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금융당국은 향후 24개월 규제 일정 선제시
전날 정부는 고위당정협의회를 열고 금융감독체계를 전면 손보겠다고 발표했다. 핵심은 금융정책 기능을 재정경제부로 이관하고, 금융위원회를 감독정책 컨트롤타워인 ‘금융감독위원회(금감위)’로 개편하는 것이다.
집행기관인 금융감독원은 건전성 감독을 맡고, 판매 관행 등 영업행위는 새로 분리·신설되는 금융소비자보호원(금소원)이 전담한다. 금감원과 금소원은 공공기관으로 지정된다.
여권과 정부는 이 개편안을 이달 25일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하고, 시행 시점을 내년 1월 2일로 제시했다. 변화의 윤곽은 분명하다. 다만 시장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제도의 강약이 아니라 ‘예측 가능성’이다. 감독 주체가 나뉘고 창구가 늘수록 같은 사안에 대한 해석과 절차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재경부와 금감위, 금감원, 금소원 체제’에서 해석 충돌과 중복 규제가 현실화되면 컴플라이언스 비용은 곧바로 금융소비자 가격과 자본비용으로 전가될 수 있다. 새 금감위가 출범과 동시에 ‘예측 가능한 감독’의 기준과 절차를 명확히 내놓아야 하는 이유다.
국제 기준은 이미 답을 제시한다. 바젤위원회의 ‘효과적 은행감독 핵심원칙(BCP)’은 권한·책임의 명확화, 위험기반 감독, 시의적절한 개입을 감독 품질의 조건으로 못박는다. 원칙은 간결하지만, 시장이 체감하려면 사전에 공표된 절차와 일관된 집행이 뒤따라야 한다. 한국형 금융기관 개편이 세계적 흐름과 보조를 맞추려면, 금감위가 바젤위원회의 핵심원칙 취지를 정책·감독 문서 체계와 연간 로드맵으로 번역해 보여주는 일이 출발점이다.
해외에선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도구를 제도화해 왔다. 영국 정부는 향후 24개월의 규제 일정을 한눈에 보여주는 ‘규제 추진과제 통합일정표(Regulatory Initiatives Grid)’를 반기마다 공개한다. 기업은 다가올 규제의 시점과 범위를 미리 파악해 시스템과 인력을 준비할 수 있다. 한국도 감독·검사·제재 예고의 ‘연간 캘린더판’을 정례화하면 현장의 불확실성을 빠르게 낮출 수 있다.
영국 건전성규제청(PRA)은 규칙과 ‘감독 기대’를 구분해 문서로 상시 공표한다. 감독대상 리스크(모델 리스크, 스텝인리스크 등)에 대해 감독 성명을 수시로 갱신하고, 업계는 여기 적힌 기대수준을 참조해 내부통제를 정렬한다. 법령과 해석 사이의 회색지대를 줄이는 효과가 크다. 국내에서도 금감위–금감원–금소원이 공동 명의로 ‘감독 기대 성명’을 상시 갱신하는 체계를 도입하면, 동일 사안에 대한 해석 편차를 좁힐 수 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비조치의견서(No-Action Letter)·유권해석서(Interpretive Letter) 제도도 참고할 만하다. 법 적용이 불명확한 사안에 대해 감독당국이 사전 질의에 응답하고, 사실관계와 법령 해석, 비조치 결론을 공개해 예측 가능성을 높인다. 케이스가 축적될수록 기업은 유사 사안을 스스로 판별할 수 있어 감독·피감독자 쌍방의 비용을 줄인다. 한국에도 유권해석과 행정지도가 존재하지만, 공개 범위와 색인·검색 편의는 더 개선할 여지가 있다.
국내 제도 환경을 보면 기반은 갖춰졌다. 금융감독원은 올해 검사업무 운영계획에서 잠재리스크 대응, 금융소비자 피해 예방, 시장질서 확립을 연간 테마로 제시했다. 대형 전자금융업자 정기검사 도입과 플랫폼 판매채널, 가상자산사업자 점검 강화도 포함됐다. 이런 ‘테마형 계획’은 그 자체로 예측 가능성을 높인다. 다만 표본 선정 로직과 리스크 시그널을 통계적으로 설명하고, 분기별 진행 현황을 공개하면 현장의 대비 수준은 한층 높아질 것이다.
소비자보호 영역에서도 움직임이 있다. 금융위원회는 7월 고난도 금융투자상품의 불완전판매를 막기 위한 감독규정·시행령 개정을 예고했다. 적합성·적정성 평가의 구체화, 대리가입 유도 금지, 부적합·부적정 판단보고서 기재 강화 등이 골자다. 금소원이 영업행위를 관할하는 새 체계에선 이 같은 세부 가이드가 ‘감독 기대 성명’으로 정리·통합되어야 중복 점검과 이견을 줄일 수 있다.
제재의 예측 가능성도 중요하다. 올해 1월 8일 시행된 ‘금융기관 검사 및 제재에 관한 규정 시행세칙’ 개정은 제재 양정 기준과 경합·가중·감경제도를 정비했다. 금감위–금감원–금소원 3자 체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에는 ‘사례집·자주 묻는 질문(FAQ)’ 형태로 최신 양정 기준과 감경제도 적용례를 정기 공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무가 참조할 개별 조항과 운영례가 투명하게 누적될수록 자의적 판단 여지는 줄어든다.
정책·감독의 분리는 세계적 흐름이다. 문제는 분리 자체가 아니라 집행의 품질이다. 영국에선 친성장 기조 속 감독기관 간 역할 조정과 규제 일정 조정이 이어지고 있다. 규제완화의 유혹과 소비자보호·시장안정의 균형을 잡는 일이 쉽지 않다는 방증이다. 한국의 새 체제가 시장 신뢰를 얻으려면, 강한 감독과 예측 가능한 감독을 양자택일로 오해하지 않도록 ‘절차의 투명화’와 ‘해석의 일관화’를 초기에 제도화해야 할 것이다.
감독의 예측 가능성은 곧 비용이다. 같은 규정이라도 언제, 누가, 어떤 절차로 집행하느냐에 따라 비용이 달라진다. 금소원이 신설되면 피감독기관은 보고·점검 창구가 늘어나고, 내부통제와 IT 재개발 수요도 증가한다. 반대로 감독기관이 절차·해석·일정을 미리 공표하면, 업계는 선제 대비로 비용을 낮출 수 있다. 이 단순한 역학을 제도에 반영하는 것이 금감위 출범의 성패를 좌우한다.
감독은 촘촘해야 한다. 동시에 업계에서도 대응이 가능하도록 예측 가능해야 한다. 두 조건이 함께 충족될 때 금융사는 인프라와 문화에 투자하고, 소비자는 공정한 보호를 체감한다. 출범 이후 한두 달이 이 체제의 신뢰를 좌우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강한 수사권의 과시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감독의 설계도다.
[스트레이트뉴스 조성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