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인북] 한국은 왜 성장해도 선진국이 못되었나
[뉴스인북] 한국은 왜 성장해도 선진국이 못되었나
  • 김세헌 기자 (betterman89@gmail.com)
  • 승인 2018.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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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6월 지방선거와 개헌을 함께 진행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청와대ㆍ여당과 야당 간의 논쟁이 치열한 모습을 보였다. 새로운 헌법에서 권력 구조만큼 중요한 의제가 있다면 단연 헌법이 지향해야 할 국가의 미래상일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주도로 이뤄졌던 제6차 개헌부터 시작해 현재 제11차 개헌 논의까지 그 토대인 한국 사회의 변함없는 목표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를 모범으로 삼은 ‘선진국 진입’이다. 

<선진국의 탄생: 한국의 서구 중심 담론과 발전의 계보학>은 수십 년째 선진국 문턱 혹은 갈림길에 서 있는 ‘국민 소득 3만 불 국가’ 한국의 지상 목표인 ‘선진국 담론’이 등장한 배경과 이 담론이 사회ㆍ경제적 맥락에 따라 꾸준히 변화해 온 양상을 추적하고 있다. 

이 책은 현대 한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 체제를 지탱한 핵심적인 목표이자 국가적 기치로 운위된 선진국 진입이 박정희 정권 시기의 국내외적 환경 속에서 강화된 서구중심주의와 발전 담론의 결정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 발전 담론을 노골적으로 계승, 확장했던 이명박ㆍ박근혜 정권의 ‘퇴행’을 뒤로 하고, 앞으로 한국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이번 헌법 개정 논의의 핵심이라면, 한국의 오랜 목표였던 선진국의 의미와 그 상(像) 역시 재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정체가 크게 변화할 시간을 앞두고 선진국 담론의 계보를 추적하며, 이 과잉된 혹은 비어 있는 개념의 한계와 새로운 가능성을 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오늘날의 통념과 달리 한국이 처음부터 서구를 기준으로 삼은 발전 담론에 집착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먼저 현재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선진국과 후진국이라는 개념의 의미와 그 사회적 역할을 개괄하면서, 이 두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의 선진국 담론을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배경을 제시한다. 

이어 부국강병과 근대화의 모범으로 자처하는 서구와 일본의 ‘개화ㆍ문명 담론’에 대응해 한국의 ‘탈서구 중심의 문명 담론’이 형성된 과정과 그 의미가 구체화되는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미국과 서유럽의 국가들 그리고 일본이 물질ㆍ군사적으로는 조선(한국)에 앞섰을지라도, 한국과 중국으로 대표되는 동양 문명의 정신ㆍ역사적 수준이 월등하다는 탈서구 중심의 문명 담론은 일제에게 식민 지배를 당하던 한국인들의 민족적 자긍심과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런 탈서구 문명 담론은 광복 후의 이승만 정권이 일방적으로 서구를 추종하는 발전ㆍ공업화 일변도의 경제 정책이 아니라, 당시의 한국 상황에 맞는 농업ㆍ농민 위주의 정책 방향을 모색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1950년대의 한국은 서구를 모범으로 삼은 공업화와 산업화가 아니라, 독자적인 문명ㆍ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각 나라의 고유한 상황에 맞는 발전이 필요하다고 보는 탈 서구 중심의 ‘문명 담론’이 주도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이승만 대통령 연설문을 비롯해 이 책에 실린 다양한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한국과 한국인들의 생활과 교육의 수준 등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열악하므로 일본의 식민 지배 하에서 그들의 발전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개화ㆍ근대화 담론’도 일제 강점기부터 나름의 위상을 점하고 있었다.

서구 국가들과 일본을 사회 진화의 기준으로 삼았던 서구 중심의 문명 담론은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이르러서 ‘발전 담론’과 그 핵심을 이루는 ‘선진국 담론’으로 구체화돼 현재까지 한국 사회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인 통찰 가운데 하나다. 

다음으로 책은 본격적으로 한국 선진국 담론의 탄생과 변화 과정을 밝힌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공업화와 산업화 중심의 경제 성장을 주도했다. 일제 강점기~이승만 정권 시기에 한국 사회의 패권 담론이었던 탈서구 문명 담론이 이 시기부터 서구 중심의 발전 담론으로 전환되고, 더 나아가 구체적인 목표로서 ‘선진국’으로 강조된 것도 이런 정치ㆍ사회적 변화의 결과였다.

