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디? 아, 그 시리아 아기... 걔 불쌍하지. 근데 뭐?」
「난민 구호, 무조건 수용과 엉덩이 빼기, 그리고 대놓고 거부하기」
「독일은 난민 위해 13조 원의 추경예산 편성 예정, 우리는?」
「이유 없는 포용으로 세 살배기 꼬맹이 세리 껴안기를」

 

인간의 두 얼굴, 예기성 공포

전쟁을 포함, 매년 수십, 수백만 명이 각종 사고로 세상에서 사라진다. 세월호가 침몰해 300여 명이 희생되었다는 가슴 아픈 뉴스는 미국인들에게 잠깐의 놀라움과 약간의 인류애, 그리고 사익에 매몰된 사회 및 감독기관의 부패와 관할 기관의 처참한 책임방기로 인한 국가 부재 사태에 대한 경각심을 주었을 뿐이고, 뉴욕에서 발생한 9‧11 테러로 3,000여 명이 사망했다는 뉴스 역시 한국인들에게 그리 길지 않은 놀라움과 브레이크 없이 독주하는 미국에 대한 우려를 주었을 뿐, 미국 로열 캐리비안 인터내셔널사社가 보유한 세계 최대 크루즈선 MS 얼루어 오브 씨즈호의 매출이 줄어드는 일도,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의 유동인구가 감소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먼 곳에서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도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인식할 뿐이다. 그 위협이 실제로 나에게 닥치리라는 가능성은 생존의 본능에 의해 간단히 무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네 아주머니가 강도의 칼에 찔려 사망하거나 매일 아침 싹싹한 인사를 건네며 등교하던 꼬맹이가 성폭행을 당했을 때, 우리는 동일한 일이 나에게도 언제든 닥칠 수 있음에 치를 떨며 멀리 넓게 볼 수 있는 시야를 포기하고 창문에 방범창을 단다.

먼 곳에서 발생한 대량의 사망 사고와 이웃에서 발생한 단 한 명의 사망 사고, 둘 사이에는 공포신경증恐怖神經症의 일종인 ‘예기성 공포’가 숨어 있다. 우리는 기억에 각인되어 있는 그 공포가 지시하는 대로 나만을 위해 행동할 수도 있고, 이미 공포 상황에 처한 타인을 위할 수도 있다. 물론,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있다.

▲ 내전 중인 시리아 하마Hama 도심의 거리 전경

난민을 대하는 세 가지 표정

지금 온 유럽이 시리아 난민으로 북새통을 겪고 있지만, 전 국민의 20%가 난민으로 전락해 끝도 없이 유럽으로 밀려드는 사태는 며칠 사이, 아니 몇 달 사이에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다.

시리아 국민들이 자국을 본격적으로 이탈하기 시작한 원인은 이슬람 시아파인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정권과 수니파인 이슬람 반군의 내전 때문이고, 그 싸움은 2011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정부군과 반군에 분산된 각국의 정략적 지원으로 인해 시리아가 지구의 화약고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리아 사태에는 각국의 군사적 이익과 이슬람 각 분파의 정치적 이해가 첨예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세계는 그동안 자국민들 간의 정치‧종교적 반목에 드러내놓고 깊이 관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세 살배기 꼬마 쿠르디가 해변에서 발견된 후, 난민 쿼터 할당이라는 기계적인 문제로 시끄럽던 유럽의 각국들은 하나 둘 ‘포용’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자신의 나라를 탈출한 시리아 사람들이 육로와 지중해를 통해 헝가리로, 이집트로, 요르단과 터키로, 북아프리카로 이동하는 도중 숱하게 죽어나가도 얻을 수 없었던 세상의 포용을 세 살배기 꼬마가 얻어냈던 것이다.

이집트의 한 억만장자는 섬을 살 수만 있다면 난민들에게 정착지로 제공하고 싶다고 했다. 핀란드 총리는 비어 있는 자신의 저택을 난민들에게 개방하겠다고 했다. 난민 쿼터 할당에 시큰둥했던 영국도 15,000명을 받겠다고 했으며, 그동안 관망만 하고 있던 미국도 실무그룹을 구성해 지원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급기야 바티칸의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나서서 “난민들에게 용기를 가지고 힘을 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니 그들에게 머물 곳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시리아 난민을 대하는 세계인의 표정은 세 가지다. 하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처럼 무조건 수용하는 표정이고, 또 하나는 영국, 미국처럼 자국의 형편을 살펴가며 주춤주춤 받아들이는 표정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동유럽의 헝가리, 폴란드, 체코처럼 대놓고 거부하는 표정이다.

 

시리아 난민 쿠르디(3세)와 한국 불법체류자 세리(3세)

굳이 전쟁포로나 난민 문제를 다룬 제네바협정까지 들추지 않더라도, 태평양이나 대서양 망망대해에서 조난을 당해 떠돌았던 수많은 선원들을 떠올려 보면, 난민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시리아와 직접적인 군사 문제가 얽혀 있는 일부 국가 외에 영국과 미국, 헝가리, 폴란드, 체코 등은 무엇 때문에 난민 수용을 대놓고 거부하거나 엉덩이를 반쯤 빼고 있는 것일까? 두말할 것 없이 먹거리, 즉 난민이 자국 경제에 끼칠 영향 때문이다.

