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은 더 이상 변방이 아니다

버락 오바마는 풀뿌리 운동가에서 44대 미국 대통령까지 오른 인물이다. 컬럼비아대학교 졸업 후 지역사회운동으로 투신하여 시카고의 빈민가에서 주민들의 주거와 교육환경을 개선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 후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다시 시카고로 되돌아가 시카고대학교에서 전임강사로 헌법을 가르치며 인권운동을 병행했다. 자신의 활동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1996년 지방자치선거를 통해 정치에 입문,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주 상원의원 3선 경력으로 2004년 연방 상원의원에 진출한 그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적을 낳으며 2008년 미국 대선의 최후 승리자가 되었다.

오바마 팀은 민주당 경선에서 경쟁했던 힐러리 상원의원이나 존 매케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조직보다 규모 면에서 월등하게 앞섰다. 선거과정에서 뭉친 1천만명 이상의 오바마 네트워크( Obama Network)는 다양한 자원봉사활동 이외에도 엄청난 선거자금을 스스로 모으는데 앞장섰다. 매케인의 기부금 2배에 해당하는 7억 8천만 달러는 기부자당 평균이 약 50달러로 대부분이 소액이었다. 오바마는 풀뿌리조직을 기반으로 민주당 외곽에서 바람을 일으켰고, 빈약한 경력과 소수자의 한계를 딛고 끝내 아프리카계 최초의 백악관 주인으로 등장했다.

이처럼 오바마를 포함한 역대 미국 대통령은 주지사 출신 9명, 주지사와 주의원을 두루 경험한 인물 4명, 주지사와 시장을 모두 거친 인물 2명, 그리고 주의원 출신이 9명이다. 이를 합산하면 모두 24명이기 때문에 과반수도 넘는다. 따라서 미국은 말 그대로 주의 연합, 곧 지방자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분권형 대통령제 아래에서 국민 직선으로 대통령을 뽑는 프랑스는 최근 3명 연속 풀뿌리 경험자들이 당선되었다.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17년 만에 사회당 정권을 되찾아온 프랑수아 올랑드 현 대통령은 2001년부터 8년간 파리 남서쪽으로 464Km나 떨어진 코레즈 데파르트망(Department)의 주도(州都)인 튈 시장을 역임했다. 그는 프랑스 정치 엘리트의 산실로 불리는 국립행정학교와 파리정치대학을 졸업한 뒤 판사, 변호사, 그리고 모교 경제학 교수를 지낸 화려한 경력을 지녔다. 이미 34세인 1988년에 하원의원을 역임했으나 인구가 채 2만명도 안 되는 소도시 시장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일찍부터 풀뿌리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는 11년 동안 사회당 제1서기(당대표)직에 있으면서 7년간이나 시장 직을 겸직했다.

헝가리 이민2세 출신으로 전후세대 최초의 대통령이 된 니콜라 사르코지는 만 22세 때 파리 근교인 뇌이 쉬르 센 시의원이 되었고, 28세 때는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38세에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 내각의 예산장관으로 발탁된 그는 약관 43세로 제1야당인 공화국연합의 서기장에 올랐다. 2012년 대선 직후 올랑드에게 패배해 정계를 은퇴했던 그는 이를 번복, 지난해 3월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며 공화당으로 당명도 변경하고 2017년 대선 준비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대선도선 3수 끝에 엘리제궁 입성에 성공한 자크 시라크는 무려 18년 동안이나 파리시장 공관에서 용꿈을 키웠다. 우리나라 같으면 감히 상상하지 못할 일이지만 시라크는 1977년 파리시장에 당선된 이래 1995년 대통령에 선출될 때까지 파리시장과 제1야당인 공화국연합(RPR) 총재직을 함께 갖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대통령제를 실시하는 대표적인 두 나라는 지방자치에서 성장한 지도자들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일이 흔하다. 우리 대한민국은 과연 어떨까?

