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적 경제구조 개편에 무관심했던 마두로 정권
하이퍼-인플레이션 부른 화폐량 증대정책
국가경제를 수렁에 빠뜨린 통제정책과 그릇된 현실인식

가채 매장량이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많은 5,000억 배럴(미 국립지질조사국)에 이르고, 단위면적 당 원유 매장량은 세계 1위를 자랑하는 나라, 땅 밑에 넘쳐나는 원유 때문에 수시로 유증기를 빼주지 않으면 마을 한가운데서 느닷없는 폭발이 일어나는 나라, 한때 오일 머니로 중남미를 호령했던 자원부국 베네수엘라가 망하고 있다.

이를 두고 보수 진영 일각에서는 인기영합주의 경제정책(포퓰리즘)의 결과라며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특히 소득주도성장과 연결시키면서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스트레이트뉴스는 베네수엘라 경제파탄의 원인이 포퓰리즘이라는 주장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베네수엘라 경제가 걸어온 발자취를 추적해본다.<편집자주>

<목차>
① 외환거래 중단... 차베스 실책이 파탄 불렀다
② 잇단 실정에 지옥문 열린 국가경제
③ 베네수엘라 경제와 한국의 소득주도성장

국경을 넘는 난민이 230만 명, 자국통화인 볼리바르를 96% 액면절하(devaluation)하고 최저임금을 3,000%나 인상할 수밖에 없는 살인적 인플레이션, 극심한 기아에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고 야채를 찾기 위해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중산층, 그리고 약탈과 범죄, 폭력시위가 일상이 된 무법천지, 중남미 석유부국 베네수엘라가 처한 현실이다.

비쩍 마른 도심의 개(자료:dailymail)
비쩍 마른 도심의 개(자료:dailymail)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지금까지 시도해 온 베네수엘라식 생산모델의 실패를 인정한 가운데, 지금 이 순간에도 부자들은 스페인으로, 가난한 자들은 국경으로 향하는 ‘엑소더스’가 이어지고 있다.

2014년, 재앙으로 돌변한 기형적 경제구조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이 집권한 1998년 당시, 베네수엘라의 산업구조는 총수출의 96%를 석유에 의존하는 기형적 구조였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산업구조 개편이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차베스 전 대통령은 기형적인 산업구조를 개편하는 대신 농업생산기반시설을 해외자본에 팔아넘기고 경・중공업을 등한시하면서 무상교육, 무상의료, 저가주택 공급 등 분배에 초점을 맞춘 복지정책을 확대했다.

석유 부국의 몰락(자료:lepeuple)
석유 부국의 몰락(자료:lepeuple)

원유 수출 의존도가 극심한 산업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 국내 산업을 발전시키고 외화 유출을 막기 위해 외환거래를 전면 중단하고 수입 생필품에 고율의 환율을 적용하는 이중환율제까지 도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산 및 유통 기반이 태부족한 상황에 수입 억제를 위해 도입된 이중환율제는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정책이 먹혀들지 않자, 차베스 정권은 국내 기름값을 지속적으로 인하했지만, 인플레이션은 잡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2013년 국민총생산(GDP)이 12,000달러를 상회하는 등 국가경제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원유라는 화수분 덕분이었다.

기형적 산업구조로 인해 문제가 터진 것은 2014년이었다. 경제 붕괴의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서고 있었음에도, 2013년 차베스 사망 직후 집권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역시 중장기적 산업구조 개편에 무관심했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2014년이 되자,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며 각종 원자재를 빨아들였던 중국의 발전 속도가 뚝 떨어지면서 유가가 급락하기 시작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서둘러 감산에 나섰지만, 하락세를 막을 순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베네수엘라의 최대 석유 수출국이던 미국이 수입을 줄이고 본격적인 셰일가스 개발에 나서면서 유가 폭락을 부채질했다. 셰일가스 외에 수소, 전기, 바이오 등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대체에너지 개발 붐과 전기자동차 상용화도 유가 폭락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배럴 당 160달러는 돼야 균형재정을 유지할 수 있지만, 유가가 배럴 당 30~50달러까지 폭락하자, 베네수엘라 경제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두 번째 실정 : 살인적 인플레이션 부른 화폐량 증대정책

