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살아생전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수십 년간 군부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또한, 인권의 수호자로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과 공동선의 추구를 바탕으로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신앙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2009년 2월 16일 강남성모병원에서 88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이에 개신교와 대한 성공회, 한국 정교회, 불교, 천도교, 원불교 등 각 종파에서도 죽음을 애도했고,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하기 위해 전국에서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그 당시 보도에 따르면 2월 20일 자정까지 방문한 조문객 수가 38만 7천 420여명에 이른다.

◇ 역사 한가운데 서있던 든든한 기둥

김 추기경은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 1989년 제 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등을 이끄는 등 한국 가톨릭교회의 도약에 앞장섰다.

한국 가톨릭교회를 이끈 주역이었지만 그는 결코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1970년대 유신독재와 5·18 광주 민주화운동, 1980년대 6·10 민주항쟁 등 한국 현대사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독재와 불평등이 극에 달할 때마다 강력한 비난과 직언을 했고, 역사 흐름의 제 줄기를 찾는데 힘썼다.

특히 선종 이후 최근에는 그가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무력진압을 막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밝혀져 관심을 모았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86)에 따르면 김 추기경은 5·18항쟁이 발생한 닷새째인 5월23일 당시 윤공희 광주대교구장에게 ‘계엄군이 무력으로 또다시 시민들을 진압하는 것을 막아보겠다’는 내용의 비밀편지 1통을 보냈다. 편지 속에는 당시로서는 큰 액수인 1000만 원짜리 수표가 동봉돼 있었다.

김 추기경은 장애인과 사형수, 빈민, 탈북자, 외국인 노동자, 성매매 여성 등 사회 소외계층에게도 애정을 쏟았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헌신했다.

◇ 장기기증 평소보다 10배 늘어

김 추기경은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사목 표어처럼 마지막까지 주는 사랑을 실천했다.

1990년 안구기증서약을 한 김 추기경은 선종 이후 2명의 환자에게 각막을 기증했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사회 곳곳에서 장기기증 의사를 밝히는 등 ‘사랑의 바이러스’가 확산됐다.

한국인체조직지원본부(KOLEC)에 따르면 김 추기경 선종 이후 장윤정과 박현빈, 서인영, 박정아, 정한용 등 연예인들의 장기기증 서약이 잇따랐다.

사랑의장기기증 운동본부에는 김 추기경 선종 다음날인 17일 이후 각막과 콩팥 등 장기기증 의사를 밝힌 시민들이 680여 명으로 평소보다 10배 늘어난 수치를 기록했고, 한마음한몸운동본부와 생명나눔운동본부 등에도 장기기증 희망자가 3배 정도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김수환 추기경은 1990년 1월 5일에 장기 기증에 서약하였고, 선종 후에는 자신의 각막을 두 사람에게 기증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이 각막을 기증했다는 사실이 보도되고 나서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에는 평소보다 10배나 많은 사람이 장기기증 의사를 밝혔고, 여타 공공기관 등에서의 장기기증 약속, 그리고 연예인들의 장기 기증 의사 또한 이어졌다! 특히 가수 장윤정, 서인영, 박현빈, 쥬얼리 S, 배우 정한용, 희극인 양원경 등이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장기기증 운동본부 관계자는 “김 추기경 선종 이후 장기기증 문의가 쇄도했고 실제로 기증 의사를 밝힌 사람 수도 많이 늘었다며, “특히 선종 이후 5일까진 기증 희망자가 너무 많아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의 평소 가르침에 따라 자원 봉사와 입양 등의 봉사도 이어졌다.

김수환 추기경의 얼굴은 낙타상이다. 대신 지고 가야 할 짐이 몹시 많은 성직자의 관상이다. 성철(1911~1993) 큰스님은 코끼리상이다. 이유는 같다. 

저작권자 © 스트레이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키워드

Tags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