17대 이명박 대통령은 민선 서울시장직을 수행하면서 청계천을 복원하여 도심 한복판을 관광자원화 하는데 성공했다. 많은 시민들이 우려했지만 중앙차로제를 도입하여 극심한 도심 교통난을 상당 부분 해결했고 결국 지방자치단체장 출신 최초로 청와대 주인이 되는데 성공했다.

15대 김대중 대통령도 지방자치와 뗄 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1970년 9월 극적인 드라마를 통해 신민당 대통령후보 자리에 오른 김대중 의원은 이듬해 4월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에게 94만표(7.9%) 차이로 무릎을 꿇고 만다. 그는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 참겠다 갈아 치자!”는 구호를 내세우며 사력을 다했으나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앞세운 현직 대통령의 3선을 향한 집념을 넘어서진 못했다. 게다가 여당 측은 3력(力)까지 동원하며 안간 힘을 다하는데 당할 재간이 없었다. 3력(力)이란 풍부한 자금력, 강력한 조직력, 이를 뒷받침하는 행정력을 뜻하는 속어였다. 공화당은 특히 일선 지방공무원들을 앞세워 선거인 이중등재와 같은 부정선거운동에 노골적이었다.

그런데 불과 한 달 만에 치러진 1971년 5월의 8대 총선 역시 박정희 대 김대중의 재대결이었다. 당시 김대중 前후보는 대선 부정을 의심하였고 총선 지원유세 과정에서 이를 명명백백히 밝히라고 요구한 바 있다. 총선 결과는 113석 대 91석으로 공화당의 승리였으나 내용적으로는 실질적인 패배였다. 야권과의 득표율 차이는 마이너스 2.4%p, 표수로는 약 27만 표였다.

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된 야3당은 1989년 12월 31일 지방자치선거법을 통과시켰다. 7대 대선에서 실패경험을 가진 김대중 총재가 맨 앞장에 섰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1990년 1월 전격적인 3당 합당으로 지방자치선거 실시는 다시 미루어졌다. 218석의 거대 여당이 된 노태우 정부는 법에 명시된 지방선거 연기를 선언했다. 그해 10월 8일 김대중 총재는 ‘지방자치제 전면실시’ 등 4개 항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66세 노정객의 단식은 의료진의 염려로 세브란스병원 이송을 거쳐 13일 만에 중단됐다. 단식 중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병실을 찾았고 여야는 “1991년 6월 30일 이내 기초 및 광역 지방의회를 구성하고, 1992년 6월 30일 이내 기초 및 광역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실시한다.”고 합의했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는 한 차례 더 미뤄져 5·16 쿠데타로 실종된 지 34년 만에 1995년 6월 27일 화려하게 부활했다. 직선으로 뽑힌 자치단체장들은 주민생활에 큰 변화를 이끌었지만 특히 정치권을 강타한 그 위력은 대단했다. 그동안 김대중 총재가 염려했던 부정선거의 걱정을 완전히 덜게 된 것이다. 1997년 12월에 있은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는 바로 이 1995년 6월 제1회 동시지방선거 결실이 바탕이다.

16대 노무현 대통령 역시 ‘지방자치’와의 깊은 인연 속에 탄생한다. 그는 민주당 원외 최고위원 시절인 1993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설립하여 지방자치 초창기 지방의원들의 의정활동 전반을 지원했으며, 1995년 제1회 동시지방선거 당시에는 부산시장 선거에 직접 출마하기도 했다. 또 대통령 취임 후에는 첫 번째 국정과제를 지방분권으로 제시하고 신행정수도이전 추진과 지방 혁신도시, 기업도시 등 건설을 통한 지역균형발전의 성과를 남겼다. 이렇듯 지방자치와 관련이 있던 3명의 지도자는 결국 청와대 입성에 성공했다.

2017년은 지방의원선거 부활 26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부활 22년으로 지방자치는 이미 성년을 맞이했다. 제19대 대통령이 선출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지방자치와 많은 인연을 갖춘 인물이 유리한 고지를 점할 것이다.

