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츠 화재로 '전기차 포비아' 확산.. 캐즘 장기화 우려 고조
하이브리드 우선 전략으로 선회.. 포트폴리오 다각화 집중
최고급형 펠리세이드 하이루프 내연·하이브리드 동시 출격
커지는 전기차 안전 우려에 업계 최초 배터리 제조사 공개
최근 국내에서 메르세데츠-벤츠 전기자동차 배터리 화재로 '전기차 캐즘(대중화 전 일시적 수요 정체)' 장기화 가능성이 거론되는 가운데, 국내 완성차 1위인 현대자동차·기아의 위기관리 능력이 시험대에 오른 모습이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벤츠 화재 등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전기차 화재들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전기차 포비아(공포증)'이 확산되고 있다.
가장 화두에 오른 벤츠 전기차 배터리 화재는 지난 1일 인천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발생했다. 배터리 폭발 화염으로 140여 대의 차량이 피해를 입고 아파트 단수·정전 사태로 300여 명의 이재민까지 발생한 해당 사고는 원인이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불안감만 높아지면서 전기차 기피 현상이 확산되는 중이다. 몇몇 아파트 단지에서는 전기차를 대상으로 지하 주차장 주차 금지 또는 충전 금지 등 제재를 가하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상황이 이렇자 결국 화재 이후 전기차를 매물로 내놓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직영 중고차 플랫폼 케이카의 자료를 살펴보면 지난 1일부터 7일까지 일주일 간 '내차 팔기 홈 서비스'에 등록된 전기차 접수량은 직전 주(지난달 25~31일) 대비 184%나 증가했다.
특히 이 기간 접수된 중고 전기차 매물 중 화재가 난 벤츠의 EQ 시리즈 모델이 차지하는 비율은 10%로, 직전 주(0건)보다 크게 증가하기도 했다.
전기차 캐즘으로 수요가 주춤하던 상황에 전기차 포비아 현상까지 나타나자 업계에서는 제대로 된 전기차 화재 방지책이 나오지 않으면 전기차 캐즘이 더욱 장기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 현대차·기아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전기차 대신 하이브리드차로 빠르게 전환한데 이어 화재 불안감을 낮추기 위해 전기차업체로서는 처음으로 배터리 제조사를 공개키로 한 것이다.
이미 현대차·기아는 올해 대두된 전기차 캐즘 속에서 하이브리드 차량으로 눈길을 돌려 호실적을 냈다. 올해 상반기(1~6월) 국내외 시장에서 40만8799대의 하이브리드차를 판매했는데, 이는 전년 동기 대비 21.2% 증가한 규모다. 특히 전체 판매량 대비 하이브리드 비중은 11.3%로, 처음으로 두 자릿수를 달성했다.
캐즘으로 인한 전기차 부진을 하이브리드차로 상쇄하는 모습이다. 같은 기간 현대차·기아의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은 20만932대로, 전년 대비 17% 감소한 상황이다.
이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빠른 판단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정 회장은 캐즘 고비를 극복하기 위해 하이브리드차 비중을 확대하기로 결정했고 실천도 빨랐다. 다른 완성차업체 보다 한 발 앞섰다는 평가다.
국내 중견3사(KG모빌리티·한국GM·르노코리아)는 하이브리드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 등을 출시하며 하이브리드차 시장에 이제 막 뛰어들고있다.
해외 완성차업체는 더 느린 상황이다. 미국 GM(제너럴모터스)은 올해 초 "플러그인하이브리드(PHEV)를 다시 도입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GM의 새 PHEV는 2027년 경에나 출시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 회장 지휘 아래 현대차·기아는 하반기 들어 국내는 물론 미국에서도 무리하게 전기차 생산에 제동을 걸었다. 국내에서는 전기차 화재로 인한 기피 현상이 확산되고 있고, 미국에서는 오는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전기차 보조금과 관련한 정책 불확실성이 큰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에 정 회장은 미국 조지아주에서 오는 10월 전기차 전용 공장으로 가동할 예정이었던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도 당초 계획과 달리 하이브리드차 생산설비를 동시에 갖추기로 했다. 발표는 이달 말 이뤄질 전망이다.
하이브리드차는 배터리 화재 위험을 높이는 '풀(full)충전'은 되지 않아 충전으로 인한 화재 위험성이 전기차 보다 낮다. 충돌사고가 발생했을 때에도 전기차와 다르게 배터리가 트렁크 쪽에 있어 전기차 보다 안전하다는 평가다.
이같은 하이브리드차 판매 증가는 현대차·기아의 수익성 확보에도 의미가 크다. 통상적으로 전기차 이익률은 1~3%인 반면 하이브리드는 12~13%에 달한다. 똑같은 대수를 판매해도 하이브리드차를 파는 게 더 이익이다. 이는 전기차 배터리가 제조원가 40% 이상을 차지하는 고가이기 때문이다.
하반기에도 기아 K8을 비롯한 하이브리드 신차 출시가 예정돼 있어 현대차그룹의 하이브리드차 판매량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특히 현대차 고급 브랜드인 제네시스도 VIP를 겨냥한 최고급 미니밴 시장을 노리기 위해 펠리세이드 하이루프를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 두 가지로 출시할 예정이다. '고급화'까지 추진하면서 다양한 하이브리드 수요를 잡겠다는 전략이다.
이와 함께 현대차는 현대차·제네시스 전기차 13종에 들어가는 배터리 제조사를 홈페이지에 전면 공개했다. 본래도 문의가 있으면 개별적으로 공개하긴 했으나 한 번에 모두 공개한 것은 완성차업계에서 처음이다.
이같은 정 회장의 조치는 앞서 벤츠 전기차 화재에서 해당 차량에 소비자들에게는 낯선 중국 파라시스(세계 10위)의 배터리가 들어있던 것으로 확인됐는데, 배터리 정보가 공개되지 않아 불안감을 더욱 높이고 있는 상황에 내린 결정이어서 더욱 주목받았다.
지난 10일 공개된 현대차 자료를 살펴보면 소형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인 '코나 일렉트릭' 2세대에만 중국 CATL 배터리가 탑재됐다. 이 외 12종에는 모두 SK온과 LG에너지솔루션 제품이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기아도 조만간 동일한 방식으로 배터리 제조사를 공개할 예정이다.
현대차·기아의 배터리 제조사 공개 움직임은 다른 완성차업체로도 확산될 전망이다. 현재 국내 수입차 1위 BMW도 이달 중 홈페이지에 모든 전기차에 들어간 배터리 제조사를 공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기피 현상에 따른 캐즘 장기화가 우려되는 상황"이라며 "하이브리드로 캐즘을 돌파 중인 현대차그룹도 위기감을 느끼고 배터리 제조사를 공개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이같은 움직임이 완성차업체로 확산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스트레이트뉴스 함영원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