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 라임사태, 홍콩H ELS…반복되는 역사
밸류업 전도사 금융회사들…신뢰 잃으면 ‘공염불’
지난 4일 기업회생절차 신청 후 11시간 만에 법원은 홈플러스의 회생절차 개시를 승인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 남짓한 시간 동안 자금 흐름을 둘러싼 전개 양상이 ‘복마전’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강건너 불구경으로 생각했던 사태가 어느새 우리 모두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사태로 번지는 상황을 목도하는 심경이 편치 않습니다.
국내 2위권의 대형마트인 홈플러스는 우리에겐 잊을 수 없는 해인 1997년 9월 1호점을 열었습니다. 삼성물산 유통부문에서 삼성상회의 시작지인 대구에서 1호점을 열자마자 IMF구제금융 사태를 맞았습니다. 1999년 4월 영국 테스코와 합작으로 삼성이 지분 51%를 가진 ‘삼성테스코’로 변신하게 된 계기입니다.
이후 2011년까지 이름은 ‘삼성테스코’였으나 삼성의 지분은 계속 낮아지며 점차 발을 빼는 수순으로 이어집니다. 이후 2015년까지 테스코 단독으로 ‘홈플러스’를 운영했지만 이미 이마트라는 토종 거인에 무릎 꿇은 월마트와 까르푸의 전철을 밟으며 영향력이 약화, 결국 2015년 9월 현재의 최대주주인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에게 넘어갔습니다.
비록 돈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나 삼성이 시작한 대형마트를 토종 사모펀드가 다시 사들였다는 점에 안도하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다만 인수금액 7조2000억원의 적정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고, 레버리지 바이아웃이라는 이름으로 회사 내 자산을 지렛대 삼은 무리한 투자는 오늘날 기업회생의 길로 접어드는 단초가 됐습니다. 노조들이 사측을 향해 우량자산을 팔아치우며 회사를 골병들게 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쿠팡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커머스의 성장으로 주요 오프라인 상점들이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결정타는 역시 아무도 예상 못했던 ‘코로나19’ 사태입니다. 사회적 거리를 두기 위해 사람이 많은 곳에 가지 않던 습관에, 모바일폰 쇼핑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은 코로나19 종료에도 오프라인 매장을 찾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아는 내용입니다.
유통사업의 특성상 매출이 일어난 시점과 실제 대금 회수 시점 사이에 시차가 있고, 그를 메우기 위함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각종 채권과 유동화 금융상품들을 만들어냈고 아무 의심 없이 투자자는 고수익의 달콤함을 누렸습니다.
그 중에는 1조2000억원 상당을 빌려준 메리츠금융 같은 전문가 집단도 있고, 국민의 미래를 책임질 국민연금도 6121억원을 투자해 현재까지 절반 정도만 회수한 상황입니다. 그 와중에 증권사들도 틈바구니에 끼어 물건을 떼어다 개인투자자들에게 쪼개 팔았습니다.
개인투자자들이라고는 하나 홈플러스 관련 CP(기업어음)나 전자단기사채, 이에서 파생된 ABSTB 등에 투자한 사람들은 대체로 중산층 이상의 자산가들이 많습니다. 연리 6%가 넘는 단기채권 상품이 있다는 걸 아는 투자자들은 금융투자에 대한 경험이 꽤나 축적된 개인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산을 지키는 방법도 잘 알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미 이 피해자들은 조직화된 움직임을 통해 언론사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12일 금융감독원 앞으로 몰려갈 계획을 세워두고 있습니다.
유사한 사례들을 통해 학습된 패턴이 있는데다, 이런 상황에선 ‘큰 장이 섰다’며 전문가인 법률 변호인들이 이들에게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주식은 이벤트가 발생해 가치가 하락하면 제 자리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만, 채권은 디폴트(상환불능)가 발생하면 휴지조각이 되는 것”이라며, “이번 사태 관련 투자자들은 이 정도 상식은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뻔히 상품의 문제 가능성을 알면서도 투자를 했다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의 설명입니다.
하지만 투자자들이 마음 속으로 어떤 생각을 가졌건 불완전 판매가 이뤄졌다면 이들은 피해자로 분류됩니다. 투자 판단 과정에 전문가들이 위험고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 이들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사모님, 홀플러스 아시죠? 예전에 삼성이 운영하던 그 큰 마트가 망하겠어요? 몇 달 뒤에 돈 들어오는 땅짚고 헤엄치는 투자에요, 이런 상품 없으니 믿고 투자하세요”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홈플러스 채권’이라는 단어 대신 다른 어떤 상품을 넣어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홍콩 H지수 ELS가 될 수도 있고 라임펀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중국 기업 중 대표 기업들만 엄선한 시장이에요, 그런 곳이 반토막 날 리가 있겠어요?”
“정부가 하는 사업에만 투자하는 상품이에요, 걱정 마시고 투자하세요”
금융회사들은 실추된 신뢰를 회복하겠다고 윤리헌장을 만들고 임직원들이 모여 선서를 하고 리스크관리 위원회를 운영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는 반복됩니다.
코리아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한 ‘밸류업’이 어느새 1년이 넘었고 그 선두에 금융회사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배당 확대도 좋고 자사주 소각도 좋지만 가장 기본인 신뢰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문화의 부재가 아쉽습니다.
“우리도 몰랐다”며 MBK와 홈플러스에게 소송을 걸어 구상권을 청구하고, 당국이 실태 파악에 나서 계도에 나서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도 이제 그만 봤으면 합니다.
공급하는 투자상품의 위험 가능성을 사전에 몰랐다는 설명은 전문가가 할 수 있는 변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트레이트뉴스 장석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