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이중환율제 고집하다 깊은 수렁에
마두로 대통령 "시도해 온 생산모델 실패"
한달 임금으로 달걀 두 판...국민 탈출 러시
베네수엘라 경제파탄이 꼭 포퓰리즘 탓일까?

가채 매장량이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많은 5,000억 배럴(미 국립지질조사국)에 이르고, 단위면적 당 원유 매장량은 세계 1위를 자랑하는 나라, 땅 밑에 넘쳐나는 원유 때문에 수시로 유증기를 빼주지 않으면 마을 한가운데서 느닷없는 폭발이 일어나는 나라, 한때 오일 머니로 중남미를 호령했던 자원부국 베네수엘라가 망하고 있다.

이를 두고 보수 진영 일각에서는 인기영합주의 경제정책(포퓰리즘)의 결과라며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특히 소득주도성장과 연결시키면서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스트레이트뉴스는 베네수엘라 경제파탄의 원인이 포퓰리즘이라는 주장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베네수엘라 경제가 걸어온 발자취를 추적해본다.<편집자주>

<목차>

① 외환거래 중단... 차베스 실책이 파탄 불렀다  
② 잇단 실정에 지옥문 열린 국가경제  
③ 베네수엘라 경제와 한국의 소득주도성장

“지금까지 우리가 시도해 온 생산모델은 실패했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지난달 말 집권여당인 통합사회주의당(PSUV) 의원총회에서 경제정책 실패를 인정했다.

경제 관계 장관회의 도중 100 볼리바르 신권을 설명 중인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2018.03.23)
경제 관계 장관회의 도중 100 볼리바르 신권을 설명 중인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2018.03.23)

베네수엘라에서는 한 달 내내 일해서 받은 임금으로 구입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달걀 두 판뿐이다. 종이공예품을 만들어 생계를 꾸리는 사람은 필요한 종이를 사는 데 지폐가 더 많이 들어 아예 지폐로 공예품을 만든다.

지난 18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자국통화 볼리바르를 10만분의 1(95~96%)로 액면 절하(devaluation)한 새 통화 ‘볼리바르 소베라노’를 도입하며 화폐개혁까지 단행했지만, 망아지처럼 날뛰는 물가는 잡히지 않는다. 다음 달부터 시행되는 최저임금 3,000% 인상도, 휘발유 가격 인상도 역효과 우려만 가중시키고 있다.

배고픔에 매일 수천 명씩 국경을 넘던 난민은 200만 명을 넘어선 지 오래다. 극심한 기아와 약탈, 범죄에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가운데, 부자들은 돈 보따리를 싸들고 스페인 등 해외로 탈출하고 있다.

지난달 29일자 뉴욕타임즈(NYT) 보도에 따르면, 스페인에 거주하는 28만 명의 베네수엘라인 중 최근 2년 새 유입된 인구가 14만 명을 넘어섰다. 그중에는 수도 카라카스에서 시장을 지낸 안토니오 레데스마씨도 포함돼 있다. 지금도 가난한 자는 국경으로, 부자는 해외로 향하는 ‘엑소더스’가 이어지고 있다.

베네수엘라가 포퓰리즘 때문에 망했다는 주장

야당을 중심으로 베네수엘라 경제파탄을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특히 소득주도성장과 연계시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베네수엘라 경제가 파탄 난 것은 포퓰리즘의 결과다. 정부가 소득을 보전해주는 정책은 가능하지 않다. 그리스와 베네수엘라를 보면 모르겠는가. 소득주도성장은 지속가능하지 않으니 하루빨리 폐기하고 기업 중심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

“포퓰리즘 정책으로는 안 된다. 석유 부국이다 보니 막 퍼주는 정책을 시행했고, 그래서 국민정신 자체가 포퓰리즘에 길들여졌다. 문재인 정부는 헛발질 정책만 하고 있다. 전경련을 짓누르고 대기업 회장들을 구속시켜 경제가 살아날 수 없다.”

