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경 LG 명예회장이 14일 별세했다. 향년 94세. 1925년생인 구 명예회장은 LG 창업주인 고(故) 구인회 회장의 장남으로 LG그룹 2대 회장을 역임했다. 사진은 1970년 1월 LG그룹 회장 취임 당시 구 명예회장. LG그룹 제공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14일 별세했다. 향년 94세. 1925년생인 구 명예회장은 LG 창업주인 고(故) 구인회 회장의 장남으로 LG그룹 2대 회장을 역임했다. 사진은 1970년 1월 LG그룹 회장 취임 당시 구 명예회장. LG그룹 제공

 

14일 94세 일기로 별세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LG를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장본인이다.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고인은 LG그룹에 들어와 회사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닦았고, 은퇴 후에는 자연인 생활을 하다 평화롭게 영면에 들었다. 부인 하정임 여사는 2008년 1월에 별세했고, 지난해 5월 장남인 구본무 회장까지 먼저 떠나보냈다.

구 명예회장은 고(故) 구인회 LG 창업회장의 장남으로, 1925년 경남 진주시 지수면에서 태어났다. 구 명예회장은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천직으로 생각하며 교사로 근무하던 1947년 부친 구인회 회장으로부터 부름을 받는다.

구 창업회장은 당시 LG의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를 설립해 럭키크림 화장품 사업을 시작했는데, 사업이 날로 번창하며 일손이 모자라자 아들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락희화학은 국내 최초의 화장품 '동동구리무'(럭키 크림)을 만들어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부친 사업을 도우며 지내던 구 명예회장은 아예 회사로 들어오라는 부친의 뜻에 따라 1950년 교편을 놓고 락희화학 이사로 취임하며 본격적으로 기업인의 길에 들어섰다.

틈나는 대로 생산현장을 살피고 연구소를 들러 임직원을 격려하는 구자경 회장.
틈나는 대로 생산현장을 살피고 연구소를 들러 임직원을 격려하는 구자경 회장.

 

LG그룹에 따르면 구 명예회장은 '이사'라는 직함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샅샅이 누볐다.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럭키크림을 만들어 손수 판매에 나서는가 하면, 하루 걸러 공장 숙직을 하며 새벽마다 도매상들을 맞았다. 공장 판자벽 사이로 들어오는 모래바람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허름한 야전점퍼에 기름을 묻히고 다녔다고 한다.

총수 일가는 영업·기획이나 해외지사에서 출발해 실무를 익히다 임원을 거쳐 경영자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구 명예회장은 공장에서 현장 수업을 받은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부친인 구 창업회장에게 '장남에게 너무 한 게 아니냐'고 할 정도였으나, 구 창업회장은 "대장간에서는 호미 한 자루도 담금질로 단련한다.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과 같다"며 혹독하게 구 명예회장을 가르쳤다.

그 덕에 구 명예회장이 쌓은 풍부한 경험과 현장 감각은 구 나중에 화학·전자 사업을 발전시키는 동력이 됐다.

구 명예회장은 1969년 구 창업회장이 별세하면서 LG가의 장남 승계 원칙에 따라 경영을 이어받아 1970년 그룹 2대 회장에 올랐다. 1970년부터 25년간 그룹을 이끌며 회사를 한국 기업 럭키금성에서 세계적인 기업 LG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구 명예회장은 국토가 작고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사람 만이 경쟁력이라는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 철학을 강조했다. 이 신념으로 연구개발에 승부를 걸어 투자·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 럭키 울산공장과 여천공장이 가동을 시작하기 전에 구 명예회장의 지시에 따라 연구실부터 만들어졌다.

그는 연구실이 각 공장마다 소규모로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1976년 국내 민간기업 중에서는 최초로 금성사에 중앙연구소를 만들었다. 전사 차원에서 설립한 이 연구소에 첨단 장비, 국내외 우수 연구진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투자를 집행했다.

구 명예회장이 1974년에는 금성사 디자인 연구실을, 1979년에는 대덕연구단지 내 민간연구소 1호인 럭키중앙연구소를, 1985년에는 금성 7개 계열사가 입주한 안양연구단지를, 같은해 우리나라 최초의 제품시험연구소를 연이어 개설했다.

구 명예회장 재임 기간 설립된 연구소는 70여개에 이른다. "연구소를 잘 지어야 우수한 과학자가 온다"고 당부하며 우수 인재를 끌어들이는 연구 프로젝트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이런 신념이 연구개발(R&D)을 중시하는 기업 문화의 뿌리가 됐다고 LG그룹은 전했다.

1978년 6월 구자경 명예회장(오른쪽)이 럭키콘티넨탈카본(현 LG화학에 합병) 부평공장 3차 확장공사 준공기념 테이프를 커팅하는 모습.
1978년 6월 구자경 명예회장(오른쪽)이 럭키콘티넨탈카본(현 LG화학에 합병) 부평공장 3차 확장공사 준공기념 테이프를 커팅하는 모습.

