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가장 깊은 진실을 보여준 '삶'
화려하진 않아도, 참된 삶이 여기 있습니다.
경남 남해군 고현면의 한 작은 마을, 올해 아흔둘을 맞은 정순일 옹은 평생을 밭일하며 살아온 평범한 농부입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세상의 주목을 받지 않았고, 이름난 업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누구보다도 조용하고 단단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정순일 옹의 삶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던 ‘평범함의 가치’와 ‘진짜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작은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조용한 삶의 힘 –'
경남 남해군 고현면의 한 조용한 마을, 허름하지만 단정한 촌집 아래 살고 있는 정순일 옹.
그의 삶은 요란한 뉴스의 헤드라인에도 화려한 시상식의 무대에도, 그 어떤 권력의 회랑 속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한 번도 높은 자리에 오른 적 없고, 누구에게도 고개를 높이 쳐든 적이 없습니다. 그저 평생을 묵묵히 땅을 일구며, 열심히 가족을 먹이고 입히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올해로 아흔둘. 이제는 허리가 많이 굽고, 걸음걸이도 느릿느릿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맑고 단단합니다. 그 속엔 지나온 세월의 굴곡과 지켜온 신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행복이 뭐 별거 있소? 밥 세끼 챙겨 먹고, 자식들이 안 아프고, 해지는 저녁이면 마당에 앉아 숨 좀 돌리는 거지”
그 말은 단순했지만, 오늘날 혼란한 대한민국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진실입니다. 정순일 옹은 이 나라의 수많은 아버지들처럼, 조용히 그러나 꾸준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린 시절은 일제강점기의 말기였고, 젊은 날엔 6·25 전쟁이 그의 모든 삶과 가치관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았고, 혼자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가족과 마을, 이웃들을 끌어안으며 견디고 일어섰습니다.
“세상은 바뀌어도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바뀌면 안 되지요” 곧잘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정치인이 되고 싶었던 적도 없고, 이름을 날리고 싶었던 적도 없었습니다. 그저 정직하게 살고, 내 아이들만큼은 굶기지 말자는 마음 하나로 일생을 버텼습니다.
버텼다는 표현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아버지, 우리의 할아버지 정순일 옹은 그렇게 힘들지만 참고 이겨내며 자신의 일에 책임을 다했기에 오늘까지 생존해 계십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이기심이 만연하고 너도나도 권력을 쥐려 합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 도지사가 되겠다는 사람, 국회에 들어가겠다는 사람… 그들이 내세우는 말들은 대부분 같습니다. “국민을 위하겠다”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 “국가를 위하여”
그러나 정순일 옹은 압니다. 권력의 자리에 앉아 온갖 특혜를 누리는 자들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선량한 국민들 덕이라는 것을.
몇 해 전, 남해군 고현면 해바라기재가복지센터에서 노인돌봄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찾아왔을 때, 그는 조용히 거절했습니다. 사지육신 멀쩡한 자신이 왜 젊은이들이 낸 세금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돈, 힘든 젊은 사람들한테 써요. 난 아직 밥도 해 먹고, 옷도 혼자 입어요. 그리고 경운기도 운전할 수 있어요”
그의 말은 고집이 아니라 책임감이었습니다. 그 책임감은 단지 개인의 품성을 넘어 한 시대의 도덕적 기준이 되어야 할 무엇이었습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 치부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생각이야말로 지금 대한민국이 잃어가고 있는 가치입니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위해선 친구도 동지도 버리는 세상에서, 그는 여전히 ‘미안함’을 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순일 형님’ 혹은 ‘정 어르신’이라 부릅니다. 그의 이름 앞에는 화려한 어떤 수식도 붙지 않습니다.
단지, 보통의 사람들,,, 동네에서 우리가 흔히 써는 호칭 입니다. 그 호칭속에는 존경과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삶을 장식하지 않고, 언제나 진심으로 살았고, 말보다는 먼저 손을 내밀 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했던 마음.