베네수엘라 경제파탄과 文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을 연결시키는 정치인들(왼쪽부터 자유한국당 김문수 전 의원, 심재철 의원, 민주평화당 장병완 의원)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베네수엘라 경제파탄과 文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을 연결시키는 정치인들(왼쪽부터 자유한국당 김문수 전 의원, 심재철 의원, 민주평화당 장병완 의원)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베네수엘라 경제위기는 좌파 진보적 사고를 가진 정치인들이 분배에만 초점을 맞추다가 발생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 높이는 것만 알았지 기업이 도산하는 것은 몰랐다. 그래서 고용동향 쇼크가 왔다. 소상공인과 저소득층 근로자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소득주도성장은 폐기해야 한다.”

맞는 말일까? 결과에 대한 진단은 대체로 맞지만, 세부적으로는 틀린 부분이 적지 않다. 베네수엘라 경제파탄의 직간접적인 원인들을 간과한 탓이다.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려면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시절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첫 번째 실정 : 우고 차베스의 엉터리 외환정책

경제파탄의 직접적인 원인은 ‘자원 부국’이라는 천혜의 혜택에 안주했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 경제는 총수출의 96%를 원유 수출에 의존해왔다. 한때 곡물 잉여생산국이었지만, 유가가 고공행진을 거듭하는 터라 농업에 종사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식료품과 의약품, 생필품도 모두 수입하면 그만이었다.

석유가 지배하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베네수엘라 시민들은 한두 해 걸러 한 명씩 미스 유니버스를 배출하는 아름다운 성형의 나라가 됐다.

룰라 다 실바 전 브라질 대통령과 함께 세계 좌파 인사들의 호평을 받아온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이 1998년 집권한 이후에도 평화는 계속됐다. 그러나 차베스 정권이 집권 2기에 들어선 2003년 들어 베네수엘라는 경제파탄을 향한 첫 번째 발걸음을 내딛었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자료:invent-the-future.org)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자료:invent-the-future.org)

2003년, 차베스 대통령은 외환보유고를 확보하기 위해 특단의 정책을 내놓았다. 환전, 즉 외환거래를 전면적으로 중단하는 정책이었다. 외환거래를 중단한다 해도 완전한 통제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차베스 정권은 고정환율제를 도입해 달러 유출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했다. 거기에 국내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수입품에 한해 고율의 환율을 적용하는 이중환율제까지 도입했다.

원유 수출 의존도가 극심한 산업구조를 개편하겠다는 차베스 정권의 판단은 옳았다. 그러나 생산과 유통 기반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정 및 이중환율제부터 서둘러 도입한 것은 돌이키기 어려운 패착이었다.

고정 및 이중환율제가 도입되자마자 생필품 편중현상이 심화되면서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수입 억제 정책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인플레이션의 골이 깊어지는 시점, 물가안정대책이 시급했다. 고정 및 이중환율제를 폐기하기만 해도 상황은 어느 정도 수습될 수 있었다.

콜롬비아 국경 인근 석유 밀거래 현장 (자료:vice)
콜롬비아 국경 인근 석유 밀거래 현장 (자료:vice)

그러나 차베스 정권이 선택한 대책은 엉뚱하게도 국내 기름값 인하였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이유가 수입 억제 정책에 의한 생필품 부족이었음에도, 국내 문제로 해결하려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국내적인 기름값 인하가 국제교역 탓에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는 없었다. 차베스 정권은 기름값을 지속적으로 인하했지만, 고삐 풀린 물가는 전혀 잡히지 않았다.

차베스 정권이 펼친 헛다리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콜롬비아였다. 생산 기반이 부족한 데다 물가까지 급등하는 현실에서, 일거리를 찾지 못한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싼 기름을 콜롬비아 국경에 내다파는 석유밀거래로 생계를 꾸려갔다.

2013년 당시 베네수엘라 국내 기름값은 리터당 10원, 50리터를 주유해도 500원이면 승용차 기름탱크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수준까지 내려가 있었다. 콜롬비아 당국은 승용차에 석유를 싣고 입국하는 베네수엘라인들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차베스 정권의 첫 번째 실정은 차베스가 사망하고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이 탄생한 2013년까지 국내경제를 지속적으로 갉아먹으며 베네수엘라를 파탄으로 이끌었다.

김태현bizlink@hanmail.net

후속기사 [ST기획-베네수엘라②] 잇단 실정에 지옥문 열린 국가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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