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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감정정치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5일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국회에서 의결되어 정부로 넘어온 법률안에 대한 대통령 거부권은 헌법(53조)이 규정한 당연한 권리이다. 국회가 본회의에 의결을 거친 후 정부에 선포를 요청한 법률안에 대하여 대통령은 이의가 있을 때 어떤 수정안도 제의함 없이 이의서만을 붙여 국회에 환부하고 그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 국회법 개정안은 정부가 제정하는 시행령이 법률 제정의 취지에 맞지 않을 경우 국회가 수정을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개정안에 대하여 정부와 청와대는 행정권을 침해하며, 위헌소지가 있다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여기까지는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리가 잘 작동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개인적인 보신주의와 당리당략과 끊임없는 당파싸움으로 나라를 뒤흔들어 놓고 부정부패의 원인 제공을 해왔다” “정부와 정부정책에 대해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 비판만을 거듭해 왔다”고 정치권을 싸잡아 비난했다. 대통령의 불쾌함을 드러내는 감정 정치는 대중주의적 선동정치로 이어지면서 “대통령으로 국민이 준 권한과 의무를 국가를 바로 세우고 국민을 위한 길에만 쓸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나섰다. 이 선언은 국회와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국민과 직접 소통하면서 국정을 이끌어 가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박 대통령은 더 나아가서 여당에 대하여도 십자포화를 날렸다. 자신이 당과 후보를 열심히 지원해서 당선시켰는데 돌아온 것은 정치적·도덕적 공허함뿐이라며, 이는 배신의 정치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이제 대통령이라는 무게감을 벗어던지고 개인이 느끼는 정치적 배신에 대한 분노까지 표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감정정치는 정치권 뿐 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혼돈 속으로 빠뜨리고 있다. 여당 원내 대표는 대통령의 심기 경호를 위해 90도 조아리며 사과발언을 했으며, 친박과 비박은 국민과 국정은 뒤로 하고 대통령 감정 추스르기에 여념이 없다. 대통령을 보좌해야할 여당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시각, 그리고 자신에 순응하지 않는 원내대표에 대한 사실상의 퇴출 압박은 정치와 국회를 무력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결국 새누리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국회법 개정안을 재의결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국회는 어떤 조정과 타협의 여지도 없이 물리적 대립의 장이 되어가고 있다. 한마디로 이성을 상실한 국정, 그리고 대통령은 없고 대통령직에 있는 한 개인의 분노만이 울렁거리는 거버넌스 속에서 민주적 국가 체계는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있다.

 

제도적 이성(institutional reason) 회복과 민주주의 체제의 제도화

사회가 다변화되고, 융복합적 구조로 고도화 되면서 국가 거버넌스의 전문화와 선제적 대응, 그리고 이를 위한 입법의 효율화를 위해서 국회가 대통령령, 총리령, 부령 등의 행정입법을 행정부에 위임하게 되었다. 따라서 행정입법은 국가 운영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기하기 위한 입법부와 행정부 사이의 협업과 가교적 성격이 강하다 할 수 있다. 즉, 견제와 균형, 협업을 위한 이성적 결정체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거버넌스 체계는 제도적 이성(Institutional reason)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상호간에 대립과 갈등, 감정적 권력투쟁이 발생한다.

현대 국가가 헌법과 법률에 기반 하는 것은 모든 국가 기구나 그 행위가 합리성과 이성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져야함을 의미한다. 17세기 근대국가가 출현할 당시부터 ‘국가 이성(Reason d'Etat, 혹은 reason of state)’이 비인격적이면서 사회의 전통적 관습과 규범, 종교적 규율들로부터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정치체제로서 그리고 독자적인 행위 양식으로써 성장해왔다. 프랑스어로 시작한 ‘데따(Etat 혹은 State)’로서의 근대국가는 영토와 국민 전체에 행사되는 권력으로, 공공선을 수호하는 역할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이 역할은 근대성의 핵심인 이성적 작동에 기반 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근대성의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국가 이성은 각각의 국가 기관들이 ‘제도적 이성(institutional reason)’을 기준으로 해서 작동할 때 실천적 모습으로 나타난다.

근대국가 이후 서구사회에서 이미 국가 행위의 기본적인 체제로 정착되어 온 ‘제도적 이성’의 상실은 우리 정치사회의 가장 큰 모순구조이자 후진적 정치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박대통령의 감정정치는 이 후진성을 더욱 증폭시키면서 그 후진성에 대하여 온 국민이 깨닫는 계기가 되고 있다. 대통령 스스로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제도가 운용되도록 조정하기 보다는 포퓰리즘과 선동 정치를 앞세우면서 제도를 무력화 시키고, 정치 자체를 부정하는 행동을 취하고 있다. 또한 사적인 정치적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여당을 압박함으로써 의회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후퇴키고 있다.

이번 행정 입법을 둘러싸고 대통령과 국회 간의 갈등은 이성을 상실한 국가 기구들 그리고 권력이 개인의 사적 감정에 따라서 어떻게 불합리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를 온 국민이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대통령이라는 제도적 이성의 실체(status)는 사라지고, 단지 권력을 가지고 있는 한 개인의 감정이 민주적 국가 체계를 뒤흔들어 놓는 모습 속에서 우리가 여전히 전 근대적 군주제를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보게 된다. 헌법을 수호하고 민주주의와 공공의 선을 지키기 위해 최전방에 서야 할 대통령이 오히려 이를 탄압하는 모습은 이명박 정부로부터 이어오는 역사적 퇴행의 연장임을 볼 수 있다. 이 역사적 퇴행을 되돌리기 위해서 우리정치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바로 제도적 이성의 회복이다. 제도적 이성의 회복은 안정적인 민주주의의 제도화에 기여할 것이다.

 

박태순
파리1대학 박사
미디어로드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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