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디스카운트 원흉' 일감몰아주기 철퇴 규정은 배임죄
미국과 달리 재벌 집단 존재하는 한국 특유의 경제 범죄 유형
폐지 시 규제 공백 발생 우려…재판 중 사건 면소까지 확산될 부작용
배임죄 폐지 논의가 진척되면서 법적 규제 공백 우려도 커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배임죄가 의율(법률 적용)되는 범죄는 공정거래법상 부당지원이나 사익편취 등 일감몰아주기 규정 위반 행위다. 배임죄가 없으면 이들 범죄에 대한 공정거래법상 과징금 처분이나 형법상 횡령 등의 규정만으로 불법을 견제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감몰아주기는 코리아디스카운트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어, 규율이 약해져 부정행위가 늘어나면 증시에도 찬물을 끼얹을 부작용이 우려되고 있다.
26일 공정거래위원회 등에 따르면 지난 5월1일 기준, 사익편취 규제대상 회사는 81개 집단(공시대상기업집단, 상호출자제한집단) 소속 958개사다. 전체 3090개 계열사 중 30.1%나 된다. 이는 전년 78개 집단 939개사보다 19개사(2.0%) 늘어난 수치다.
특히 기존 집단 소속 사익편취 규제대상 회사는 42개사 감소한 반면, 신규 지정 4개 집단(LIG, 대광, 사조, 빗썸)에서 61개사가 증가했다. 신규 기업집단에게서 총수일가 지분 요건(총수일가 보유지분이 20% 이상인 회사 및 그 회사가 지분 50% 초과 보유한 회사, 공정거래법 제47조 제1항)을 충족하는 일감몰아주기 규제 대상회사가 다수 추가된 것이다. 규제망에 속한 집단에게서 수치가 줄고, 규제 밖 집단에서 수치가 높은 점은, 사익편취행위 규제가 범죄 유인을 억제해 왔음을 반증한다.
미국에는 재벌 집단이 없어 재벌 총수일가 지분에 따라 적용하는 사익편취 규제와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규율도 없다. 즉, 일감몰아주기는 재벌 집단이 있는 한국 특유의 경제 범죄 유형으로, 부정행위가 반복 적발되고 그 구조적 원인과 환경적 유인을 근절하지 못하는 게 한국 증시가 저평가 되는 요인으로 꼽힌다.
공정거래법상 사익편취 규제에 따른 과징금은 이익제공 또는 수혜 법인에게만 부과되는 게 원칙이다. 사실상 수혜 당사자인 재벌 총수일가 등에 대한 부과는 제한적이다. 횡령죄도 재물을 가로챈 혐의가 구체적으로 입증돼야 해 간접적인 일감몰아주기 행위에 의율하기가 배임죄보다 훨씬 어렵다.
노종화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변호사, 회계사)은 최근 배임죄 관련 보고서에서 “국내에서는 지배주주의 불법적인 전횡이나 이사의 신의성실의무 위반이 있더라도 민사상 충분한 책임추궁이 이뤄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며 “배임죄 등 형사처벌이 지배주주나 재벌 총수의 무분별한 전횡을 방지하고 경제정의를 지키는 역할을 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재벌 대기업집단 총수나 지배주주가 배임죄로 처벌된 사례의 공통점을 꼽자면 지배권 강화, 터널링 등 사적인 이익을 위해 회사에 손해를 입혔다는 것”이라며 “민사상 적극적인 책임 추궁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재산적 법익 보호와 경제정의를 위해 여전히 형사적 규율이 긍정될 수 있는 사건이 존재한다”고 짚었다.
또한 “거래 특성상 내부 관여자가 아니라면, 애초에 거래나 행위 자체를 파악하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사건이 대부분”이라며 “현실에서는 민사책임 강화를 통한 배임행위 규율을 시도조차 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 판례로 본 배임죄의 '최후의 방어선' 역할
보고서가 제시한 사례를 보면, 고 신격호 창업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은 롯데시네마 매점 임대 관련 업무상배임 혐의가 유죄로 인정받았는데, 혐의 사실을 외부인이 파악하기 어렵다. 이들은 롯데시네마(과거 롯데쇼핑 시네마사업부)가 직영으로 운영하던 영화관 매점을 신영자, 서미경이 지배하는 법인에게 임대했다는 혐의로 기소(업무상배임)됐다. 검찰은 당시 롯데쇼핑의 시네마사업부 영업이익에서 매점이 차지하는 비중이 평균 50% 내외에 이르렀음에도 피고인들은 친인척 등이 지배하는 회사에 매점을 임대한 후 임대료(매출의 30% 내외)만 수취함으로써 회사에 약 778억원 상당 손해를 입혔다고 봤다.
