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연재-보이지 않는 경제학] 〈28〉기축통화의 특권
[ST 연재-보이지 않는 경제학] 〈28〉기축통화의 특권
  • 현재욱 선임기자 (betterman89@gmail.com)
  • 승인 2019.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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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무한 이윤획득에 의해 세계 경제는 불균등하고 불공정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힘이 거세지면서 각종 모순적 요소가 심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선 현대 경제의 중요한 쟁점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쟁점들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논쟁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 몰라도 무방한 것들이 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경제학 논쟁이 경제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정책은 보통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경제의 주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본지 선임기자 현재욱의 저작인 「보이지 않는 경제학」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기축통화의 특권

세상에는 정말 많은 종이돈이 있다. 이름도 다르고, 그림도 다르고, 지질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통화가치 또한 천차만별이다. 유로화, 영국 파운드화, 중국 위안화, 일본 엔화 정도가 달러에 버금가는 결제통화로 대우받을 뿐, 나머지 돈은 국경 밖으로 나가면 사실상 ‘잉크 묻힌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규모 세계 11위인 한국의 원화는 어떨까? 1997년 겨울, 대한민국은 경제의 기초체력fundamental이 비교적 탄탄했지만 당장 필요한 석유와 밀가루도 수입할 수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달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상품은 달러로 값이 매겨지고, 달러로 거래가 이루어진다. 석유는 말할 것도 없고 금·은 같은 귀금속과 구리·납·니켈 등의 원자재는 대부분 달러로 값을 치른다. 옥수수, 쌀, 밀, 콩 등 사람과 가축이 먹는 곡물도 달러 없이는 구입할 수 없다. 그뿐인가? 세계 모든 화폐의 가치가 달러에 의해 평가되고, 달러 기준으로 환율이 결정된다.

심지어는 가장 잘사는 나라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까지, 달러로 환산한 소득에 따라 서열이 정해진다. 오늘날 달러는 인간이 생산하는 거의 모든 상품의 유일한 가치척도다. 물론 원화로도 세상의 모든 물건에 값을 매길 수 있다. 그러나 달러가 원화의 값을 정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달러가 세상의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된 것은, 결정적으로 지상에서 금본위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달러도 금에 의해 값이 매겨졌다. 1971년의 닉슨쇼크는 값이 떨어진 달러가 계속 제 몸값을 숨기고 비싸게 굴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만천하에 진실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달러는 금 보관증일 뿐이었고, 금이야 말로 진짜 돈이었다.

달러는 금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금은 니켈, 납, 아연 따위와 더불어 원자재commodities의 하나로 전락했다. 금과 함께 화폐의 기능을 분담했던 은과 구리는 이미 오래전에 원자재시장으로 편입되었다. 달러는 금이라는 버팀목을 스스로 치워 버렸다.

하지만 석유를 볼모로 잡고 다시 살아났다. 파운드화가 그러했던 것처럼, 언젠가 기축통화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아마 달러는 지금의 특권을 내려놓고 싶지 않을 것이다. 기축통화로서 누리는 혜택이 너무 달콤하기 때문이다. 어떤 혜택이 있을까?

첫째, 기축통화를 가진 국가는 파산하지 않는다. 외채 만기가 도래했을 때 갚을 돈이 없으면 인쇄기를 돌려서 찍어내면 된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특권인지 우리만큼 잘 아는 이도 드물 것이다. 1997년 12월, 대한민국은 부도 직전이었다. 달러 환율은 1,964원이었고, 시중금리는 29퍼센트까지 치솟았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이 없었다면 망했을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지만 구제금융의 대가는 혹독했다.

수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고, 알짜 기업이 헐값에 팔렸다.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재앙이었다. 미국 연준은 부지런히 인쇄기를 돌려서 월가를 구했다. 다만 이 방법을 자주 쓸 수는 없다. 이런 식으로 계속 돈을 찍어서 빚을 갚으면 그 나라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지고, 통화가치도 하락한다.

통화가치가 하락하면 그 화폐를 보유하려는 사람이 줄고, 너도나도 약세 화폐를 팔아치우기 때문에 통화가치는 점점 더 떨어진다. 또한 통화 남발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결국 그 통화는 기축통화의 지위를 잃게 된다.

둘째, 기축통화를 가진 국가는 게임의 룰을 바꿀 수 있다. 전 세계의 경제 전문가와 정책 입안자들이 미 연준 의장의 발언에 귀를 쫑긋 세우는 까닭은 그의 말 한마디가 세계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미국의 금리가 오르내릴 때마다 세계 각국의 금리와 환율이 요동치고 자금의 흐름이 홱홱 바뀐다.

