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지식은 권력과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모든 지식은 정치적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인간의 지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변화하는지 탐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각 시대의 앎[知]의 기저에는 무의식적 문화의 체계가 있다고 하였다. 특히 푸코는 부르주아 권력과 형벌제도에 대하여 분석한 《감시와 처벌》에서 법률은 지배계급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며, 인간이 알고자 하는 의지와 이를 억압하는 권력과의 관계를 파헤쳤다. 또한 그는 지식은 권력과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모든 지식은 정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독일 해석학적 언어철학자들에 따르면 언어는 인간 사유의 표현이 아니라 사유의 기관이며 사유는 언어에 의존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사상을 이어받은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는 〈상징적 형식들의 철학〉에서 언어는 객관적인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형성하는 것이며 인간은 언어가 형성해주는 현실만을 알고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언어에 의해 재창조된 세계를 카시러는 상징적 세계라고 했는데 독일 철학자 훔볼트는 일찍이 이것을 중간세계라고 불렀다.

우리 사회에도 어떤 언어의 독자적인 본래의 의미와 다르게 현실 권력을 반영하여 재창조된 언어와 지식이 존재하고 사유의 기관으로서의 언어를 보는 시각 차이에서 접점이 없는 논쟁이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경상도 사나이’, ‘국군 포로 또는 인민군 포로’는 현실 권력을 반영한 언어이고, ‘낡은 진보’, ‘국부’ 논쟁은 언어를 이해하는 인간의 현실적 사고가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사나이’는 사전적으로 ‘한창 때의 젊고 씩씩한 남자’를 이르는 말인데, 왜 한국의 방송 등 언론은 경상도 출신 사람만 사나이라는 멋진 칭호를 붙여줄까? 경상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아무리 어린 사람이라도, 또 초등학교 때부터 프로데뷔 후에 까지도 엄마가 캐디를 하고 있는 속칭 마마보이 골프선수도 사나이가 되고, 다른 지역 사람은 아무리 의리가 있거나 씩씩한 사람도 언론에서 사나이를 붙여주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언어 내지 지식은 정치, 경제 권력과 그에 영향을 받은 문화나 교육권력 또는 언론에 의하여 재창조된 언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언어는 그들에게 아부하려는 언론과 우리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포로는 사전적 의미로 ‘전시 적에게 체포되어 군사적 이유로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비록 6.25. 전쟁 중 북한군에 의해 포로로 잡혔지만 북한에서 결혼을 해서 처와 자식이 있는 사람이 한국에 오면 ‘국군 포로’가 된다. 북한군 출신이 국군에 의해 포로로 잡혔으나 한국에서 결혼해 처자식이 있는데 북한으로 탈출해 북한에서 ‘인민군 포로’라는 칭호를 받는다면 우리 한국인은 용납할 수 있는가? 북한에서 남한으로 오거나 한국에서 북한으로 가면 남북한 모두 법률에 의해 공히 처벌하도록 되어 있다(우리나라의 경우, 국가보안법상 잠입∙탈출죄에 해당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위 두 사람 모두 마음대로 자기 고향 등 원하는 나라로 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포로라고 할 수 있으나 다른 외국에서의 포로 즉 결혼도 못하고 포로수용소에 장기간 구금되어 있는 사람과 다른 면이 있다는 점에서 혹자는 이를 남북한 모두 이들을 영웅으로 만들려는 국가 권력에 의해 재창조된 언어라고 비판한다.

‘낡은 진보’와 최근의 ‘국부’논쟁은 대립하는 양 진영 논자들이 진보와 국부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진보는 사전적으로 보면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 발전을 추구하는 사상’을 말하므로 그 의미로 보면 낡은 진보는 혹자의 말대로 형용모순이다.

그런데 진보와 비슷한 단어로 좌익 또는 좌파가 있다. 좌파는 사전적 의미로 보면 ‘정치 성향 분포에서 우파의 반대편에 위치한 쪽으로,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정치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일컫는다. 즉 자유보다는 평등을 중시하는 정치 입장을 말하기도 한다. 비슷한 말로는 진보주의라고 할 수도 있다.

세계적인 기준에서 볼 때에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와 여성주의(페미니즘)를 좌익으로 본다.’ 그러나 한국에서 좌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편견 때문에 좌파임을 내세우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다. 이에 따라 좌파 = 진보적인 대부분 한국인은 자신을 좌파라고 부르기 보다는 진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공산주의 사회인 구소련이나 중국에서 보았듯이 기존 극좌적인 관념에 사로잡힌 낡은 좌파(고르바초프 등에 비교되는 스탈린 등, 등소평 등에 비교되는 4인방 등)가 존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낡은 진보가 반드시 형용모순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근 정치권의 ‘국부’ 논쟁의 이면에는 친일청산과 해방 후 우리 역사를 보는 시각 차이가 있는 등 여러 정치적, 역사적 고려할 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점을 제외하면 논자들 사이에서 단어에 대한 생각 차이도 존재하는듯하다. 국부(國父)는 사전에서는 ‘많은 국가에서 건국, 독립, 국가의 발전 시기에 활약한 상징적 인물이나 정치인에게 쓰이는 호칭’이라고 한다.

이승만을 국부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전적 의미에 이승만이 부합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국부’라는 단어를 사전적 의미와 다르게 초대대통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해방 후 한국 정부는 물론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기 때문에 이승만을 국부라고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다른 선진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독자적이고 객관적일 것 같은 언어와 지식도 현실 권력 특히 정치와 경제, 문화 권력에 의해 왜곡되어 주관적이고 편파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도 우리들 대부분은 이러한 왜곡된 현실의 언어와 지식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자각을 통해서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관용이 생길 수 있다.

 

 

정 한 중(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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