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이트뉴스=이호연 선임기자] 대한민국 현행법상 범죄수익을 환수할 수 있는 근거는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형법을 포함해 '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1995년)', '마약류 불법거래 방지에 관한 특례법(1995년)',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2001년)', '불법정치자금 등의 몰수에 관한 특례법(2005년)', '부패재산의 몰수 및 회복에 관한 특례법(2008년)' 등 5개에 이른다.

하지만, 박근혜 탄핵사태로 혼란한 틈을 타 해외 도피 범죄수익을 환수할 수 있는 법 조항을 삭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지 않아도 나라 곳간은 텅 비어있고 국가재정 건정성 이슈가 주요 화두로 등장했는데, 우리 정부가 과연 지능형 해외 도피 범죄수익을 환수할 권리를 포기했다는 점은 상식과 공정에 반하는 조치일 것이다.

국내외 은닉 비자금은 중대한 범죄

영국의 조세정의 네트워크(TJN, Tax Justice Network)는 지난 1970년대부터 2010년까지 한국에서 해외 조세피난처로 이전된 자산은 총 7790억달러(약886조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절대 금액으로는 중국이 1조 1890억달러로 1위를 차지했고, 러시아가 7980억달러로 2위를 차지했고, 한국은 3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인구수 및 GDP규모 대비 상대적인 해외 도피금액은 압도적 세계 1위라는 또 다른 불명예를 안은 것이다.

TJN은 한국의 경우 지난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피격 사망 이후 정치적 혼란기에 급격한 자본 유출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은 2018년 6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1978년 미 하원 외교위원회의 ‘프레이저 보고서’에 박정희 정권이 독일 차관과 베트남 참전용사 지원금을 불법 은닉한 스위스 비밀계좌의 계좌번호가 적시돼 있다”고 주장하면서, “미 의회 공식 문서로 드러난 박정희 정권의 비자금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수 백조원으로 추정되는 해외 불법 은닉재산을 반드시 국고에 환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리고, 최순실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해외은닉재산도 국고로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인의 불법 자금수수행위는 엄중히 처벌을 받아야 할 중대범죄다.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2조에 따르면 조세포탈에 해당하는 금액이 연간 10억원 이상인 경우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돼 있고, 동법 5조에 따르면 국고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손실이 5억원 이상인 경우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돼 있다.

한진그룹 탈세·비자금 '재벌가의 흑역사'

2018년 5월 서울국세청은 한진가 2세들이 조중훈 창업주의 스위스 비밀계좌 등 재산을 상속받으면서 신고하지 않았다고 보고, 고 조양호 회장 등을 조세포탈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이에 앞서 국세청은 한진가 2세 5남매(조현숙·조양호·조남호·조수호·조정호) 측에 상속세와 가산세 총 852억원을 부과한 바 있다.

범 한진가(家) 2세들은 고(故) 조중훈 창업주의 해외 재산과 관련해 800억원대 상속세 부과 처분을 받은 것에 불복, 조세심판원에 청구를 냈다. 2002년 11월에 사망한 조중훈 창업주의 해외자산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고의 탈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현행 국세기본법 제26조의 2에 따르면, 통상적인 국세부과 제척기간은 5년이다. 하지만, 사기나 그 밖의 부정한 행위로 조세포탈이 있었다면 10년으로, 역외거래에서 발생한 부정행위로 국세를 포탈한 경우에는 15년으로 늘어난다.

한진가는 상속세 미납은 고의가 아닌 단순누락이고, 이에 따른 상속세 부과 제척기간은 10년이므로 2013년 5월까지만 과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국세청은 이들이 애초부터 해외자산의 존재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다고 봤다. 고의 누락인 경우 부과 가능 기간이 15년이고, 그 전에 부과한 상속세이기 때문에 적법하다고 주장했다.

조세심판원은 심리를 통해 국세청이 추가 제출한 자료 등을 바탕으로 한진가 2세들이 이미 비밀계좌의 존재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다고 판단, 기각결정을 내려 사실상 국세청의 손을 들어주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한진그룹 일가는 항공기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리베이트로 받은 거액의 자금을 해외의 조세피난처에 숨겼다는 의혹과 관련해 검찰의 수사를 받아왔다. FIU(금융정보분석원)도 대한항공에 수상한 해외자금 흐름이 포착됐다고 검찰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벌의 탈세와 은닉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2008년 삼성특검은 4조 5천억 원 규모의 차명 자산이 삼성 임직원 명의의 차명계좌 1,199개의 차명계좌가 밝혀냈다. 이후 민주당은 금감원이 삼성의 차명계좌 32개를 추가로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기업의 비자금 조성은 대체로 매출 누락이나 비용 부풀리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어떤 경우이든 비자금 조성행위는 해당 기업과 소액주주의 돈을 도둑질한 것이고, 국가에 납부해야 할 조세를 포탈한 중대한 범죄다.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3조에 따르면, 업무상의 횡령과 배임 등으로 이득가액이 50억원을 초과하는 경우,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돼 있다.