 

구 명예회장의 노력으로 LG그룹은 모태인 화학과 전자뿐 아니라 정보기술(IT), 부품·소재 등 다양한 영역으로까지 발을 넓힐 수 있었다.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중앙집중 에어컨, 전자식 VCR 등 대표 제품들이 구 명예회장 재임 때 개발됐다.

1975년 구미공단에 컬러TV를 연간 50만대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설립한 데 이어 1976년 국내 최대의 종합 전자기기 공장인 창원공장을, 1980년대에는 미래 첨단기술 시대를 내다보고 컴퓨터와 VCR 등을 생산하는 평택공장을 만들었다.

석유화학 분야에서도 수직계열화를 완성하고, 1980년대 초 충북 청주에 종합 생활용품 공장을 건설했다. 구 창업회장이 플라스틱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1954년 철수했던 화장품 사업에도 다시 진출, 현재 생활용품·화장품 업계 선두기업인 LG생활건강의 기틀을 닦은 것이다.

구 명예회장은 해외로도 지평을 넓혀서 재임 기간 50여개의 해외 법인을 설립했다. 1982년 미국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세운 컬러TV 생산공장은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의 해외 생산기지였다.

구 명예회장은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투명 경영'을 강조하며 민간기업 최초로 락희화학 기업공개를 실시했다. 그때만 해도 국내 기업이 기업공개를 한 사례가 없었는데 "선진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필수"라는 믿음으로 던진 승부수였다.

1970년 2월 락희화학이 민간 기업 중 국내 최초로 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이어 금성사도 전자 업계 최초로 기업공개를 하며 주력 기업을 모두 공개한 한국 최초 그룹이라는 기록을 썼다. 이후 10년 간 10개 계열사가 기업공개를 단행했다.

1987년 2월 제26차 전경련 정기총회에서 18대 회장에 추대된 구 명예회장(왼쪽)이 정주영 전임회장으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1987년 2월 제26차 전경련 정기총회에서 18대 회장에 추대된 구 명예회장(왼쪽)이 정주영 전임회장으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구 명예회장은 해외 투자를 넘어 해외 기업과의 합작 경영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합작 경영의 근간도 투명 경영과 신뢰였다. 대표적인 예로 1966년 시작한 호남정유와 미국 칼텍스사가 50대50 대등한 비율로 경영을 양분하고, 양측이 수립한 원칙을 지키며 잡음 없이 합작경영을 이어갔다.

총수의 수직적인 리더십에서 벗어나 전문경영인에게 경영 권한을 이양하는 '자율 책임 경영체제'를 확립한 것도 구 명예회장의 공로다.

그는 회장 1인의 의사 결정에 의존하는 관행을 벗어던지고 선진화한 경영 체제를 정착시키겠다는 원칙을 담은 '21세기를 향한 경영 구상'을 1988년 발표했다. 1992년 발간한 저서 '오직 이 길 밖에 없다'를 통해 구 명예회장은 "혁신의 풍토가 한국 기업 전반에 뿌리내려 치열한 경쟁적 토양이 형성될 때 우리나라 기업들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LG의 혁신활동 경험이 경쟁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기업들에 타산지석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구 명예회장은 인재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투영한 'LG인화원'을 1988년 설립했다. LG인화원은 2001년에 영국 파이낸셜타임즈가 선정한 세계 12대 기업 대학에 선정, 기업 교육과정으로서 우수성을 알리기도 했다.

LG그룹은 구 명예회장이 취임한 1970년 매출 260억원에서 1995년 30조원 규모로 약 1150배 성장했다. 구 명예회장은 1995년 1월 럭키금성 명칭을 LG로 바꾼 뒤 장남인 구본무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기고 물러났다

구 명예회장은 1972년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1987년 제18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한 이력도 있다.

구 명예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재임한 1987∼1989년은 우리 사회의 격변기였다. 그는 "시대적 상황에 맞춰 새로운 발전이 요청되는 때"라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 전경련 산하에 '경제사회개발원'을 설립하고 기업 이미지를 개선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구 명예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LG연암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사회공헌활동을 펼치는 한편 자연을 가까이하며 지냈다. 충남 천안 연암대학교 농장에 머무르며 버섯 연구를 비롯해 자연과 어우러진 취미에 열성을 쏟았다.

1995년 2월 회장 이취임식에서 구본무 명예회장(왼쪽)이 고 구본무 회장에게 LG 깃발을 전달하는 모습.
1995년 2월 회장 이취임식에서 구본무 명예회장(왼쪽)이 고 구본무 회장에게 LG 깃발을 전달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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