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서양철학의 양대 물줄기를 하나로 합쳐」
「그가 ‘합침’에 사용한 도구는 지성의 형식」
「한국정치의 지성형식은 찌질한 잡탕에 약육강식과 국민 태만」
「칸트가 던지는 이번 총선의 케치프레이즈는 ‘자폐 되돌아보기’」

지난번 칼럼에 등장했던 독사DOXA 때문에 꽤나 시끄러웠다. 그런데 국민들, 즉 파라독사들만 시끄러웠을 뿐, 정작 손들고 무릎 꿇고 있어야 할 독사들은 침묵했다. 그래서 조금 더 강도를 높일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누가 제기했냐고? 김태현이라는 독사가...

▲ 칸트 ⓒlifeboat.com

칸트Kant, Immanuel, 떠올리기만 해도 오금과 뇌리가 동시에 펄떡이는 이름이다. 오금이 펄떡이는 이유는 ‘엇, 혹시 철학자 아냐?’ 하는 ‘굶식 같은 미식거림’ 때문이고, 뇌리가 펄떡이는 이유는 ‘아, 많이 들어본 이름. 근데 난 아는 게 없잖아.’ 하는 반복되는 ‘자기 게으름’에 대한 지겨움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자. 저 하늘 위를 비행하던 칸트 역시 나에 의해 이 땅으로 내려올 테니까. 그렇지만 염려는 하자. 그의 눈에 비친 작금의 정치 현실을.

칸트는 뭐하는 인간?

칸트는 철학한 인간이다.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를 전후해 철학한 인간이 어디 한둘이랴 마는, 꼬부랑 가발을 뒤집어쓰고 18세기를 살다 간 이 사람의 사고를 넘어설 이는 지금도 없다. 왜? 이유가 있다. 그의 생각이 헤겔, 포이에르바흐를 거쳐 마르크스로 이어져서가 아니다. 2,000여 년 동안 싸워왔던 서양철학의 양대 물줄기를 일거에 하나로 합쳐버렸기 때문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87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 정치는 ‘정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독사들의 전쟁터였으며, 서로 잡아먹지 못해 바둥거리던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게 고작 30년도 안 된다. 그런데 그는 2,000여 년을 묵은 독사 두 마리를 도대체 무슨 수로 합쳤을까?

▲ 우리, 같은 종 맞는 거야? ⓒpbase.com

한국의 현실정치를 비판할 수 있는 도구를 얻기 위해 잠시 과거로 돌아가 보자.

진리眞理라는 게 있을까 없을까? 이 질문은 철학의 시작이며, 다양한 답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며 ‘있다’로 기울었고, ‘있다’는 답은 ‘무조건 있다’와 ‘이성적으로 있다’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그게 바로 존재론存在論과 인식론認識論이다.

존재론과 인식론은 ‘진리는 없당께.’, ‘진리가 있으모 뭐할 끼고 없으모 또 우짤 낀데?’, ‘지는 몰러유.’, ‘진리요? 여긴 청량리거등요.’ 등 다른 모든 담론을 집어삼키며 무럭무럭 성장했다.

그렇게 성장한 진리에 대한 담론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면으로 충돌한 ‘중세 보편논쟁’을 거치면서 ‘실재론’과 ‘유명론’으로, 다시 근대의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발전해왔다.

▲ 너 이놈아, 진리는 하늘에... & 스승님, 하늘 아니고 땅이거든요... ⓒpreceden.com

무슨 론, 무슨 론 하니까 엄청 거창해 보이지만, 합리론과 경험론은 결국 ‘진리가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진리를 ‘이성으로 알 수 있다’는 진영과 ‘경험으로 알 수 있다’는 진영의 싸움일 뿐이다.

합리론의 대가는 데카르트Descartes, Rene다. 그는 미친 듯이 생각해 들어가다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각성으로 진리의 존재 증명을 시도했다. 그런데 베이컨Bacon Francis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하면서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진리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두 독사를 합친 칸트의 방식

귀머거리와 봉사가 있다. 귀머거리는 볼 수 없고, 봉사는 들을 수 없다. 두 사람 앞에 아리따운 여인이 나타난다. 나이가 스무 살 남짓한 그 여인은 뒷모습 걸음걸이 하며 몸맵시 틀림없는 저 누구라 할까...^^ 설현 쯤? 아님 소피 마르소?

아무튼 두 사람은 그 여인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냄새라는 공통점을 빼고 보면, 귀머거리는 눈으로 규정하고, 봉사는 귀로 규정할 것이다. 두 사람이 규정하는 그 여인은 같을까? 당연히 다르다. 시각과 청각은 엄연히 다른 신호를 뇌에 보내기 때문이다.

