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 하루 전 마지막 가을 수놓은 플루트의 향연
다양한 레퍼토리로 꽉 채운 90분의 낭만과 서사
지난 6일, 입동(立冬)을 하루 앞둔 저녁 세종문화회관을 찾았다. 풀루티스트 김산아의 리사이틀 감상으로 마지막 가을을 보내주기로 마음먹었다.
풀루트 독주회(리사이틀)는 다른 연주에 비해 흔한 경험은 아니다. 오케스트라 내에서 중간 중간 독주 부분이 나오는 걸 감상하는 정도는 많지만, 한 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오롯이 풀루트라는 악기가 감당해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현악기가 아닌 관악기를 들숨, 날숨으로 제어하며 관객과 만난다는 것은 마운드에 홀로 서는 투수 만큼이나 외로운 싸움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산아는 신장이 컸다. 열정적인 연주를 통해, 혼자 서 있는 무대지만 무대가 꽉 찬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상반신을 많이 쓰며 리듬속에 몸을 맡기는 연주자였다.
태권도학원을 운영했다는 아버지와 음악을 했던 어머니의 DNA를 받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로 관객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그는 국내 음대 입시에서 고배를 마시고 학부부터 독일 Würzburg 국립 음대로 직행했다. 7년여의 시간을 홀로 싸우고 갑작스런 아버지의 작고로 급거 귀국, 연세대에서 석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웃으며 하는 그의 내공이 담긴 무대였다.
한 시간 내내 하나의 악기 연주를 들어야 하는 관객을 배려한 걸까? 김산아는 이날 색깔이 다른 다양한 시대별 대표 연주자들의 레퍼토리를 들고 나왔다.
첫 순서는 바로크 시대의 대표 프랑스 작곡가 마랭 마레(Marin Marais)의 ‘플루트솔로를 위한 ‘레 폴리 다스파뉴(스페인의 광기)’로 문을 열었다. 폴리아(Folia)라는 민속 춤곡을 바닥에 깔고 총 32개의 변주를 더한 곡으로 풀루트가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담아낼 수 있는지 뽐내는 듯한 곡이었다.
이어 20세기 체코가 자랑하는 작곡가 보후슬라프 마르티누(Bohuslav Matinu)의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1번’을 연주했다. 미국 망명 시절에 작곡한 곳이라 미국 재즈의 영향을 받은 듯한 이 곡은 특유의 리듬감으로 듣는 이에게 경쾌함을 선사했다. 전쟁의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는 듯한 작곡가의 정신을 풀루티스트가 힘있는 연주로 생생하게 살려냈다.
잠시 휴식을 마치고 프랑스 인상주의 거장 필립 고베르(Philippe Gaubert)의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이 이어졌다. 특히 이 곡에선 서정성과 화려함이 동시에 빛났다. 피아노와 주고 받는 듯한 전개로 관객들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을 발산했다. 이날 반주자로 나선 피아니스트 조강은과는 예술의전당 콘서트 등에서 협연하는 등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춘 이력이 있다. 이날 하모니가 더욱 빛났던 이유 중 하나일 듯 하다.
마지막 무대는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의 ‘아르페지오네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a단조, D.821’이었다.
낭만주의 시대를 활짝 열어제친 슈베르트를 빼고 가을과 낭만을 이야기하긴 어렵다. 그런 차원에서 연주자도 슈베르트를 꺼내들었으리라 생각해봤다.
슈베르트는 늘 우리에게 알 수 없는 쓸쓸함과 동시에 따뜻한 서정을 드리우는 작곡가다. 여러 악기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풀루트가 담아내는 버전은 이날 연주 중 두고두고 다시 듣고 싶은 플레이리스트로 남을 듯 하다.
풀루티스트 김산아의 이번 연주회는 ‘귀국 리사이틀’이라는 타이틀이 붙었지만 사실 귀국은 이미 코로나19 발발 전이었다. 이후 대학원을 다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아이를 낳느라 연주회가 늦어졌다며 활짝 웃는 그의 모습에서 예술을 삶과 유리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게 하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연주자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알베르 까뮈는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을 전하며 그가 생각하는 예술의 의미에 대해 말한 적 있다.
까뮈는 “예술이란 고독 속에서 혼자만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기쁨과 고통을 담아내는 도구이며,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매개체”라며, “그래서 예술가는 자신을 세상과 분리시켜서는 안된다”고 전했다.
아이들을 너무 사랑해 아이들에게 풀루트를 가르치는 일이 너무 행복하다는 연주자가 공연이 끝나고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해하는 모습이 인상적인 밤이었다.
[스트레이트뉴스 장석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