금리가 내리고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미국 정부의 채무 부담은 확 줄어든다. 거꾸로 미국에 돈을 빌려준 나라와 외환보유고의 대부분을 달러 자산으로 채운 나라는 손해를 본다. 예를 들어 중국이 열심히 미국에 물건을 팔아서 달러를 잔뜩 벌었다 치자. 미국 연준이 달러를 마구 찍어서 시장에 풀어버리면 달러 가치가 하락한다. 달러 가치가 30퍼센트 하락할 경우, 중국이 달러로 저축한 부의 30퍼센트가 허공으로 사라진다.

셋째, 다른 나라의 부를 자국으로 쉽게 옮길 수 있다. 기축통화는 전 세계 어디서나 재화 또는 서비스와 교환할 수 있다. 20달러짜리든 100달러짜리든 달러 지폐 한 장을 찍는 비용은 9.1센트다. 중국산 냉장고 한 대 가격이 250달러라고 하면, 미국 사람은 27.3센트의 비용으로 냉장고 한 대를 받고 50달러의 거스름돈까지 챙길 수 있다.

달러를 찍어내기만 하면 다른 사람의 노동 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 얼핏 이해하기 어렵지만 실제로 미국과 다른 나라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인들이 빚내어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미국 달러가 기축통화이기 때문이다.

기축통화가 누리는 이런 특혜를 ‘시뇨리지seigniorage(화폐주조차익)’라고 한다. 중세 봉건영주를 시뇨르seigneur라고 불렀던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화폐 발행권을 가진 영주는 금화 또는 은화를 만들 때 구리 같은 불순물을 섞는 방법으로 부당이득을 취했다.

불순물을 섞으면 주화의 가치는 액면가치보다 낮아진다. 사람들은 순도가 높은 주화는 장롱 속에 보관하거나 녹여서 팔고, 물건을 살 때는 순도가 낮은 불량주화를 사용한다. 결국 나쁜 돈(악화惡貨)만 시장에 유통되고 좋은 돈(양화良貨)은 시장에서 사라진다. 이런 현상을 ‘그레셤의 법칙Gresham’s law’이라고 부른다.

넷째, 여간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는다. 기축통화는 전 세계에 유통된다. 아예 미국 달러를 공식 화폐로 채택한 나라도 10여곳이나 된다(영국령 버진아일랜드·터크스케이커스 제도, 네덜란드령 카리브,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팔라우, 에콰도르, 엘살바도로, 파나마, 짐바브웨, 동티모르, 캄보디아 등이 미국 달러를 공식 화폐로 쓰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연준이 그렇게 많은 달러를 찍어냈음에도 미국의 물가가 기대한 만큼 오르지 않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미국의 은행들이 대출에 소극적이었고, 달러가 실물경제로 흐르지 못하고 금융자산만 잔뜩 부풀렸다.

또한 발행된 달러의 상당액을 해외시장에서 흡수했다. 달러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70억이 넘는다. 게다가 상당기간 지속된 미국의 ‘제로금리’는 달러의 해외 유출을 가속화했다. 미국에서 발행한 지폐의 약 50퍼센트가 미국 밖에서 유통되고 있다.

문제는 달러를 가진 외국인들이 미국에 청구권을 행사할 때다. 달러는 본질적으로 빚 문서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달러를 내밀면 액면가에 상응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미국의 제조업이 완전히 망가질 때 미국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뭐, 가져갈 거 있는지 둘러보시게. 무기라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는데.” 달러와 바꿀만한 상품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달러를 내던지기 시작한다. 결국 전 세계의 달러가 미국으로 역류하고, 미국에서도 감당키 어려운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다.

그밖에도 기축통화에는 무역결제의 편리성과 환전의 용이성 등 여러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사람은 아프리카 오지에 가도 달러로 그 나라 돈을 쉽게 바꿀 수 있지만, 아프리카 사람은 미국에서 자국돈을 달러로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미국의 기업은 달러로 물건을 사고 달러로 물건을 팔기 때문에 환차손 따위로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다.

기축통화가 되려면 일단 그 화폐가 해외에서 널리 쓰여야 한다. 한 국가의 통화가 해외로 흘러나가 유통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큰 규모의 무역적자를 감수해야 하고, 화폐 발행량도 많아야 한다. 화폐 공급량이 많아지면 통화가치가 하락하고, 화폐에 대한 신뢰도도 떨어진다.

이처럼 기축통화로서 역할이 커질수록 통화가치가 하락하는 문제를 ‘트리핀의 딜레마Triffin’s dilemma’라고 한다. 미국 예일대학교 교수였던 로버트 트리핀Robert Triffin이 1959년에 처음으로 이런 문제점을 제기했고, 미국 달러화는 정확히 그가 가리킨 대로 가치 하락의 길을 밟았다. <계속>

※ 이 연재는 스트레이트뉴스가 저자(현재욱)와 출판사(인물과사상사)의 동의로 게재한 글입니다.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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