▲ 헬렌켈러 왈, “니들이 날 알어...?” ⓒhelenkellerfoundation.org

그럼 그 여인을 규정하는 주체는 무엇일까? 뇌다. 그래서 봉사에게 그 여인은 무지막지하게 못생긴 여인일 수 있고, 귀머거리에게 그 여인은 굵직한 성대의 소유자일 수 있다. 결국 그 여인은 귀머거리와 봉사의 생각, 즉 관념 속에만 존재한다. (설마 헬렌켈러가 아는 장미와 당신이 아는 장미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래서 칸트는 귀머거리와 봉사 모두를 ‘자폐아’라고 불렀다.

눈 코 귀 모두 가진 우리는 어떨까? 그 여인을 아는 사람과 처음 본 사람의 생각은 분명 다르다. 그냥 아는 사람과 속속들이 아는 사람의 생각 역시 다르다. 그래서 우리 역시 칸트가 보기에는 싸그리 ‘자폐아’들이다.

▲ 모든 인생은 자폐 ⓒflickr.com

여기까지 보면 모든 인간이 각자의 관념을 갖고 있으니 개판 같은 세상이 된다. 마치 경험론이 이긴 것만 같다. 그러나 칸트는 “모든 인간의 사고구조는 비슷하다”는 말로 그 개판에서 합리론을 구해냈다. 그 여인이 설현이든 소피 마르소든, 비슷한 뇌와 사고구조를 가진 인간들에게는 모두 미인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귀머거리가 듣는 여인과 봉사가 보는 여인은 이렇게 칸트의 관념론을 빌어 비로소 한 사람의 미인이 된다.

독사들이 뭉치는 이유, ‘판단형식’에 있다

그가 말한 ‘비슷한 사고구조’의 다른 말은 ‘판단형식’이다. 판단형식은 내가 무엇인가를, 또는 누군가를 판단할 때 발동하는 일정한 형식을 말한다. 그 형식에는 ‘감성형식’과 ‘지성형식’, 두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노숙자를 볼 때 감성을 발동하는 사람은 “불쌍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지성을 발동하는 사람은 “잉여인간이로군.” 하는 반응을 보이는 식이다. 우리는 이처럼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형식을 통해 유대감을 갖고 무리를 형성한다. 독사 무리와 파라독사 무리가 탄생하는 것이다(독사와 파라독사가 궁금하면 앞글 읽고 오세요).

▲ 날 판단해 봐... ⓒjackmovemag.com

탄생한 독사 무리와 파라독사 무리들은 동일한 거지를 두고 “밥을 못 먹었을 테니 불쌍하다”는 둥, “게을러서 저러고 있으니 그냥 놔두자”는 둥, 자신들만의 독毒을 피우며 다른 무리를 배척한다. 그들은 어떤 판단형식을 공유하기에 끼리끼리 뭉치는 것일까?

정치에 감성의 영향은 그리 크지 않으니, 지금부터 칸트가 말한 지성형식의 눈으로 한국정치의 현주소를 파헤쳐본다.

그는 지성형식을 다음 12가지로 분류했다.

○ 분량의 지성형식 : ①모두인가 ②하나인가 ③여럿인가

○ 성질의 지성형식 : ①있는가 ②없는가 ③무엇만 있거나 없는가

○ 관계의 지성형식 : ①있는가/있을 수도 있는가 ②어떻기 때문에 그런가

③그것과 이것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 양상의 지성형식 : ①가능하다/아니다 ②진짜로 있다/없다 ③필연이다/우연이다

지성의 12범주라 불리는 위 분류는 진리에 관한 것이다. 이제 진리의 자리에 한국정치를 대입해 생각해보자.

먼저, 한국정치는 국민들을 어떻게 볼까? 어떤 집단은 다른 집단을 ‘수구꼴통’이라 부르고, 어떤 집단은 다른 집단을 ‘좌좀(좌빨좀비)에 종북’이라 부르며, 동일 집단 내에서도 친박 진박 비박, 친노 반노로 갈린다. 한국의 정당에게 국민은 모두도 하나도 아닌, 여럿이다. 그리고 정당들은 언론과 찌라시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국민을 ‘편가르기’ 한다. 어떤 때는 행정부까지 나서서 국민 분열을 선도하기도 한다. 칸트가 보기에 한국정치의 분량 지성형식은 찌질하다.