정순일 옹은 해마다 명절날이면 손자 손녀들에게 말합니다. “공부 잘하는 것도 좋지만, 거짓말은 하지 마라. 사람 속이지 말고,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마라”. 이 간단한 말은 사실 이 나라 정치인들이 새겨야 할 유훈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지금 당장 이기고 보자’는 풍조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순일 옹의 삶은 “진짜 이기는 삶은, 오래도록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이다”. 누군가는 묻습니다. “평생 그렇게 살아서 얻은 게 뭡니까?” 그때 정순일은 슬며시 웃으며 대답합니다 “얻은 거? 음… 자식들 웃는 얼굴이지. 이거면 됐지”
그의 삶은 대단한 업적도, 눈부신 부도 남기지 않았지만, 가장 인간적인 진실만을 남겼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평범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누군가를 위해 밥을 짓고, 땀을 흘리고, 밤늦게까지 자식 기다리는...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삶이며, 이 나라를 지탱해 온 진짜 힘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기억해야 할 이름은 화려한 이력서의 주인공이 아니라, 남해의 작고 조용한 마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한민국을 지켜낸 정순일 옹 같은 분입니다. 그의 삶은 말없이 전합니다. “행복이란, 스스로 지켜낸 소박한 하루하루에서 비롯된다”라고.
정순일 옹의 이름 없는 삶은, 이름뿐인 권력보다 훨씬 오래도록 우리의 가슴에 남을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할아버지로서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독자 여러분도, 오늘날의 빠른 변화와 경쟁 속에서 잃기 쉬운 ‘진심’과 ‘가치’를 다시 한 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경남 남해군 고현면에 사는 정순일입니다"
남해, 내가 태어나 자란 이곳은 늘 바다 냄새가 나고 들판에는 논과 밭이 잘 어우러진 조용한 마을입니다. 이곳에서 살아온지 92년이 되었습니다. 누가 내게 묻습니다. “할아버지, 남해에서 삶은 어떠셨어요?” 나는 그때마다 웃으며 말합니다. “그저 힘들면 하늘보고, 땅에는 곡식 심고 살았어”.
나는 누구에게도 부러움을 살 만큼 이름난 인물도 아니고, 남들 앞에 자랑할 재산이나 명예도 없습니다. 특별한 재능이 있던 것도 아니고, 공부를 오래 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하며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내 인생도 우리나라의 역사처럼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어두웠던 그늘을 기억합니다. 저는 1934년에 태어났고 개띠입니다. 그땐 나라가 없었고,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였죠. 학교에서는 일본 말을 써야 했고, 교과서에는 천황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아이였던 나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따라야 했습니다. 바닷가에서 놀던 어느 날, 마을로 들어온 일본 군인들을 처음 보았습니다. 무거운 군복에 철모를 쓴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집집마다 들여다보며 주민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곤 했습니다.
그당시 일본은 남해를 군사 기지화하고, 어민들을 끌어다 강제로 일하게 했습니다. 나보다 나이가 든 형들은 하나둘 강제 노동에 동원됐고, 매일 일본 순사들은 주민들을 감시했습니다. 마치 우리 스스로가 죄인인 양 살아야 했습니다. 일본은 남해를 통해 군수물자와 병력을 이동시키며, 거제 지역과 함께 전략적 군사 기지화 했기에 지역 주민들의 삶은 점차 피폐해졌습니다.
농업과 어업이 침체되고, 많은 사람들이 강제 노동과 수탈에 시달리면서 삶의 터전이 무너졌습니다. 더구나 일본은 남해를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강제 징용, 강제 노동, 민간인 학살 등 잔혹한 만행을 자행했습니다. 특히, 군사 기지 건설과 전쟁 군수품 생산을 위해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고, 이 과정에서 열악한 환경과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강제 연행된 조선인들이 일본군의 전쟁 수행에 희생된 사례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만행은 지역 주민들의 삶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그 고통을 느낀 사람들의 아픔, 이러한 만행과 강제 노동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가족을 잃거나, 강제 연행되어 고통스러운 노동과 학대를 견뎌야 했던 이들은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안고 살아갔습니다. 많은 이들이 생존의 희망을 잃고 절망에 빠져들었습니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진주를 중심으로 서부경남 전역에서도 강제 동원이 자행됐다고 하더군요.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죠.
그렇게 아픔을 일상화 하면서 지내던 어느날 해방이 왔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그날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합니다. 마을 언덕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어디선가 들려온 말—"일본이 항복했다!"는 외침에 두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후 일본인들은 허둥지둥 짐을 챙겨 떠났고, 그들의 집은 텅 비었습니다. 기쁨도 있었지만 허탈함도 컸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빼앗긴 시간, 너무 오랫동안 눌려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솟구쳐 멍해 지더군요. 당시 고통을 당한 사람들의 아픔은 단순한 신체적 고통을 넘어,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 정체성의 상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치유되지 않은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깊은 슬픔과 분노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고 치유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때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역사 속에 묻혀버릴 뻔했지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라 잃은 백성의 고통을 어찌 말로 표현이 되겠습니까?