차베스 전 대통령의 외환거래 중단과 이중환율제 탓에 2013년 기준 베네수엘라의 물가상승률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53%까지 솟구쳐 있었다. 유가 폭락이라는 초대형 악재가 덮쳤음에도, 베네수엘라에는 완충 역할을 할 만한 산업이 거의 없었다.

석유 외에 생산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맞은 유가 폭락으로 재정이 급격히 고갈됐다. 당장 취할 수 있는 정책은 복지 축소였지만, 마두로 정권이 택한 정책은 복지 축소가 아니라 화폐량 증대였다.

베네수엘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 실태(두루마리 휴지 한 롤을 사려면 휴지보다 더 많은 지폐가 필요하다)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베네수엘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 실태(두루마리 휴지 한 롤을 사려면 휴지보다 더 많은 지폐가 필요하다)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재정이 부족할 때, 달러, 엔, 스위스 프랑 등 기축통화나 안전통화를 보유한 국가는 자국 화폐량 증대에 나서더라도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위험성이 그리 높지 않다. 재정부족 현상을 화폐량 증대로 방어한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2008년 이후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시중에 막대한 달러를 뿌려댄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다.

베네수엘라 통화인 볼리바르는 기축통화도 안전통화도 아니라서 화폐량을 늘릴 경우 하이퍼-인플레이션 위험성이 매우 높았다. 그럼에도 마두로 정권은 화폐량 증대에 나섰고, 잘못된 정책은 결국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2013년 53%였던 물가상승률은 2014년 62%, 2015년 141.5%, 2016년 700%를 찍고도 멈추지 않았다. 2017년에는 13,800%를, 올해 6월에는 무려 46,306%를 기록했으며,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말에 100만%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상했다.

지폐를 카트에 가득 담아 이동하는 베네수엘라 상인(자료:zerohedge)
지폐를 카트에 가득 담아 이동하는 베네수엘라 상인(자료:zerohedge)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의 엉터리 외환정책에 이은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화폐량 증대정책 탓에, 지폐는 화장실용 두루마리 휴지보다 못한 신세로 전락했다. 종이를 사서 공예품을 만들어 파는 상인들은 종이보다 더 싼 지폐로 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계란 두 판을 사려면 한 달 치 봉급을 부대에 담아가야 한다.

세 번째 실정 : 잘못된 가격 및 생산 통제 정책

베네수엘라는 기업의 자유도가 극히 낮은 국가계획주의 경제시스템을 운용하고 있다. 국가가 나서서 기업의 가격을 통제하고 각종 보조금을 지급한다. 이 시스템 또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도래한 배경 중 하나다.

차베스 정권 당시에도 일부 품목에 대해서는 배급제가 실시됐고, 식료품, 화장품 등 50여 개 품목에는 가격 상한선이 설정돼 있었다. 차베스 전 대통령 사망 이후, 베네수엘라 국회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에 경제를 제어할 수 있는 초법적 권한을 부여했다.

마두로 정권은 2013년 말부터 쇼핑센터와 전자상가 등에 대규모 세일을 지시하는 등 시장 구석구석에 개입했고, 가동할수록 손실이 발생하는 통에 생산을 중단하는 공장에 대해서는 사업주를 구속하는 등 생산통제 정책도 시행했다.

국가가 시장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오래전에 사라진 마당에, 마두로 정권은 국가계획주의 경제시스템을 전혀 손보지 않은 채 보다 강력한 통제정책을 시행함으로써 가뜩이나 탈출구가 없는 국가경제를 아예 나락으로 떠밀어버렸다.

네 번째 실정 : 그릇된 현실 인식

“저는 오늘부로 사직하겠습니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한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담배 한 갑뿐이기 때문입니다.”