경제 성장과 발전을 강조한 선진국 담론은 전 국민의 총력 동원 체제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됐다. 저자김종태는 선진국과 후진국을 비교하며 서구를 중심에 둔 발전과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주창한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문, 그러한 담론의 수용 과정이 잘 드러난 각종 매체의 기사를 풍부하게 분석해 선진국으로 대별되는 발전 담론의 정치적ㆍ대중적 영향력이 증폭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탈서구 중심의 문명 담론에서 서구 중심의 발전 담론으로 패권이 이동하자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보는 관점도 변화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문이 서구나 일본과 다른 한국의 고유한 문명과 그 가치를 강조했다면, 박정희의 연설문은 초가집이 상징하는 빈곤과 나약함을 지닌 한국의 전통은 비판하고 경제 발전과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는 민족적 저력의 재발견을 강조했다.

을지문덕ㆍ이순신 등의 영웅들을 호명하고 숭앙함으로써 전근대성을 타파하고 근대화라는 민족적 사명을 달성해야 한다는 선전에 이용한다. 박정희에게 한국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는 그 자체로 가치 있거나 존중해야 할 대상은 아니었음을, 선진국 담론의 관점에서 설득력 있게 분석한 대목이다. 

이어 박정희 이후 전두환ㆍ김영삼ㆍ이명박 정권 시기의 대통령 연설문과 당시의 언론 보도를 중심으로, 개발 도상국 탈출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등 고도 성장을 구가했던 시기의 선진국 담론이 어떻게 ‘선진국 문턱에 머물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부추기며 기존의 동원 체제를 지속시키는 정치ㆍ사회적 수단이 됐는지 분석한다.

이미 1980년대 초부터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과 한국ㆍ싱가포르 등의 개발 도상국 간 무역 갈등이 표면화되고, 글로벌 스탠더드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가 한국에도 압력 수단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서구 중심적인 선진국 담론 역시 기존의 발전 중심적 성격과 국제주의가 결합됐다.

한국 경제가 더 성장해서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려면 국제적 기준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기존 선진국의 추세를 충실히 따라야만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주장은 이 무렵부터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 

여전한 선진국 담론의 틀 속에서 한국의 정체성은 아직까지도 ‘잘살지만’ 선진국에는 미치지 못하는 나라에 머물러 있다. 이렇게 결핍된 국가 정체성 인식은 기존의 선진국과 중국으로 대표되는 신흥 후발 국가 사이에 끼어서 자칫하면 다시 후진국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주문처럼 불러온다.

박정희의 근대화에 대응되는 김영삼의 세계화나 이명박의 선진화 구호의 명분은 선진국 문턱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한다는 이 주문의 반복이었다. 저자는 결국 이러한 구호들이 기존의 선진국 담론과 같은 동원 체제를 유지하거나, 당면한 정세를 타파하고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정략적 수단으로써 제기됐다고 분석한다.

여전히 선진국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한국의 자아 인식은 실제의 경제적 발전 지표나 국제적 위상과 별개로, 기존의 선진국 담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적 지향점을 도출하지 못한 결과에 가깝다. 이제 더 발전하고 더 성장하고 더 경제적으로 팽창한 나라가 우리가 지향하는 선진국의 핵심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저자는 이제 한국이 “각자가 행복한 선진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앞으로의 선진국은 사회 구성원들의 지향이 서로 타협하고 조화를 이뤄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개별적으로 존중하는 성숙한 국가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기존 선진국 담론이 발전주의자들, 진보와 보수를 망라한 정치인들의 선전 수단에 가까웠다면 이제 선진국 담론은 한국 사회 구성원 각각의 삶이 좀 더 구체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을 찾는 폭넓은 논의의 마당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발전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 오늘, 다기한 국제 정치ㆍ인권ㆍ환경ㆍ과학ㆍ노동ㆍ교육ㆍ복지의 과제 속에서 ‘발전 없는’ 선진국의 새로운 상상력을 찾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은 일본에 대해 역사ㆍ영토 인식 문제와 ‘잃어버린 20년’으로 지칭되는 경제 버블 불황을 들어 서구 선진국과 같은 반열에 두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중국에 대해서는 정치ㆍ사회적으로 다른 선진국과 같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면서도 급격한 경제 성장과 막강한 국제적 영향력을 이유로 다른 개발 도상국보다 우월한 국가(대국)로 인식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선진국ㆍ후진국 등의 개념을 공유하는 한국ㆍ일본의 발전 담론과 발달 국가ㆍ발전 중 국가ㆍ최불발달 국가 등 여러 개념으로 논의되는 중국발 발전 담론을 비교ㆍ분석한 부분도 주목해 읽어볼 가치가 있다. 

현 문재인 정부의 새로운 상상력이 실제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큰 공감을 얻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시민 저마다가 사람의 존재 가치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계기가 된다면 발전에 대한 이 사회의 상상력은 더 커질 것이며, 그만큼 한국은 각자가 행복한 선진국에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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