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무한 이윤획득에 의해 세계 경제는 불균등하고 불공정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힘이 거세지면서 각종 모순적 요소가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선 현대 경제의 중요한 쟁점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쟁점들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논쟁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 몰라도 무방한 것들이 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경제학 논쟁이 경제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정책은 보통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경제의 주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본지 선임기자 현재욱의 저작인 「보이지 않는 경제학」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호모 에코노미쿠스

어느 사회에나 주류와 비주류가 있다. 경제학에도 주류가 있다. 대학과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경제학을 하나로 묶어 ‘주류 경제학’이라고 칭한다. 한마디로 잘나가는 선수들이고, 정부의 정책결정에 강한 입김을 불어넣는다. 1980년대 미국에 신자유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학문권력을 장악한 시카고학파Chicago school가 대표적인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기세가 한풀 꺾였다. 현대의 주류 경제학은 주로 기득권층과 보수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며 시장자유주의와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

반면에 비주류 경제학은 시장실패와 사회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며 주류 경제학에 비판적이다. 비운의 혁명가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경제학계의 이단아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 1857~1929은 지금까지도 열정적 추종자를 거느린 영원한 비주류다.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장하준 교수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제학자이지만 주류는 아니다. 경제학에 대한 그의 언급은 매우 도발적이다. “경제학은 과학이 아니고, 앞으로도 과학이 될 수 없다.”

주류 경제학은 시장의 효율성을 중시하고 비주류 경제학은 사회의 형평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에 따라 논점과 가치관이 달라지고 새로운 사상이 끊임없이 수혈되기 때문에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는 칼로 자르듯 명확하지 않다. 케인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경제학은 주로 개별 기업과 개인, 즉 생산자와 소비자 개개인이 어떻게 경제적 선택을 하는지를 다루었다.

인간의 의사결정 패턴을 연구하려면 먼저 보편적 인간상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주류 경제학은 인간에 대한 두 가지 가정을 전제로 한다. 첫째, 인간은 이기적이다. 둘째, 인간은 합리적으로 사고한다. 이렇게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상을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이라고 한다.

인간은 언제나 이기적인가? 그렇다면 테레사 수녀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만 매년 수백만 명이 아무런 대가 없이 혈액을 기증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인간은 늘 합리적 선택을 한다는 전제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 전제에 따르면 인간은 언제나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용을 거두려고 한다. 정말 그런가? 모든 인간이 합리적이라면 당첨될 확률보다 잃을 확률이 훨씬 높은 복권은 한 장도 팔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주류 경제학에 대한 비판은 금융위기가 거듭되면서 한층 거세졌다. “경제의 기본 작동원리를 이해하는 데는 경제학자가 필요하지 않다. 주류 경제학자, 즉 가짜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을 통달한 척하지만, 사실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진실을 감추기에 급급하며 일반인이 알기 어려운 모호한 전문용어를 사용한다.” 경제학자인 존 F. 윅스John F. Weeks의 말이다.11 그의 저서인 『1%를 위한 나쁜 경제학』에는 “주류 경제학은 어떻게 부자들에게 봉사하고, 현실을 은폐하고, 정책을 왜곡하는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한국의 진보적 경제학자인 정태인은 “주류 경제학에는 실업도 금융위기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며 주류 경제학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내 생각에 전통적인 경제학은 인간의 감정과 이타적 본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동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통찰이 부족한 것 같다. 빈 곳을 채우려면 인류학, 역사학, 심리학, 뇌과학, 진화생물학 등의 연구에서 더 많은 영감을 얻어야 할 것이다. 리처드 탈러Richard Thaler가 행동경제학에서 거둔 성과는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시카고대학교 경제학 교수인 탈러는 사람들이 기존 경제학 이론이 가정하는 것처럼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2017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기자가 상금을 어떻게 쓸 것인지 묻자 탈러는 이렇게 대답했다. “재미있는 질문이네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비합리적으로 써보겠습니다.”

주류 경제학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전제가 또 있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라는 믿음이 거의 모든 경제학 교과서의 첫 장을 채우고 있다. 자원의 희소성 앞에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주장인데, 내게는 그 말이 인간에 대한 끔찍한 저주처럼 들린다. 만족을 모르는 동물의 삶이 얼마나 고단할지 헤아리기 전에 한번 따져보자. 과연 욕망의 무한성은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한 정확한 관찰인가?

만약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다면 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행복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제학자들이 잘 쓰는 방식대로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ceteris paribus’는 가정을 슬쩍 빌리기로 하자. 가상의 실험실 안에서 인간의 모든 욕망을 제거하고 오직 ‘식욕’ 하나만 남겨놓는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 따라서 식욕도 무한하다. 실험 결과를 끝까지 지켜볼 필요는 없다. 실험실 안의 불쌍한 인간은 짜장면 열 그릇과 갈비 30인분을 먹고 배가 터져서 죽을 테니까.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무한하다’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과장이 좀 심한 것 같다. ‘꽤 크다’ 정도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조절할 수 있다’를 덧붙이면 진실에 좀 더 가까워질 것이다.<계속>

※ 이 연재는 스트레이트뉴스가 저자(현재욱)와 출판사(인물과사상사)의 동의로 게재한 글입니다.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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