1심은 매점을 직영으로 운영하지 않고 임대한 행위가 곧바로 배임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으나, 임대 목적과 경위, 당시 업무를 처리한 임직원들의 인식, 임차회사들의 배당방식 등에 비추어 보면, 회사를 위한 경영상 판단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친인척 등의 사적 이익을 위한 결정이었고, 영화관 매점 사업 특성과 수익, 매점임대 방식과 조건, 임대에 따른 결과 등에 비추어 임대수수료 등 거래조건이 롯데쇼핑의 이익에 반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검찰은 손해액을 특정했으나, 1심은 배임을 통해 얻은 재산상 이익을 특정할 수 없다고 보아 특경법 배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항소심은 일부 피고인들(서미경 외 1명)은 공범으로 인정할 수 있을 만큼 참여하지 않았다고 보아(기능적 행위지배 미인정) 무죄로 판단했으나, 신동빈 회장 등에 대해서는 1심 판단을 그대로 인정했다. 대법원도 항소심 판단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외에 조세탈루, 횡령 등도 유죄로 인정된 신동빈 회장은 징역 2년5개월, 집행유예 4년이 확정됐다(윤석열정부에서 사면 복권).
또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소유한 회사였던 팬재팬은 2007년경 일본에서 빌딩을 매입했고, 이 과정에서 CJ재팬이 팬재팬의 대출에 관해서 연대보증을 제공했다. 검찰은 이재현 회장이 CJ재팬으로 하여금 경영상 필요성이 없는 연대보증을 제공하도록 함으로써 재산상 이득을 취득했고 CJ재팬에는 손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특경법 업무상 배임 혐의로 기소했다.
1심은 특경법 업무상 배임을 유죄로 인정했고 항소심도 일부 오류를 바로잡긴했으나 1심을 사실상 인정했다. 그러나 상고심은 팬재팬이 연대보증 당시 채무변제능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없고, 일시적으로 건물가격이 하락하고 임대료 수입이 감소한 것은 2008년 이후 확산된 세계적 금융위기의 여파에 의한 것으로 연대보증 당시에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기는 어려워 보이고, CJ재팬에게 연대보증으로 인한 위험이 결과적으로 현실화되지 않았다고 봤다. 이에 배임으로 인한 이득액을 산정할 수 없어 업무상 배임만을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로 판단했고 파기환송심에서 업무상 배임만이 인정됐다. 이재현 회장은 조세포탈,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징역 2년5개월, 벌금 252억원의 형이 확정됐다(박근혜정부서 사면 복권).
이들 사례의 시사점은 총수일가로의 일감몰아주기 행위는 경영상 합목적성으로 감춰지고 내부적으로 은밀하게 이루어져 배임죄와 같은 형사적 규율 없이는 규제 및 처벌도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나아가 올들어 유가증권시장에서만 배임행위 발생 공시가 10여건에 이르며, 현재 재판 중인 배임 사건들도 다수 있는데, 폐임죄 폐지 시 면소돼 법적 구제가 어려워진다는 부작용도 제기된다.
일례로 조현범 한국앤컴퍼니그룹 회장은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가 현대차 협력사인 리한에 50억원을 빌려주고 채권 회수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징역 3년 실형을 받고 법정 구속돼 2심 중이다. 재판 중 배임죄가 폐지되면 형사소송법상 법원은 판결로써 면소를 선고해야 한다.
최근 논란이 된 자사주 활용 교환사채(EB) 발행도 배임죄가 없다면 책임 유무를 따지기 어려워진다. KCC의 자사주 EB 발행에 대해 라이프자산운용은 서한을 보내 “삼성물산 지분과 같은 비핵심 유휴자산”이 아닌 자사주 EB는 “지분가치 희석을 유발해 시장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반발했다.
이와 관련, EB 교환권 행사 시 소위 자사주 마법으로 불리는 의결권 부활에 따라 주권 희석으로 일반주주가 손해를 보지만, 이에 관한 상법상 이사충실의무(주주평등대우) 규정에 근거해 민사상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한다고 해도 배임죄가 없다면 부정행위를 입증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참여연대는 “민주당이 상법상 배임죄뿐만 아니라 형법상 배임죄까지 전면 폐지하는 방안을 주장하고 있다”며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에 가까운 전자와 달리, 후자는 실무상으로 계속 적용되면서 총수일가와 지배주주의 전횡을 억지하는 기능을 하고 있어, 이를 폐지하면 지배주주의 사익추구 행위를 처벌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스트레이트뉴스 이재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