문 대통령, 해외 범죄수익 환수 '일성'

언론의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의 탈세 의혹 등에 대한 대대적 보도로, 부정적 여론이 들끓자 청와대가 움직였다.

문 대통령은 2018년 6월 14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최근 사회지도층이 해외소득과 재산을 은닉한 역외탈세 혐의들이 드러나면서 국민들이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며, "불법으로 재산을 해외에 도피 은닉하여 세금을 면탈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공정과 정의를 해치는 대표적인 반사회행위이므로 반드시 근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적폐청산 일환으로 검찰이 하고 있는 부정부패 사건과 관련해서도 범죄수익 재산이 해외에 은닉돼 있다면 반드시 찾아내어 모두 환수해야 할 것"이라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5월 14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해외재산 은닉과 역외 탈세에 강경대응을 지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5월 14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해외재산 은닉과 역외 탈세에 강경대응을 지시했다.

문 대통령은 국세청, 관세청, 검찰 등 관련 기관이 함께 참여하는 '해외범죄수익 환수 합동조사단' 설치를 지시했다. 불법 해외재산 도피는 활동영역이 국내뿐만 아니라 조사하기 어려운 국외까지 걸쳐 있고, 전문가의 조력을 받아 치밀하게 행해지기 때문에 한 부처가 개별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빈손으로 꼬리 내린 합동조사

문 대통령 지시가 떨어진 지 일주일이 지난 6월 21일, 대검찰청은 국세청과 관세청, 금융감독원, 예금보험공사, 금융정보분석원 등과 합동으로 '해외불법재산환수 합동조사단(이하 ‘합조단)'을 출범시켰다고 발표했다.

범정부 차원의 조사단을 출범시킨 것은 자금세탁 범죄가 갈수록 국제화·지능화되고 있어 여러 정부 기관이 협업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조사단장은 당시 수원지검 여주지청장이 맡았고, 현직 검사 3명을 포함 각 기관의 역외탈세 및 자금세탁, 범죄수익환수 전문인력 17명이 구성원으로 참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합조단이 수행할 구체적인 업무는 ▲ 조세피난처 등을 이용해 해외재산과 소득을 은닉하는 역외탈세 행위 ▲ 외국환거래법, 대외무역법 등을 위반해 페이퍼컴퍼니 등을 통해 국내재산을 국외로 도피하는 행위 ▲ 수출입가격 조작, 해외 가공거래 등을 통한 기업의 해외 비자금 조성과 은닉·도피 및 이에 관계된 횡령·배임 행위 ▲ 범죄수익을 숨기기 위해 역외로 이전하는 범죄수익은닉법 위반 행위 등이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재산찾기특별위원회 위원장인 안민석 의원은 2018년 말 “문 대통령이 합동조사단을 출범시켰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결과를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조사한 게 없다면 그 사유와 향후 조사계획을 국민 앞에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강변했다.

이호연 스트레이트뉴스 선임기자
이호연 스트레이트뉴스 선임기자

실제로 합조단은 범정부 차원의 고급 수사 인력이 대거 달라붙었음에도 2019년 6월 활동 종료를 앞둔 시점까지 실적 발표나 대국민 중간보고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사실상 빈털터리로 막을 내린 셈이다.

합조단, 환수 근거법 삭제 후 설치

2019년 4월 2일 연합뉴스가 단독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합조단의 주무 기관인 대검찰청은 해외불법재산 환수 근거 조항을 마련하기 위해 최근 비공개로 연구용역을 발주했다는 것이다. 합조단 해체 시점이 불과 2개월여 남은 시점이었다.

2017년 7월 18일 시행된 외국환거래법 개정안에 기재부 장관 명령으로 대외채권을 회수할 수 있도록 규정된 제7조가 삭제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검찰 등은 기재부가 기업의 해외활동 자율화 촉진 명목으로 삭제한 이 해외채권 환수 근거를 대체할 법안이나 보완 방안 등을 검토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대체법령이 마련되지 않으면 해외로 재산을 빼돌린 사회지도층에 특경법을 적용해 처벌하기도 힘든 상황”인데, “기재부와 법무부 등이 당시 무슨 생각으로 법을 고쳤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적폐청산’ 지시 한 마디에 관련법에 대한 검토도 없이 조직부터 꾸려 1년 동안의 허송세월을 보낸 셈이다.