2016년 말, 베네수엘라 국영방송 앵커가 생방송을 진행하던 도중 한 발언이다. KBS나 MBC 9시 뉴스 앵커가 이런 발언을 했다고 상상해 보면, 베네수엘라 경제가 얼마나 엉망인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기름 밀거래가 성행하는 시몬볼리바르 다리 인근(자료:columbiareports)
기름 밀거래가 성행하는 시몬볼리바르 다리 인근(자료:columbiareports)

당시 한 달에 두어 번 국경으로 가서 리터 당 10원에 산 기름을 20원에 파는 택시운전사가 변호사나 아나운서 등 화이트칼라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기름 외에 생산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차베스 정권의 국내 기름값 인하 정책 탓에 물보다 더 싸진 기름을 콜롬비아로 내다파는 것뿐이었다.

2015년 말경 이미 75%를 넘어선 엥겔계수는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지표가 됐다. 한때 중산층이었던 국민들은 먹다 남은 음식을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비둘기와 길고양이, 유기견은 배고픈 인간에게 사냥 당했고, 동물원에 있던 동물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먹거리를 찾을 수 없어 전 국민의 평균 몸무게는 11kg 이상 감소했다(2016년).

쓰레기를 뒤지는 베네수엘라 중산층 여성(자료:dailymail)
쓰레기를 뒤지는 베네수엘라 중산층 여성(자료:dailymail)

급기야 마두로 정권은 식량 생산을 위해 ‘전 국민 60일 강제노동 동원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농기계는 녹이 나 쓸 수 없었고, 비료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풍족한 원유에 취해 식량주권을 내팽개친 결과였다. 기존의 식량 유통망이 무너지자, 마두로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식량을 배급하기도 했다.

2018년 현재, 생활고에 찌든 학생들과 교사들은 학교로 갈 수 없다. 간다 해도 교재와 분필이 없다. 공교육이 파산한 상태다. 병원에서는 전기가 끊겨 X선 촬영을 못하고, 항암제는 암시장에서도 살 수 없다. 산소통이 없어 구급차에서 환자가 사망하고, 피가 엉겨 붙은 수술실은 도살장을 방불케 한다. 의료서비스 역시 무너진 상태다.

의료서비스 체계가 무너진 베네수엘라 병원(환자들이 더러운 바닥에서 진료를 받고 있다)(자료:theconsul)
의료서비스 체계가 무너진 베네수엘라 병원(환자들이 더러운 바닥에서 진료를 받고 있다)(자료:theconsul)

독일 항공사 루프트한자의 베네수엘라 취항 중단(2016년 5월 30일) 이후 해외기업들은 대부분 철수한 상태다. 베네수엘라 정부의 자본 유출 통제 정책 탓에 수익금을 가지고 나올 수 없는 상황에 계속 머물 외국기업은 없기 때문이다. 기업과 국민 가릴 것 없이 ‘베네수엘라 엑소더스’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베네수엘라 경제가 파탄 난 이유는 원유 수출에 의지한 기형적 경제구조, 열악한 생산기반, 고유가에 기대 무분별하게 늘린 재정지출, 통제장치 없는 생필품 수입장려책, 수입장려책에 따른 외화 유출을 막기 위한 외환거래 중단 및 이중환율제, 대책 없는 식량주권 포기, 살인적 인플레이션을 부른 화폐량 증대 등에 따른 것이다.

정부군과 시위대의 충돌 현장(자료:colombiaopina)
정부군과 시위대의 충돌 현장(자료:colombiaopina)

우회로 없는 베네수엘라 경제가 사회주의 국가계획경제의 대실패 사례로 기록될 전망이지만, 핑계는 있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자국 경제가 파탄 난 이유를 미국의 경제제재(미 제국주의 침공), 미국-유럽 간 무역전쟁, 엘니뇨에 따른 지구온난화 등으로 돌리고 있다.
김태현bizlin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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