“쳇,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남 줄 게 어디 있어?”

이런 지경에 인류애는 없다. 인류애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강 건너 불구경’에 딱 좋은 후렴구일 뿐이다. 사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만 하면 예기성 공포는 발동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의 푸념에서 주목할 것은 ‘우리’라는 테두리다. 우리는 그 테두리를 ‘민족’이라고 부른다.

이제 난민 사태를 바짝 줌인zoom-in해서 피부에 와 닿는 예기성 공포로 느껴보자. 단일민족이 무슨 자랑거리라고 신나게 순혈주의를 떠들어댔던 우리나라도 다민족국가의 길로 들어선 지 이미 오래다. 당연히 일부 난민과 대다수의 불법체류자로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3포 세대를 넘어 N포 세대가 되어버린 우리 청년들에게 동남아에서 건너온 불법체류자들은 거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럼, 예기성 공포는 어떤 시선으로 대해야 할까? 우리나라와 난민 수용에 가장 적극적인 독일을 비교해보자. 지난 6일,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통과한 6,000여 명의 난민들이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독일에 도착했고, 7일에는 추가로 2,000여 명이 더 도착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매일 수천 명의 시리아인들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빠져나오고 있다. ‘무조건 수용’을 천명한 독일은 올해에만 약 80만 명의 난민이 입국할 것으로 예상, 13조 원에 달하는 추경을 편성할 예정이다.

그런데 난민 신청자 수만 보면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다. 지난해에만 2,896명의 외국인이 난민 신청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런데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진 사례를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2,896명 중 고작 94명, 3.2%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 치자. ‘불법체류자들이 우리 국민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원성을 받아들여서, 이처럼 초라한 비율도 괜찮다고 치자는 말이다. 정작 부끄러운 것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법무부 발표에 따르면, 2015년 현재 우리나라에 불법체류 중인 미성년자 수는 통계에조차 포함되지 못한 20,000여 명을 포함하면 총 110,000명을 넘어선다. 이 아이들 중 대부분은 불법체류자나 난민 신청자가 아니라 그들의 아들과 딸들이다. 안성에서, 수원에서, 서울과 부산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부지기수다. 아빠와 엄마는 인도네시아 출신이지만 평택이 고향인 세 살배기 꼬맹이 세리도 이들 중 하나다.

지난해 말, 새누리당 이자스민 의원은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을 대표 발의했다. 그런데 동참하는 새누리당 의원이 없어서 애를 먹었으며, 보수를 자처하는 일부 단체는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광고까지 실어가며 법안 저지에 나서기도 했다. 더욱 처참한 현실은 법안이 공개된 후, 의원실은 ‘세금도 안 내는 외국 꼬맹이들을 우리가 왜 혈세로 먹여 살려야 하느냐’는 분노성 전화가 폭주해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독일이 13조 원을 준비 중인 이 세계시민의 시절에 말이다.

 

이유 없는 포용

서방 세계에 포용과 인류애를 선사하고 하늘로 간 시리아 꼬마 쿠르디. 그 아이가 해운대나 광안리 또는 경포대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면 우리의 (경제)민족주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2015년의 한반도는 경제 살리기에 관한 한 소위 ‘몰빵’을 넘어 온 세상을 품에 안을 듯이 글로벌하게 ‘설레발리제이션’을 쳐대고 있다. 우리 땅에서 태어난 세 살배기 세리에게 공짜 밥 먹이고 공짜 옷 좀 입혀주자는 보수정당 소속 의원의 법안이 역설적이게도 보수단체들의 극렬한 저항에 부딪힌 이 몽매한 시절, 쿠르디가 해운대에서 떠오른다면 우리의 민족주의가 어떻게 반응할지 도무지 답할 자신이 없다. 일본인들이 한국인 불법체류자들을 세금이나 도둑질하는 하층 국민이라고 손가락질 한 게 불과 20년도 되지 않은 이때, 독일이 13조 원의 추경예산을 ‘무조건’ 편성 중인 이때에...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 ‘인류애 넘치는 일류 민족이 되느냐, 오직 내 먹을 것만 챙기는 삼류 민족이 되느냐’ 하는 기로가 세리의 눈을 통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더 압축해서, ‘한국인 불법체류자를 하층 인간으로 대했던 일본이 될 테냐, 시리아 난민을 환대하는 독일이 될 테냐’ 하는 생명존중 역사의 기로가 그들과 동일한 조상을 가진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사회복지의 날’에 말이다.

우리는 과연 어떠해야 할까? 불법체류자와 난민은 다르다는 이성적 핑계만 주워섬기며 예기성 공포를 애써 무시하려는가? 세계 곳곳에서 수시로 발생하고 있는 민족과 세계의 충돌에 “에이그, 쯧쯧...” 하면서 그저 방관만 하고 있으려는가!? 아무도 돕지 않는 사람이 기다릴 것이라고는 누구도 나를 돕지 않는 때뿐이다.

 

김태현 두마음행복연구소 소장, 인문작가, 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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