▲ 갈가리 찢긴 국민 ⓒ김태현

다음으로, 각 정당의 정체성은 어떤가? 전통적으로, 새누리당은 보수층을, 더불어민주당은 진보층을 대변해왔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포스트 운동이즘’이라도 벌이듯 성질이 다른 이들을 쳐냈고, 새누리당은 박비어천가를 부르지 않는 이들을 쳐냈으며, 정체성이 의문투성이인 국민의당이 그들을 받아냈다. 칸트가 보기에 한국정치의 성질 지성형식은 잡탕이다.

각 정당의 관계는 또 어떤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앙숙관계라는 게 문제다. 이유는 정당의 꼭대기에 국민 대신 독사들이 앉아서 국민행복의 이름으로 독을 뿜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가 보기에 한국정치의 관계 지성형식은 약육강식일 뿐이다.

▲ 독사DOXA 국회 ⓒ김태현

마지막으로 양상의 지성형식이다. 국민행복은 가능할 것인가? 독사들이 그들만의 행복에 몰두하고 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불성설이다. 그런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왜 이렇게 되고 말았는가? 원인 없는 결과는 없으니 당연히 필연이다. 그리고 그 필연의 정점에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존재는 바로 국민이다. 칸트가 보기에 한국정치의 양상 지성형식은 ‘국민 태만의 부메랑’이다.

4․13 총선, 또 다른 부메랑이 될 것인가

한국정치의 지성형식은 힘센 놈이 태만한 국민들 위에 군림하며 찌질하게 잡탕 치는 ‘자폐아들의 난장판’이다.

의회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는 ‘개헌선 이상 의석 확보’라는 목표를 공공연히 입에 올리는 새누리당은 ‘내맘대로 자폐아’다. 연대만이 살 길이라며 정치세력의 다양성을 애써 무시하는 더불어민주당은 ‘진보기득 자폐아’다. 그럼에도 도무지 당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는 국민의당은 ‘잡탕 자폐아’다. 모두가 주변 돌아볼 줄 모르고 자신의 입장만 되풀이해 주장하는 자폐아들이다. 봉사에 귀머거리들이다.

누굴 찍을 것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총선이 또 다른 국민 태만의 부메랑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찍지 말아야 할 기준은 있다.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 당의 명성에 기대어 정치를 직업으로 여기는 ‘매너리스트mannerist’ 후보

○ 스스로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거나 변명으로 둘러대는 ‘거짓말쟁이’ 후보

○ 의원 개개인이 입법기관임에도 입법 활동에 태만한 ‘불로소득’ 후보

○ 의회민주주의를 무시한 채 타당을 향해 독을 뿜는 ‘독불장군’ 후보

○ 자신의 의정활동과 당의 활동 간에 별 차이가 없는 ‘당바라기’ 후보

○ 국민의 의사 듣기에 소홀한 ‘귀머거리’ 후보

○ 지역에서 중앙정치만 떠벌이는 ‘자칭 거물’ 후보

○ 그리고 때만 되면 헤쳐모이는 ‘철새’ 후보

당이 다르고 이념이 다르고 지역이 다른 한국정치, 이제 분량에서, ‘여럿’을 지양하고 ‘모두’를 지향해야 한다. 성질에서, 찌질이 잡탕 같은 문제들을 우격다짐이 아닌 합의로 풀어내야 한다. 관계에서, 각 정당의 꼭대기에 입에 발린 국민이 아닌 진정한 국민을 올려놓음으로써 견원지간의 앙금을 녹여내야 한다. 그리고 양상에서, 국민 개개인이 정치에 태만했던 습관을 버림으로써 독사들이 ‘후보자의 읍소’와 ‘당선자의 거만’을 반복해 부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 합류의 정치를 위해 ⓒhistoricalsolutions.com

이번 선거에 즈음하여, 서양철학의 두 물줄기를 하나로 합쳤던 대철학자 칸트로부터 배울 것은, 길길이 갈라져왔던 한국정치의 물길들이 ‘모두를 위한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다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을 주체는 국민뿐이니, 국민이 깨어나지 않는 한 한국정치의 구태는 지속되리라는 것, 이것 하나뿐이다.

자폐아 집단을 추종하는 또 다른 자폐아로서 표를 던질 것인가, 아니면 자폐아 집단을 야단치는 치유의 표를 던질 것인가? 칸트가 한국인들에게 던지는 이번 총선의 캐치프레이즈는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떤 자폐아 집단을 추종해온 자폐아였는지, 이제 당신 자신의 정치를 되돌아보라!”

김태현 두마음행복연구소 소장, 인문작가, 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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