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삼성과 SK의 중국 내 반도체 공장에 대한 미국산 장비 반입 허용 조치를 철회할 수 있다는 방침을 밝혀, 국내 반도체 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이번 조치는 한국과 대만 기업에 부여한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제도 폐지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현실화되면 국내 반도체 생산 거점의 운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가 20일(현지시간) 제프리 케슬러 미 상무부 산업·안보 담당 차관이 삼성, SK, TSMC 측에 해당 방침을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케슬러 차관은 이들 기업이 중국 현지 공장에 반도체 제조 장비를 들여올 때 매번 별도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는 조치를 철회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중국 시안과 쑤저우에서 각각 낸드플래시 생산공장과 패키징 공장을 운영하고 있고, SK는 우시에 D램 공장, 충칭에 패키징 공장, 다롄에 인수한 낸드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장비 반입 제한이 현실화되면 이들 공장의 생산 효율과 투자 계획 전반에 영향이 불가피하다.
업계는 미국의 최종 결정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WSJ는 “상무부 산업·안보국이 주도한 방침이 다른 부서의 최종 동의를 받은 것은 아니다”라며 “아직 트럼프 행정부의 공식 정책으로 확정되지는 않았다”고 언급했다.
이번 조치는 미국의 대중 첨단 기술 차단 정책 기조 연장선에서 나왔다. 전임 바이든 행정부는 2022년 10월 미국 기술이 포함된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을 사실상 제한하면서도 삼성과 SK의 중국 공장에 대해서는 적용을 1년간 유예했고, 이듬해 두 기업을 VEU로 지정해 무기한 연장했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가 VEU 자체를 폐지하면 한국 기업들도 일반 허가 절차에 따라야 하며, 이는 공급망 전반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변수다.
미국은 자국의 반도체 장비 기술 우위를 무기화하며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다. ASML EUV 장비가 2019년부터 중국 수출이 금지된 데 이어, 최근에는 HBM 등 고대역폭 메모리 수출 제한도 단행한 바 있다. 이번 장비 반입 제한이 시행될 경우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램리서치, KLA 등 미국 장비 업체의 제품이 중국으로 반입되는 경로가 사실상 차단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정부의 새 방침은 최근 런던과 제네바에서 이어진 미중 고위급 무역 대화의 흐름과도 맞물린다. 미 국방장관 피트 헤그세스는 앞서 아시아안보대화에서 ‘안미경중’ 기조의 재검토를 촉구하며, 경제와 안보의 균형을 강조한 바 있다.
이번 결정이 실제 정책으로 확정되면 첨단 기술을 둘러싼 미중 전략 경쟁은 더욱 격화될 전망이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이미 바이든 시절부터 이어진 디리스킹(De-risking) 정책에 따라 대응 방안을 마련해온 만큼, 직접적인 타격은 제한적일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중국 내 생산기지의 경쟁력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에서 정부와 기업의 공동 대응이 요구된다.
[스트레이트뉴스 박응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