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연재-보이지 않는 경제학] 〈27〉종이돈 시대의 신자본주의
[ST 연재-보이지 않는 경제학] 〈27〉종이돈 시대의 신자본주의
  • 현재욱 선임기자 (jeffhyun@naver.com)
  • 승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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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무한 이윤획득에 의해 세계 경제는 불균등하고 불공정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힘이 거세지면서 각종 모순적 요소가 심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선 현대 경제의 중요한 쟁점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쟁점들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논쟁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 몰라도 무방한 것들이 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경제학 논쟁이 경제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정책은 보통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경제의 주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본지 선임기자 현재욱의 저작인 「보이지 않는 경제학」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종이돈 시대의 신자본주의

1971년 이후의 자본주의는 예전의 그 자본주의가 아니다. 금융경제가 실물경제를 타고 앉아 밀가루 반죽처럼 주무르는 기형적 자본주의다. 구제금융이란 이름으로 월가의 투기꾼들에게 막대한 공적자금을 퍼부을 때, 우리는 신자본주의의 민낯을 똑똑히 목격했다. 책에서 공부했던 그 자본주의가 아니다.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은 폐기되었다.

세계의 많은 정부가 소비를 찬양한다. 빚내서 돈 쓰라고 촉구한다. 양적완화라는 희한한 이름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찍어서 인플레이션을 유도한다. 물가가 오르고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 내 주머니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것과 똑같은 일이 발생함에도, 사람들은 저항할 줄 모른다. 특히 서민들이 직격탄을 맞는다. 빠져나간 돈이 어디로 가겠나?

인플레이션으로 득을 보는 대기업과 금융권으로 흘러들어간다. [도표 2]가 달러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금본위제와 함께 고정환율제가 폐기되고, 파운드화 환율은 지진파의 기록처럼 들쭉날쭉한 선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환율을 고정하지 않고 시장에 맡기는 제도를 변동환율제變動換率制, flexible exchange rate라고 한다.

[도표 2] 파운드/달러 환율(1915~2015)
[도표 2] 파운드/달러 환율(1915~2015)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가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정부가 자국 통화의 환율에 개입하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다. 미국은 타국 통화의 환율에도 개입한다. 외환시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보다 보이는 손이 더 극성맞다.

1980년대 초, 일본 경제는 욱일승천의 기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1985년에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미국을 추월했다. 반면에 미국 경제는 재정적자에 무역적자가 더해진 이른바 ‘쌍둥이 적자’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1985년 9월 22일, 미국 재무장관 제임스 베이커James Baker는 뉴욕 맨해튼의 플라자 호텔에서 일본·영국·프랑스·서독의 재무장관을 불러 협상을 시작했다. 말이 협상이지, 미국의 압박은 우격다짐과 협박의 중간쯤 되는 수준이었다.

일본과 서독이 주요 표적이고 나머지는 들러리였다. 미국의 요구사항은 간단명료했다. “통화가치를 절상하라.” 자국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경쟁에서 유리해진다. 미국의 노림수는 엔화와 마르크화의 절상, 즉 달러 절하를 통해서 무역적자를 줄이는 것이었다. 미국의 강력한 압박에 일본은 버티지 못했고, 미국 재무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성공적인 회담이었다고 자평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플라자 합의Plaza Accord’다. 이듬해 1월, 엔/달러 환율은 259엔에서 150엔으로 떨어졌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일본은 엔화를 무제한 찍어내서 환율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엔/달러 환율은 2011년 10월 76엔에서 2015년 6월 125엔까지 올라갔다. 틈만 나면 위안화를 절상하라고 중국에 으름장을 놓는 미국이 웬일인지 일본의 엔화 절하는 못 본 척 방관한다. 중국을 견제하려면 일본의 협력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종이돈이 자본주의 세계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살펴보자. 국가가 법으로 보증하지 않는 한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 화폐, 물품화폐와 달리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화폐를 ‘명목화폐’ 또는 ‘법화法貨, fiat money’라고 한다. 피아트fiat는 ‘명령, 지시’를 뜻하는 말이다. 법은 정부의 명령이고, 법화는 정부의 강제에 따라 통용되는 화폐다. 금과 달러의 연결고리가 끊기자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명목화폐 시대를 맞게 되었다.

우리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돈을 세는 감각적 경험 없이도 영수증에 찍힌, 혹은 액정화면에 뜬 추상적 수치만 보고 얼마가 입금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달러는 더 이상 금의 분신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약속, 혹은 만질 수 없는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보고 만진다 해도 그것은 하나의 디자인일 뿐이다. 그것도 종이돈이 손에서 손으로 건너질 때에 한한 이야기다. 키보드로 몇 개의 숫자가 입력되는 순간,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기호와 상징은 깨끗이 사라지고 0과 1의 깜빡임만 남는다.

소꿉놀이를 하다가 한 아이가 나뭇잎 한 장을 따서 “이거 돈이야”라고 말하면 그때부터 나뭇잎은 돈이 된다. 내가 한 달 동안 노동을 하고 임금을 받을 때 경리직원이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고 “입금했어요”라고 말하면 나는 통장에 찍힌 숫자가 돈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화폐는 날개를 달았다. 그 날개는 원하는 곳까지 한순간에 갈 수 있고, 원하는 물건을 시카고에서 상하이까지 하룻밤 사이에 몇 번이고 실어 나를 수 있는 마법의 날개다. 이제 누가 화폐를 지상에 붙들어둘 수 있겠는가?

사실 자유를 얻은 것은 금융자산을 굴리는 자본가들이다. 오래된 계획이었는지 혹은 우연의 결과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원하는 세상이 되었다. 닉슨의 금불태환 선언 이후, 인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게 되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금본위 시대의 자본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새롭게 도래한 종이돈 시대를 ‘신자본주의 시대’라고 부르자. 신자본주의의 다른 이름은 ‘카지노 자본주의casino capitalism’다. <계속>

※ 이 연재는 스트레이트뉴스가 저자(현재욱)와 출판사(인물과사상사)의 동의로 게재한 글입니다.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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