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만 시집『황소가 가다』
늦깎이 시인이 던지는 묵직한 삶의 성찰

박태만 시집 '황소가 가다'
박태만 시집 '황소가 가다'

박태만 시인의 시집 『황소가 가다』는 인생 후반부에 접어들며 새롭게 언어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시인의 조용한 고백이다. 황소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나아가며 삶의 흔적을 되새기고, 그 시간 속에서 시를 건져 올린다.

마치 오랜 침묵의 돌벽에 새긴 문장처럼, 이 시집은 고요하고 단단하다. “영감 많은 사춘기에 써 내야 할 예쁜 시집을 이제 백발이 성성해 낸다는 일, 이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라는 민용태 고려대 명예교수의 추천사처럼, 책은 단순한 창작을 넘어선 생의 성찰이며 겸허한 예술의 귀결이다.


황소의 걸음으로 나아가는 시


늦깎이 시인의 첫 시집은 거창하지 않다. “심심할 때 수면제로 사용해도 좋다”는 시인의 말처럼, 그의 시는 세상의 중심보다는 가장자리에서 피는 들꽃에 가깝다. 그러나 그 들꽃은 놀라운 생명력을 품는다. 오랜 시간 쌓여온 체험과 무르익은 감정, 눈빛 속 인생의 주름을 담백한 언어로 풀어내며 독자를 묵상의 세계로 이끈다.

이 시집은 단순한 창작이 아닌, 한 평생을 돌아보며 ‘삶의 두루마리’를 거꾸로 읽는 여정이다. 아버지의 논밭을 따라 걷던 시인의 시선은 이제 심우도(尋牛圖)를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으로 변해 있다. 그 눈길은 우직함과 사랑, 절제와 자조가 어우러진 진실된 문장이다.


아버지와 황소, 삶의 근원으로 향한 시적 순례


황소는 이 시집을 관통하는 존재이며, 곧 아버지의 상징이다. 단순한 동물 이미지가 아니라 땅과 하늘을 잇는 노동의 존재로 등장하며, 박 시인은 황소의 멍에를 짊어진 아버지의 황금빛 등판을 “새 생명의 태반”이라 부른다.

박태만 시인
박태만 시인

황소는 마침내 “푸른 소에 실려 고향 동굴 암벽 속으로” 돌아가고, 남겨진 자는 약수암의 벽화 앞에 묵묵히 선다. 이는 불교적 상상력과 자연철학이 어우러진 삶의 순환에 대한 깊은 관조다. 단지 회고가 아닌, 존재의 뿌리를 되묻는 수행의 장면이다.


시는 기술이 아니라 진솔함이다


추천사와 심사평은 박태만 시의 힘을 ‘기교’가 아닌 ‘진솔성’에서 찾는다. 그의 시는 안타까움과 사랑, 웃음과 회한을 오롯이 담고 있다. 하이쿠(排句) 형식으로 표현한 「가로등」-"태풍에 늦은 귀갓길 / 딸을 기다리는 / 가로등"은 짧지만 강한 정서적 울림을 준다.

또 「이력서」에서는 “살다 보면 이력서를 쓰게 된다 / 얼굴 주름”이란 시구를 통해 삶의 흔적을 고백처럼 풀어낸다. 사소한 일상조차 시적 대상이 되며, 그 속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눈은 따뜻하고 깊다.


시인의 미로, 삶의 방점은 '평화'


시집 곳곳에는 늦음과 죽음이 스며 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어둡지 않다.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인다”는 문장에서처럼, 박 시인의 시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의 평온이 있다. “우리 속에서 장애물을 넘고 / 그 너머 담장을 넘는다”는 구절은 인간 존재의 단단함과 순수함을 함께 보여준다.

“산다는 것은 / 디딤돌보다 키가 큰 미로”라는 시구는 삶을 설명보다 체험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드러낸다. 마지막 구절 “웃자, 그냥 웃자”에서는 삶의 고단함과 평화를 함께 품은 맑은 웃음이 느껴진다.


황소처럼 묵묵한 믿음, 도법자연의 시학


『황소가 가다』는 늦은 시기에 나온 시집인 만큼, 수십 년간 쌓여온 명상과 사유의 흔적이 담겨 있다. 시인은 자연에서 삶의 이치를 배우며 ‘도법자연(道法自然)’을 구현한다. “영원 속에서 순간을 쓴다”는 표현은 인상주의적 시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 시집의 가치는 나이와 경력이 아닌, 꺼내놓은 삶의 자락과 그 진정성에 있다. 흔치 않은 정직함과 고요함이 시편 곳곳에 깃들어 있다. 황소처럼 느릿한 걸음이지만, 그 발자국은 길이 된다. 시와 삶 사이의 담장을 넘은 박태만. 그의 첫 시집은 오래도록 읽히고, 깊이 각인될 언어의 흔적이다.

박태만의 시집은 정년 이후 삶이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임을 조용히 일러준다. 황소와 같은 걸음으로 살아온 이 시대 시니어의 오늘은, 여전히 길을 내는 시간이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시는 그 묵직한 활동을 응원하며, '황소'로 이승의 마지막 여정을 가는 모두에게 이 시집은 아름답게 밝혀준다.

박태만 시인은?

기해년 경상남도 진주시 내동면 삼계리의 한적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심양(尋陽), 본관은 태안(泰安)이다. 내동초, 동명중, 진주고를 거쳐 국민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육군 중위 예편 후, 전문건설공제조합과 주택도시보증공사, 메리츠증권에서 직장 생활을 거쳐 현재 무애문화재단 감사직을 맡고 있다.

뒤늦게 문학의 길로 들어선 그는 민용태 교수님의 문하에서 시를 공부하며 2018년 문학바탕 신인상을 통해 등단, 현재는 민용태시포럼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스트레이트뉴스 김태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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