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연재-보이지 않는 경제학] 〈48〉'빅쇼트', 월가를 발가벗기다
[ST 연재-보이지 않는 경제학] 〈48〉'빅쇼트', 월가를 발가벗기다
  • 현재욱 선임기자 (jeffhyun@naver.com)
  • 승인 2019.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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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무한 이윤획득에 의해 세계 경제는 불균등하고 불공정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힘이 거세지면서 각종 모순적 요소가 심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선 현대 경제의 중요한 쟁점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쟁점들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논쟁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 몰라도 무방한 것들이 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경제학 논쟁이 경제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정책은 보통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경제의 주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본지 선임기자 현재욱의 저작인 「보이지 않는 경제학」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보이지 않는 경제학

 

빅쇼트〉, 월가를 발가벗기다

현대 금융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를 고르라면 나는 책도 논문도 아닌 영화 한 편을 선택하겠다. 2015년에 개봉한 〈빅쇼트〉라는 영화다. 이 영화의 감독이자 각본 작업에도 깊숙이 관여한 애덤 매케이Adam McKay는, 이른바 ‘최첨단 금융공학’의 산물인 월가의 투자기법을 최대한 알기 쉽게 전달하려고 여러 곳에 내레이션을 집어넣었다.

특별출연한 여배우 마고 로비Margot Robbie는 거품목욕을 하면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이 양산된 배경을 설명한다. 세계적인 셰프 앤서니 보데인Anthony Bourdain은 부실채권이 새로운 금융상품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신선도가 떨어진 생선을 버리지 않고 해물스튜에 넣는 비법을 주방에서 직접 보여준다. 그럼에도 보통 사람들이 이 영화를 한 번 보고 월가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의 스토리텔링을 따라가려면 펀드fund, 채권bond, 파생상품derivatives, 공매도short selling, 신용부도스와프CDS, 주택저당증권MBS, 부채담보부증권CDO 등의 전문용어와 금융상품을 꿰고 있어야 한다. 처음
접하는 사람은 머리가 어질어질하겠지만 알고 보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차근차근 돌파해 보자.

영화의 주역이랄 수 있는 4명의 천재. 그들의 직업은 펀드 매니저 혹은 채권 트레이더다. 펀드 매니저는 투자자들의 돈을 모아 굴려서 수익을 내고, 그렇게 불린 수익을 투자자들에게 돌려주는 일을 한다. 물론 손해가 날 수도 있고, 그 손해는 투자자들이 떠안는다. 채권 트레이더는 채권을 사고파는 일을 전문으로 한다.

채권에 대해서는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순간, 당신은 빚을 갚을 의무가 있으므로 채무자債務者가 되고 은행은 빚을 받을 권리가 있으므로 채권자債權者가 된다. 당신과 은행 사이에 채무-채권 관계가 성립했음을 증빙하는 서류가 바로 채권債券이다.

‘채권자’의 권과 ‘채권’의 권이 다른 한자임을 주목하기 바란다. 전자는 ‘권리’를 뜻하고 후자는 ‘문서’라는 뜻이다. 문서, 다시 말해 종이쪼가리다. 빚 문서를 사고판다? 그렇다. 빚 문서가 팔리는 순간 빚을 받을 권리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 추상적 권리를 사고파는 채권시장은 현대 금융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그 전에 먼저 ‘증권證券, securities’이란 개념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다. 보통 증권이라고 하면 주식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데, 주식은 증권의 한 종류일 뿐이다. 재산가치가 있는 모든 문서를 통틀어 증권이라고 한다. 좀 더 전문적으로 풀이하면 증권은 ‘재산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법적으로 증명하는 문서’다.

“아이고, 나는 증권 따위에는 관심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증권 없이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주식, 채권은 물론이고 수표, 어음, 화물상환증도 증권이다. 우표, 문화상품권, 승차권, 영화 티켓도 증권의 일종이다. 증권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전 세계에 퍼져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돈도 일종의 증권이다. 만 원짜리 지폐를 보자. 앞면에 세종대왕의 초상이 있고 뒷면에는 장영실이 만들었다는 혼천의가 그려져 있다. 세종대왕이 훌륭한 업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가로 148mm, 세로 68mm의 종이쪽에 만 원의 가치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이 돈의 가치를 보증하는 것은 한국은행 총재의 직인이다. 그러니까 액면가 만 원짜리 지폐는 ‘시장에서 만 원의 가격이 매겨진 재화나 서비스와 교환할 수 있음’을 한국은행이 보증하는 문서, 즉 한국은행이 발행한 증권이다.

금융시장은 세상의 모든 증권이 거래되는 곳이다. 채권이 거래되는 곳을 따로 떼어서 채권시장, 주식이 매매되는 곳은 주식시장, 화폐를 사고파는 시장은 외환시장, 이자를 흥정하는 시장은 자금시장이다.

그런데 월가의 금융기술자들은 주식, 채권, 화폐를 기본 재료로 삼아 이리 섞고 저리 쪼개고 다시 융합하고 변형해서 다양한 금융상품을 만들어냈다. 이것을 ‘파생금융상품Financial Derivatives’이라고 하는데, 그
종류와 거래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어느 정도 금융을 안다고 해도 월가의 투자은행들이 취급하는 금융상품을 두루 꿰기는 힘들다. 파생상품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은행 직원의 권유로 덜컥 투자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역외펀드 선물환 계약으로 피해를 본 투자자 490명이 국민은행, 신한은행, 외환은행 등 펀드 판매사와 운용사를 상대로 소송을 건 사례도 있다. 당시 투자자들은 평균적으로 원금의 78퍼센트를 잃었다.

영화 〈빅쇼트〉에서 냉소적인 펀드 매니저 마크 바움(스티브 커렐 분)은 아내와 통화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곳은 전쟁터야. 당신은 몰라. 온갖 사람들이 대놓고 사기를 치는데 다들 너무 태평하다고. 전부 사기 당하고 있는데 사람들 머릿속엔 야구 생각뿐이야.” 사기? 영화적 과장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이, 실제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있기 직전에 월가의 많은 투자은행이 고객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심지어 S&P, 무디스Moody's Corporation, 피치Fitch Ratings Inc. 같은 신용평가기관은 모기지론의 위험을 은폐하거나 복합파생상품의 신용도를 과도하게 높게 평가했다. 사기가 아니라면 무능력의 극치다. 영화는 월가의 불편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 이 연재는 스트레이트뉴스가 저자(현재욱)와 출판사(인물과사상사)의 동의로 게재한 글입니다.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