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부터 대미 반도체 누적 무역적자 5.4조원
미국서 만든 칩 한국서 다시 패키징하는 까닭
AEI “한국에 관세 부과 시 미국에 부담…중국에만 집중해야”

SK하이닉스 고대역폭메모리(HBM). 사진=뉴스1
SK하이닉스 고대역폭메모리(HBM). 사진=뉴스1

미국이 반도체를 볼모로 한국에 관세협상을 압박하고 있지만, 정작 한국의 대미 반도체 무역수지는 3년째 적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내세웠던 관세 부과 명분이 모순됨을 보여준다. 게다가 한국 반도체에 대한 관세 부과 시 미국 제조업에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현지 정책 자문 기관의 보고서까지 나왔다.

30일 관세청에 따르면 한국의 대미 반도체(프로세서와 컨트롤러, 메모리, 기타) 무역수지는 2023년부터 2025년 6월까지 39억달러(약 5조4000억원) 적자다. 수출이 27억달러, 수입이 66억달러였다. 이런 무역적자 원인은 원달러 환율 상승(원화가치 하락)도 작용했고, 미국에서 생산한 칩을 한국에 들여와 패키징(후공정)한 몫이 컸던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공공정책 싱크탱크 기관인 AEI(American Enterprise Institute)가 최근 보고서를 내고 이러한 반도체 무역구조의 맹점을 지적했다. AEI 선임연구원 크리스 밀러는 “미국이 중국, 대만, 특히 한국에서 수입하는 칩의 양이 매우 적다는 점이 눈에 띈다”며 2023년 자료를 들어 미국은 중국에서 40억달러, 한국에서는 10억달러 미만을 수입한 반면, 수출은 중국(홍콩 포함)에 110억달러 이상, 한국에는 20억달러 이상으로 더 많았음을 짚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칩을 생산하는 두 나라와 상당한 칩 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 밀러는 이런 현상의 원인에 대해 “부분적으로는 대만과 한국에서 중국으로 보내진 칩이 기기에 내장된 후 미국으로 수입될 때 칩이 아닌 휴대폰과 컴퓨터로 간주되기 때문”이라며 또한 “칩이 한 국가에서 제조된 후 다른 국가에서 패키징 및 조립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봤다.

그는 이어 “미국으로 칩을 수출하는 주요국 중 일부가 미국산 칩의 주요 수입국이기도 하다”며 “이는 대부분의 칩이 미국에서 생산돼 저비용 국가에서 패키징 된다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패키징은 칩 제조보다 노동집약적이다.

크리스 밀러는 특히 “미국이 수입하는 400억달러 상당의 칩 중 상당수는 실제로 미국에서 제조돼 해외에서 패키징된 후 미국으로 재수입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러한 칩에 관세를 부과하면 이미 미국에서 고부가가치 제조 공정을 진행하고 있는 제조업체에 불이익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관세는 칩에 대해 실제로 상당한 무역장벽을 갖고 있는 국가에만 부과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며 “한국, 일본, 대만, 동남아시아 국가를 포함한 대부분의 주요 칩 생산 국가는 이러한 장벽이나 칩 관세를 부과하지 않지만, 중국은 칩 산업 보조금 및 비시장 관행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므로, 향후 관세는 무역장벽이 없는 국가보다 중국 특유의 시장 왜곡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당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의 대미 무역흑자를 꼬집어, 품목관세와 상호관세를 부과키로 했었다. 반도체에 대해선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한 품목관세를 조만간 부과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중이다.

하지만 한국은 반도체가 대미 주요 수출 품목이면서도 되레 무역적자를 보는 형편이라 트럼프의 관세 부과 명분은 떨어진다.

더욱이 이러한 무역구조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 내 패키징을 투자하면서 변화 중이다. SK하이닉스는 미국 인디애나주에 AI 메모리(HBM)용 어드밴스드 패키징 생산 기지를 건설하고 2028년부터 가동한다는 목표다.

삼성전자는 이미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 중이며 2030년까지 총 450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임을 밝힌 바 있다. 이 투자 계획에는 첨단 패키징 팹 신설도 포함됐다. 양사가 이미 미국 역내 생산을 늘리고 있던 참이라 트럼프가 관세로 압박할 명분은 약했다는 지적이다.

앞서 미국과 EU는 상호관세 협상을 타결하면서도 15% 관세율을 적용하기로 합의했다. 그 속에 반도체 장비 등 전략 품목에 대해서는 상호 무관세 방침을 유지하기로 한 게 부각된다.

재계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반도체에 대한 관세 압박을 지속하는 것은 한국의 핵심 수출 산업을 흔들어 협상의 우위를 지키려는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과의 다른 무역협상에서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전략인데, 우리 정부도 반도체 관세는 거꾸로 미국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를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스트레이트뉴스 이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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