얼빠진 기재부와 국회사무처 직원에 놀아난 국회

2016년 9월 30일 기획재정부는 정부 발의로 외국환거래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문제로 정치권이 혼돈상태에 빠져 있던 틈을 이용해 기획재정부가 법안을 발의한 것이다.

법률 개정안 제목은 ‘대외채권 회수 명령 요건의 강화’(안 제6조제1항제3호 신설, 현행 제7조 삭제)이었다.

정부가 발의한 법안의 요지는 기획재정부장관은 평상시에 비거주자에 대한 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거주자로 하여금 해당 채권을 추심하여 국내로 회수하게 할 수 있도록 규정한 제7조를 삭제하고, 천재지변 등 경제사정의 중대하고도 급격한 변동이 있는 경우에만 해당 채권을 회수할 수 있는 제6조 제1항 제3호 신설한 것이다.

사실상 해외 은닉 범죄재산의 환수를 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문위원이 작성한 검토보고서나 심사보고서에는 단 해당 법안과 관련된 내용은 단 한 글자도 없었다.

이 법안은 2016년 11월 24일 열린 제356조 기획재정위원회 경제재정소위원회에서 별다른 쟁점 없이 처리됐다. 그리고, 2016년 12월 22일 기획재정위원회는 전체회의를 통과했고, 2016년 12월 29일 법사위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당시 유일호 장관을 포함한 기획재정부 공무원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법안을 발의했는지 이유가 궁금하다. 시대 정신을 망각한 얼빠진 공직자이란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기획재정부 담당 공무원은 대검찰청의 용역발주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국회 공무원들은 이렇게 중대한 법안에 대해 아무런 심사보고서나 검토보고서에 한 줄 언급도 하지 않았고, 당시 소위원회 속기록을 찾아보니, 핵심을 벗어난 몇 마디 발언만 오고 갔을 뿐이었다. 국회 공무원들도 뼈를 깎는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거대 은둔 세력이 막후에서 막강한 로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등의 시나리오가 단순히 픽션만은 아닌 듯하다.

FATF 긴급 권고사항 '조속 입법해야'

FATF(국제자금세탁방지지구)가 2020년 4월 20일 제2차 상호평가 보고서를 통해 우리 정부가 우선적으로 취해야 할 8가지 권고사항(Priority Actions) 중 해외 은닉범죄수익 환수와 관련된 사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특정비금융사업자(DNFBPs) 전 부문에도 자금세탁 및 테러자금조달 방지(AML/CFT) 의무를 적용하도록 AML/CFT 체계를 확대하고, 이들 부문의 감독 당국을 지정해야 한다.

둘째, 국내 및 국제기구 정치적 주요인물(PEPs, Politically Exposed Persons)을 포함하도록 AML/CTF 의무를 확대해야 한다.

셋째, 조세범죄 기반 자금세탁범죄를 기소할 수 있도록 법령을 개정, 자금세탁 전제범죄에 포함되는 조세범죄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

넷째, 몰수대상 자산 중 실제 환수액을 늘릴 수 있는 조치를 지속적으로 모색하고, 몰수 및 환수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기제와 조치를 체계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여섯째, 동결 의무를 DNFBPs와 모든 자연인법인까지 확대하고, 확인된 제도적 미비점을 해결해야 한다.

일곱째, KoFIU의 IT 자원을 업그레이드하고, KoFIU 기관 내 지식이 유지될 수 있도록 장기근무 인력의 수를 확대하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각국은 세원확보를 위해 해외금융자산 신고제 및 해외 불법 은닉자산 환수를 위한 다양한 법과 제도를 시행하고 있어, 역외 불법 은닉자산은 먼저 발견한 나라의 몫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에서 빠져나가 해외에 숨겨둔 자금이 사모펀드로 둔갑해 국내에 반입돼 대형 M&A 등에 투자와 관련돼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른바 ‘검은 머리 외국인’인 것이다. 만약에 거대한 입법 로비 작업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이들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 운영시스템에 조기경보시스템(Early Warning System)이 없거나, 설령 있더라도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문 정부는 해외 불법 도피재산의 환수를 국민 앞에 약속하고도 유야무야다. 빈 수레만 요란하다는 비아냥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FATF의 권고사항의 입법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제대로 한 일이 없다고 욕먹는 180석의 여당이 제대로 할 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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