1971년 7대 대선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선 김대중 前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집권을 위해 총통제를 기도하고 있다.”라며 공세를 펼쳤다. 한국판 총통제라고 일컬어지는 ‘10월 유신’은 실제로 이듬해 10월 17일 국회 해산과 전국적인 계엄령을 선포하며 단행된다. 유신 헌법은 긴급조치권·국회 해산권·국회의원 3분의 1 추천권 등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강화로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온통 혼돈 상태다. 부녀 대통령 신기록을 세우며 단단한 지지층을 확보해온 박근혜 대통령이 내내 부인해오던 비선실세와의 관계를 일부나마 인정하고 국민께 사과한 날이 바로 2016년 10월 25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대통령들의 최후는 좋았는가? 초대 이승만 前대통령부터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권력형 비리문제로 국민 앞에 고개를 떨궈야 했고 적지 않은 가족과 측근을 감옥에 보내야 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국의 대통령제 제도 자체 혹은 운영에서 비롯된 문제다. 결코 87년 체제라고 부르는 현행 대통령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처음 검토된 대한민국 헌법(안)은 국무총리가 실권을 쥐고 대통령은 상징적인 국가원수에 머무르는 전형적인 유럽식 내각책임제였다. 1958년 7월 국회보에 실린 유진오 박사의 회고담을 보면 1947년 당시 남조선 과도정부의 김병로 법무부장, 이인 검찰총장 등이 내각제 연구자인 자신에게 요청, 사법부 산하 법전기초위원회 헌법분과위원회를 통해 헌법(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유엔이 남한 단독선거를 결정하자 한민당을 이끌던 김성수도 유진오에게 헌법초안 작성을 부탁했다. 김성수는 조선시대 유교적 가치관과 왕정 유산을 신속히 타파하기 위한 이상적인 제도로 내각책임제를 생각했다.

유진오는 초대 국회부의장 신익희를 중심으로 한 행정연구회와 공동으로 헌법초안 작성에 들어갔는데 윤길중, 차윤홍 등과 공동작업을 벌였다. 국회 본회의는 30명의 헌법기초위원과 10명의 전문위원을 선임했는데 유진오, 윤길중, 차윤홍 등이 전문위원을 맡았다.

헌법기초위원회는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 8명, 김성수의 한민당 6명, 무소속 12명 등으로 구성됐으나 한민당 소속 서상일이 위원장을 맡았다. 한민당은 친일파 등 인사 일부가 무소속으로 선거에 참여하면서 실제 의석은 80여석 남짓 됐으니 독립촉성국민회(55석) 못지않았다. 한편 서상일은 1950년 1월 27일에도 최초로 헌법개정안(내각책임제) 대표발의를 할 만큼 진보적 인사였다.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출신인 서상일은 개혁적인 인물답게 미국식 대통령중심제보다 유럽식 내각책임제를 선호했다.

김성수-서상일-유진오 라인으로 이어지는 내각제 추진파의 뜻은 거의 관철돼 가는 듯했다. 권력구조는 내각책임제, 의회는 양원제를 채택했다. 하지만 마무리 단계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거의 내정돼 있던 이승만이 “허울뿐인 대통령이라면 못하겠다.”며 노골적으로 “임금” 대접을 받는 대통령중심제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유야무야 내각제와 대통령중심제가 혼합된,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회에서 간선으로 선출하고 별도의 국무총리를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받아 임명하는 기형적인 제도로 출발한다.

당시 서상일 위원장의 제안 설명과 유진오 전문위원의 검토보고에 대한 의원들의 질의 답변 속기록 내용을 보면, 대통령중심제 또는 의원내각제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얼버무린다. 이후 어정쩡한 국무총리 제도는 1954년 사사오입 개헌으로 없애며 완전한 대통령중심제 국가 형태를 갖췄으나 4·19 혁명 직후 제2공화국 정부가 내각제를 채택하며 국무총리 제도는 부활한다.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식 부통령 대신 임명직 국무총리 제도를 채택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헌헌법에는 내각제적 요소가 매우 강했다. 국무총리의 임명 때 국회 동의권(제69조)이 핵심이다. 엄격한 3권 분립에 입각한 미국식 대통령제는 국회의원의 장관 겸직을 불허하고 있으나 대한민국은 제헌 헌법에서부터 이를 허용했다. 국무총리를 포함한 12명의 국무위원 중 7명이 국회의원 겸직이었다. 특히 외무·재무·법무장관 등 요직 3자리를 한민당에 할애했고 진보인사인 조봉암에게 경제 분야 요직인 농림장관을 맡겨 농지개혁을 추진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국내 정치적 기반이 허약한 이승만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연정뿐이었다.