그들이 겪은 고통과 희생은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어야 하며, 다시는 그런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번영된 국가를 건설해야 합니다. 현실에서 교류는 할 수 있지만 일본에 대한 역사는 절대 잊어선 안됩니다.
'또 다른 아픔 ... 6,25전쟁'
우리는 마침내 자유로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삶은 고단했고, 마을은 여전히 가난했습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희망을 품고 논을 갈고, 배를 탔고, 저 역시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50년, 제가 17살이 되던 해, 그 평화는 다시 무너졌습니다.
6.25 전쟁이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읍내에서 북의 남침 소식을 듣고 전해 주었습니다. 그 순간에도 머나먼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북한군이 배를 타고 남해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때 남해에 상주해 있던 경찰들은 배를 타고 여수로 도망쳐버렸습니다. 마을은 텅 비었고, 남은 건 우리 민간인뿐이었습니다.
그 혼란 속에 마을 어른들이 끌려 나가고, 어느 날은 총소리에 마을이 술렁였습니다.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얼굴이었지요. 어린 친구처럼 보이는 병사들이 총을 들고 있었고, 그 총에 누군가는 죽었습니다. 처음 마을에 들어온 북한군은 아직 수염도 나지 않은 아이들이었습니다. 총이 너무 커서, 총구가 땅에 닿을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잔혹했습니다.
그들은 마을 이장, 면장들을 밧줄로 묶어 세워놓고 총을 쐈습니다. 즉결 처형을 했던 것입니다. 나는 숨어서 그 광경을 지켜봤습니다. 총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이 쓰러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습니다. 나의 눈에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을까 싶어 한없이 울었습니다. 너무나 공포스러웠습니다. 무서웠습니다.
그중 한 분은 총에 맞은 척 쓰러져 살아남았습니다. 쓰러져 있다가 밤이 되자 피를 흘리며 산속으로 도망쳤고, 얼마 후 국군이 들어오자 마을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를 다시 봤을 때, 나의 눈에는 또 한번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를 그때 알았습니다.
북한군은 곡식까지 모조리 가져갔고 동네 주민들 모두 배가 고팠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뻘밭을 기어 다니며 조개를 찾고, 칡을 캐고, 뱀을 잡아먹었습니다. 우리는 물로 배를 채웠고, 때로는 흙냄새 나는 풀도 입에 넣었습니다. 칡뿌리를 캐며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먹을 수 있는 건 무엇이든 찾아 다녔습니다.
사람은 참 이상한 존재입니다. 힘들어도, 죽을 것 같아도, 어쩐지 살아내더이다.
'정순일 옹의 군입대'
1954년, 어느 찬바람 부는 초 겨울날, 나는 21살의 나이로 군에 입대했습니다. 남북이 휴전을 선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나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군복을 입었습니다.
논산 훈련소 3기생으로 입대했던 그 해...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논산의 겨울은 유난히 매서웠습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은 칼날처럼 살을 베었고, 손끝은 제대로 주먹조차 쥐기 어려웠습니다. 허허벌판 위에 덩그러니 세워진 천막이 우리의 집이었습니다. 훈련은 살을 깎는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새벽 다섯 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나면 곧장 달리기부터 시작했습니다. 허리에 철모를 매달고, 어깨엔 소총을 멘 채 흙탕길을 구르고, 진흙 속을 기었습니다. 강도 높은 체력 단련과 엄격한 군기 속에서 군인으로 탄생하기 위한 훈련에 매진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달리고, 무기 다루기, 전술 훈련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기억합니다. 어느 날 쓰러져 코피를 흘리던 동기가 있었지만, 교관은 무심하게도 "죽지 않으면 훈련 계속한다"고 외쳤습니다. 불굴의 의지를 심어주기위한 매서운 목소리 였습니다. 평일에는 훈련하고 주말이면 잠시도 쉬지 않고 삽과 괭이로 온갖 일들을 했습니다. 전기불도 없었고 밤에는 촛불을 켜고 지냈습니다.