2012년 대선의 야당 패인은 무엇이었을까? 2년 전 제5회 지방선거 당시 시·도지사는 민주당 7석 대 한나라당 6석, 시·군·구청장은 민주당 92석 대 한나라당 82석이었다. 광역의원과 기초의원도 각각 360석 대 288석, 1025석 대 1247석이었으니 기초의원을 제외하면 민주당은 풀뿌리조직에서조차 여당에 우세였다. 거기에 완벽한 야권연대까지 이룬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의 승리는 따 놓은 당상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2년 뒤 총선 때 반격에 나선 새누리당도 만만치 않아 적지 않은 지방자치단체장·지방의원 출신 국회의원 당선으로 응수했다. 새누리당은 무려 45명의 풀뿌리 출신을 공천하여 그중에 27명(자치단체장 출신 15명, 지방의원 출신 12명)을 당선시킴으로써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에 반해 안이한 판단으로 풀뿌리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민주통합당은 127명의 국회의원 당선자 중 고작 14명(11%)만을 자치단체장·지방의원 출신으로 채우는데 그쳤다.

한편 이번 20대 총선 또한 풀뿌리정치인의 잔치였다. 새누리당은 전반적으로 30석이 줄어든 가운데에서도 자치단체장·지방의원 출신은 2명이 늘어난 29명으로 집계됐다. 더민주의 경우 123명의 당선자 중에서 15명만이 풀뿌리 출신으로 19대와 큰 차이가 없으며, 국민의당은 6명이다. 무소속은 3명인데 야당계 2명, 여당계가 1명이다. 전반적으로 새누리당의 풀뿌리 성적표가 좋다고 할 수 있으니 총선 참패 속에서도 2017년 대선은 그나마 청신호가 켜진 것이다.

무명의 촌뜨기에서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는 2008년 연말 한 지지자 모임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변화(Change)라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이에 못지않게 변화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조직된 풀뿌리에서만 나온다.” 풀뿌리조직이 취약하면 이를 보완하기 위해 더욱 많은 노력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오바마에게는 그를 열정적으로 밀어준 풀뿌리 전사들( gross-roots army)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아오겠다는 야당은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박우섭 인천 남구청장은 지난해 새정치연합의 2·8 전당대회 당시 중앙당 지도부인 최고위원직에 도전했다. “당 소속 기초단체장 81명이 여의도 중심의 정치를 풀뿌리정치로 바꾸기 위해 최고위원에 직접 출마하자.”고 뜻을 모으고 기초단체장협의회장이던 그가 선수로 나서게 된 것이다. 그는 출마 공약으로 지방분권 개헌 추진, 풀뿌리 정당화, 지방의 힘을 통한 정권교체 등 생활정치를 통한 새로운 바람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전국대의원 투표에서 1위(16.24%)를 차지하고서도 조직선거와 인지도 조사 성격인 당원투표·여론조사에서 하위권을 면치 못해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81명 그들의 ‘반란’은 실패했으나 박우섭 청장의 새정치 혁신위원회 참여로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게 됐다. 10년을 지속해온 원내정당을 폐기하고 분권정당으로 가기로 한 것이 그것이다. 당 대표만 전당대회에서 뽑고 지역대표 5명, 부문대표 5명으로 당 지도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특히 지역대표는 시·도당위원장을 선출하여 권역별로 1명씩 호선하는 방식이다. 이에 따르면 인천과 경기도는 한 권역으로 임기 2년의 최고위원이므로 1년씩 돌아가며 최고위원직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제 8월 27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다시 한 번 박우섭 청장이 나섰다 인천시당위원장 겸 인천·경기권역담당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한 것이다. 그는 국회의원 중심, 여의도 중심으로 당이 운영돼서는 안 된다고 소리를 높인다. 지방의 목소리가 지도부에서 들리지 않는다면 당의 앞날이 기대할 것이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감히(?) 인천시당의 독립선언을 약속하였다. 더 이상 중앙당 인천지부에 머무르지 않을 것임을 다짐한다. 사실상의 지방 반란인 셈이다. 이 반란에는 480명의 ‘자치분권민주지도자회의’ 회원들이 함께 했다. 지방의 유쾌한 반란, 박우섭 청장의 행운을 빌어본다.

 

최 광 웅

데이터정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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