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아래) 새정치민주연합 전 공동대표가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재인 대표의 '문안박(문재인, 안철수, 박원순)' 공동지도부 구성 제안에 대한 거부의 입장을 발표하며 문안박 체제 계획은 무산됐다. 사진은 국회 본청 내 당대표실에서 문재인(위) 대표가 기자회견하는 모습 2015.11.29. ⓒ뉴시스

이제 조문정국도 끝났다. 그 시간만큼은 모두가 민주주의자였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뜻을 이어받은 적자였다. 그러나 장례가 끝난 다음날 모두가 현실로 돌아와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문재인 대표의 사퇴 압박과 초재선 의원들의 문안박 연대의 지지선언, 안철수 의원의 연대 거절 등으로 더 깊은 내홍과 혼란으로 빠져들고 있고, 새누리당과 청와대는 국민을 IS에 비교하는 가하면, 복면시위 처벌을 외치면서 강압통치를 선언했다.

국민들은 어느 곳 하나에 편안하게 시선을 던질 수가 없는 정치권을 보면서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다. 정치는 파멸로 치닫고 있다. 무지렁이들의 기득권 싸움, 동네 모리배 같은 국가 권력의 패권적 폭력과 같은 행태들만을 목도하면서 국민들은 눈을 돌리고, 애써 정치를 외면한다.

 

보색대비의 정치

정치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양 날개로 비상하는 국가 운영 시스템이다. 진보가 없으면 보수가 없고, 좌파가 없으면 우파가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을 빌자면 ‘평행론(parallelism)’적 체계가 정치의 기본적 작동시스템이다. 다르되 한 몸이고, 갈등하되 하나가 죽으면 함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적 관계로 동일한 방향을 바라보며 나가는 시스템이 정치이다.

이러한 생태학적 정치 시스템은 ‘보색대비 정치’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 야당과 여당은 보색대비 관계에 놓여 있을 때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된다. 보색대비란 보색 관계인 두 색을 나란히 놓았을 때 서로의 영향으로 각 색의 채도가 더 높아 보이는 색채 대비를 말한다. 서로 보색 관계인 적색과 청록색을 나란히 놓으면 각 색이 더 선명해 보인다. 정치적 보색대비는 각 정당의 정치적 선명성을 높이고, 국민들이 각 정당의 활동에 대해 예측 가능하게 하고 따라서 정치적 안정성을 도모할 수 있다.

그러면 정치적 보색대비의 요소들은 무엇이 있을까? 무엇보다 정치 콘텐츠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각 정당의 강령, 정책들이 제시하는 정치적 비전, 목적, 실천 요소 및 방향들이 정당간의 차이와 구별 짓기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다음으로는 인적 구성의 특성을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정치인이 정당의 대표성을 가지고 어떠한 상징적 이미지와 정치적 색깔을 국민들에게 제시하는가 하는 차원이다. 특히 우리 정치는 인물 중심의 정치가 오랜 시간 정치 문화의 중심에 자리잡아왔다. 따라서 어떤 인물이 당 대표를 하는가, 누가 대선 후보가 되는가는 정당의 정체성과 대의성을 상징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보색대비표

숫자놀이 정치에 오염된 보색대비 정치

그러나 작금의 정치 현실은 여당과 야당에서 정치적 보색대비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새정연과 새누리 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국민에게 물어보면 과연 무슨 대답이 나올까? 새정연은 자기들끼리 집안싸움하다 망하는 당이고, 새누리는 ‘종북’을 입에 달고 사는 당이라는 차이 이외에 어떤 구별 짓기가 가능할까? 정치적 보색대비의 소멸은 책임정치의 소멸을 가져온다. 공약은 당연히 안지키는 것이고, 정책은 책임지지 않고, 내뱉은 정치적 언설은 곧 망각하는 정치행위. 모두가 회색지대에서 오직 여론 지지율만 바라보고 행동한다. 대통령, 국회의원, 자치단체 모두가 여론이라는 숫자 놀이에 빠져 있는 것이다.

최근 최창집 교수는 한 정치 강좌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로 회귀하는 위험지대에 있으며, 이를 ‘국민투표제적 민주주의(plebiscitarian democracy)’라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국민투표제적 민주주의는 대표나 통치자 선출만 있고 ‘그 대표나 통치자가 자신을 선출한 시민 유권자들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정치체제’라고 정의했다. 그가 이야기하는 국민투표제적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의 최악의 상황으로 포퓰리즘에 기대어 군림하되 책임지지 않는 신파시즘적 양태라 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여론이라는 숫자놀이의 정치가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지금 여당과 야당, 대통령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여론조사 지지율이다. 현재 매주 발표되는 여론조사는 정치 현실을 규정하고 있다. “국정 교과서로 하락했던 대통령의 지지율이 한·중·일 정상회의 등으로 3주 만에 반등했다. 국정 지지율이 46%다.” 라는 결과는 대통령의 전횡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되고 있다. “새누리당 지지도는 전주와 동일한 40.6%를 기록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지지도는 1.8%포인트 하락한 25.4%로 다시 20%대 중반으로 내려앉았다.”라는 수치적 사실은 정당의 현실을 규정해버린다. 따라서 새정연은 미래가 어두워 보인다. 이제 새정연과 새누리를 구별할 수 있는 정치적 보색대비는 여론조사 지지율이 유일하다.

정치 콘텐츠가 없는 정치, 숫자 놀이로 규정되고 구별되는 정치. 진정으로 정치의 종말이 아닐 수 없다. 정치는 없는데, 권력을 갖고자 하는 인물들이 공천싸움, 선거 싸움으로 국민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숫자 안에 갇혀서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지 못하는 인물들이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의 보색대비 정치를 흐려놓음으로써 우리 사회의 미래는 더욱 짙은 어둠으로 덮이는 것 같다.

 

박태순
파리1대학 정치학 박사
성균관대학 초빙교수
미디어로드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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