어느날 훈련소 내에서 슬픈 일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같은 훈련병이 갑자기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원인은 영양실조에 혹독한 훈련을 견디지 못해 발생한 것이라고 전해졌습니다. 같이 잠자고 훈련하고 웃으며 얘기 나누던 동료가 죽어서 가마니로 덮여져 있는 모습을 보고나니 한없이 우울해 졌습니다. 그래서 살기위해서 참고 견디자 라며 내 자신을 독려했습니다.
훈련소에서 아침 세수나 목욕은 계곡물에서 얼음을 깨어서 했고, 온수는 아예 구경도 하지 못했으며, 밥 할때 물도 계곡에서 양둥이로 얼음을 가져와 녹여서 해 먹었습니다. 밥솥은 엄감생신, 깡통에 밥을 해 먹었습니다. 미군들이 먹고 버린 찬합이나 깡통을 사용했습니다. 그 마저도 없었으면...
반찬은 노란단무지 하나, 40~50명 되는 훈령병들에게 멸치통조림 하나 고작 그런것들이었습니다. 사람 숫자는 많은데 통조림 하나로는 어림없었죠, 엄청난 젓가락 경재을 뜷고 황소같이 달려들어 멸치 반마리 들어올려 입으로 가져간 기억은 있습니다. 딱 한번.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는 기간동안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주말이었습니다. 교관이 훈련병 모두를 집합하라고 하더군요. 천막 작업을 마친 후 천막밑에 투표함을 가져와서 두고는 투표를 실시한다고 외쳤습니다. 투표함 옆에는 조교가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는데 무조건 이승만 후보를 찍어라고 하더군요. 당시 투표함 앞에서 펼쳐진 강제 투표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조교의 눈길이 무섭게 느껴졌고, 그 강압 속에서 억지로 표를 확인받았으니까요. 그 같은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이승만 후보를 안 찍고 다른 후보를 찍는 용감한 동기생도 있었습니다. 그 순간 조교는 독수리 같은 눈빛으로 돌변하면서 몽둥이가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훈련중 점심밥은 돌처럼 굳은 밥에 김치도 없이, 간장 몇 방울 뿌린 것이 전부였습니다. 배가 고파 바닥에 굴러다니는 감자 껍질을 주워 먹는 이도 있었고, 몰래 부엌 근처를 기웃거리다 들켜 단체기합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훈련소 생활은 수많은 얘기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힘든 일이 닥치면 논산 훈련소 훈련병으로서 3개월을 생각하면서 이겨냈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의 초석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강원도 양구에서 ... 겨울 군복의 무게'
훈련을 마치고 1월에 6사단 양구에 배치되었습니다. 군번 9993745. 거긴 최전방이죠. 말 그대로, 북한과 마주한 철책 너머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곳이었습니다. 최전방 철책 근무는 상상 이상으로 혹독했습니다. 천막은 훈련소보다 더 낡았고, 내부는 습기가 차서 곰팡이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좁은 내무반에 80여 명이 들어찼고, 군복은 단추가 떨어진 옷은 꿰매 입고, 발에 맞지 않는 군화를 억지로 신으며 겨울을 버텨야 했습니다. 난 양말이 없어 낡은 옷으로 발을 감쌌습니다. 겨울밤엔 천막이 찢어질 듯 흔들렸고, 바람은 천막 틈새로 숨어들어와 우리의 체온을 앗아갔습니다.
추위에 손가락이 얼어 총을 제대로 쥐지 못하는 날도 많았습니다. 양말은 없어 발에 동상이 걸린 전우가 대부분 이었습니다. 약은커녕 붕대조차 부족해, 감기 걸린 전우가 군의관 대신 뜨거운 물을 찾는 게 전부였습니다. 북한군의 침투는 자주 있었습니다.
밤새 경계 근무를 서다가 철책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리면 곧바로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럴때마다 밤새도록 경계 근무에 돌입했습니다. 잠은 안녕. 총을 들고 얼어붙은 숲속을 헤매는 수색 작전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적의 움직임이 없어도, 매복 근무 중엔 눈을 뜬 채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총소리 하나 없는 정적 속에서, 발자국 소리만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습니다. 한밤중, 숲속은 적막했고 우리는 정해진 순서대로 매복 근무를 서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철책 너머의 인기척 하나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악!" 하는 짧은 비명이 새어나왔습니다. 동기 하나가 눈 속에 묻혀 있던 돌에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순간적으로 신음이 터져 나온 것이었습니다. 순간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고, 나는 속으로 아이고 큰일났다. 어쩌냐?라며 외쳤습니다.