당초 한민당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에 김성수 국무총리(안)을 추진했으나 이승만은 한민당을 무시하고 이윤영을 총리서리로 내정했으나 한민당의 반대로 부결(찬성 59표 대 반대 132표)돼버렸다. 이윤영은 월남한 기독교목사 출신으로 조선민주당 부당수를 맡고 있었다. 조선민주당 소속의원은 이윤영이 유일했으니 이승만의 의도는 바지 국무총리를 내세우는 것이었다. 이윤영은 1950년 4월과 1952년 10월 등 총 3회에 걸쳐 본회의에서 국무총리 인준 부결을 당하는 불운을 겪는다. 그리하여 초대 국무총리는 광복군 출신이자 조선민족청년단 소속인 이범석에게 돌아갔다.

전문위원에 불과한 유진오가 국회 본회의에 출석하여 대체토론과 질의응답에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승만 주도로 국무총리의 각료 제청권은 삭제돼버린다. 그렇지만 의석 6석에 불과한 조선민족청년단의 이범석이 김성수에게 협조를 요청해 한민당 3명의 입각을 성사시키면서 ‘국무총리 인준’은 마무리됐다. 국무총리 제청권은 1952년 1차 개헌 때 양원제 도입과 함께 비로소 헌법조문으로 등장한다. 이렇듯 고비 고비마다 이승만은 권력 분산보다는 대통령을 제왕 또는 총통으로 인식했다. 제1공화국 헌법은 내각제적 요소가 매우 강했지만 이승만은 번번이 이를 무시했다. 그것이 결국 그의 최후를 앞당겼다.

5·16 군사정변 이후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 前대통령은 1963년 5차 개헌을 하면서 국무총리 제도를 부활시켰지만 국회 동의 절차는 삭제했다. 국민 직선으로 선출되는 대통령이 국가권력의 전권을 행사하는, 총통제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특히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직하므로 대통령의 입법부 지배는 손쉬웠다. 역시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도 부활시켰으나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임명한 국무총리가 제청권을 행사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으니 사실상 허울뿐인 조문이다. 국회의 국무총리 임명 동의권은 1972년 유신 헌법에서 부활했다. 그렇지만 대통령이 지명하는 3분의 1 국회의원(유신정우회)이 있었기 때문에 의미 없는 조항이었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에도 국무총리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행정각부 통할권, 국무위원 임명제청권, 국무위원 해임 건의권 등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30년 정치사에서 김종필, 이해찬 등 단 두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대통령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김종필 국무총리는 그나마 연정 파트너였다. YS시절 ‘법대로’라는 별명을 가진 이회창 국무총리가 임명됐으나 국무위원들로부터 청와대 보고 前 국무총리실 사전보고 등 헌법상 권한행사를 주장하다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고 126일 만에 경질됐다. 나머지 현 황교안 국무총리까지 21명은 이마저도 방탄총리, 대독총리, 의전총리라는 비아냥거림을 받고 있을 뿐이다.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국무총리의 권한만 제대로 보장해도 ‘총통’ 대통령은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 헌법은 엄격한 3권 분립을 특징으로 하는 고전적 미국식 대통령중심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각제에 가까운 프랑스식 대통령제도 아니다. 그래도 내각제적인 요소가 상당히 가미된, 연합정치가 가능한 정치제도이다.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과 국회가 각각 국무총리를 고리로 권력을 분점할 수 있게 돼 있다. 이는 1948년 제헌헌법 제정 당시 한민당 당수 김성수의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과욕이 화근을 불러일으켰고 후임자들도 전례를 따라 틈만 나면 ‘제왕’이 되고자 했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모든 대통령들의 불행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최 광 웅

데이터정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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