즉시 부대로 복귀한 우리는 아니나다를까 소대장의 악이 바친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습니다. “누구야, 소리 낸 놈! 전원 집합!”. 우리는 즉시 눈밭 위로 뛰쳐나갔습니다. 이유를 설명할 틈도 없었고, 설명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습니다.
소대장은 이미 전투화 끈을 동여매고 기다리고 있었고, 분노를 누르지 못한 채 차가운 눈 위에 우리를 엎드리게 했습니다. “적 앞에선 한 치의 소리도 죽음을 부른다. 오늘 그 값, 몸으로 갚아라” "머리 박아"
그때부터 우리는 눈밭 위를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좌우로, 앞뒤로, 통나무처럼 몸을 말아 한참을 굴렀습니다. 눈은 이미 옷 안으로 스며들었고, 군복은 축축하게 젖어 들었습니다. 이내 손가락과 발가락 끝이 감각을 잃기 시작했고, 숨을 쉴 때마다 찬 공기가 폐를 찌르는 듯했습니다.
기합은 끝날 기미가 없었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갔습니다. 가끔씩 소대장의 호루라기 소리가 날 때면 다시 전원 정지 자세, 이어지는 기합소리..... 눈밭은 점점 패이고, 발밑은 진창처럼 질척해졌습니다. 기합을 받는 순간에도 동기를 향한 원망이 가득했지만, 끝나고 나니 아무도 그에게 말 한마디 하질 못했습니다. 지쳐서 말할 수 있는 힘이 없었죠.
동기의 작은 실수 하나가 만들어낸 그 날 새벽의 기합은 우리 모두에게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훈련소 이상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전쟁터보다 더한 침묵의 공포와 인간의 한계를 배웠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밤이면 차가운 바람이 천막을 흔들고, 얼음이 언 땅 위에서 견디어 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 조국을 지키기 위한 일념으로 군 생활에 충실히 임했습니다.
전 남들보다 더 열심히 훈련했고, 군기와 규율을 철저히 지키며, 북한군의 침투와 비무장지대의 긴장감 속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적의 움직임이 없어도, 매복 근무 중엔 눈을 뜬 채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총소리 하나 없는 정적 속에서 발자국 소리만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습니다.
나는 수색대 소속이었기에 다른 이들보다 더 자주 산을 오르고 철책을 돌며 몸을 혹사해야 했습니다. 당시 군대는 엄격한 기강과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운영되었습니다. 조금만 실수해도 고참들에게 맞거나 기합을 받는 일이 일상이었고, 새벽 기상과 함께 시작되는 강도 높은 훈련은 피로와 고통을 더했습니다.
먹을 것도 부족했고, 쌀 배급도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반찬은 매일 된장국이나 간장이었고, 그마저도 먹기 힘든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멧돼지 한 마리 잡으면 부대 전체가 포식을 하는 풍경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질기고 먹기 힘든 고기였지만, 그 고기마저도 군인들에게는 소중한 보상이었으니까요. 군복도 좋은 옷감이 아니었습니다. 제대하는 고참들이 입던 군복을 얻어 입는 것이 행운이었고, 서로 얻어 입기 위해 경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군 생활은 힘들었지만, 나는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대대장부터 중대장, 소대장까지 나를 아껴주는 선후배들의 격려와 신뢰도 받았습니다. 그만큼 나는 내 조국을 지키는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합니다. 당시 중대장은 육군사관학교 3기 출신인 조대영 대위였고, 충청남도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어려웠던 시절에 만난 분이라 지금도 보고싶습니다. 그립습니다.
비무장지대에서는 북한군이 자주 침투했고, 우리 군은 곡사포와 직사포를 동원해 출몰지역에 집중 사격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적의 움직임이 없어도, 매복 근무 중엔 눈을 뜬 채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총소리 하나 없는 정적 속에서, 발자국 소리만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습니다.
그렇게 3년 7개월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철모를 벗고 고향 남해로 돌아왔을 때,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논두렁을 걸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밤마다 철책선이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평화로운 들판을 보며,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 평온을 지키기 위해 내가 견뎠던 모든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나는 다시 농사일에 매진하며 살았습니다.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도, 나는 과거의 기억을 잊지 않았습니다.
[스트레이트뉴스 김태양 선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