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금보장 쏠림·선택의 함정·수탁자 책임 부재가 저수익 고착 원인
기금형 제도 원금손실 가능성 낮아... ‘푸른씨앗’ 성공사례 참고할만
퇴직연금 제도가 도입 20년을 맞았지만 노후 안전망 역할은 여전히 미완이다. 25일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연금부문 대표는 “500조원이 넘는 적립금이 낮은 수익률에 갇히고, 연금 대신 목돈 인출이 반복되면서 제도의 취지가 흐려졌다”며 “전문가 위임과 수탁자 책임을 갖춘 ‘기금형’ 전환이 구조적 한계를 넘어설 핵심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 한국퇴직연금개발원과 자기소개를 부탁하자면?
한국퇴직연금개발원은 대한민국 퇴직연금 제도가 단순히 ‘돈을 지키는 금고’에 머무르지 않고 ‘노후를 지키는 성장 엔진’이 되도록 제도 개혁 방안을 연구하고 정책을 제안하는 전문가 그룹이다. 펀드평가 시장을 개척해 성과를 감시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왔고, 지금은 실질적인 수익률 제고 방안과 제도 개선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퇴직연금 개혁 법안 발의와 정책 제안 과정에 참여하면서 제도의 근본적 진화를 위해 계속 힘을 쏟고 있다.
△ 퇴직연금 제도의 목적과 현주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퇴직연금은 노후소득보장 체계의 핵심 기둥이다. 2005년 도입 목적이었던 ‘퇴직급여 안전 보장’이라는 일차적 목표는 금융기관에 법적으로 분리 적립하는 구조를 통해 분명한 성과를 냈다. 하지만 도입 20년이 지난 지금, 100세 시대에 맞춘 ‘노후 안전망’이라는 궁극적 목표에는 여전히 못 미치는 상황이다.
명목상 500조원이 넘는 거대 자산이 최근 5년간 연평균 3%에도 못 미치는 저조한 수익률을 기록하면서 실질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게다가 퇴직연금이 ‘연금’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대부분 ‘목돈’으로 한 번에 인출되는 악순환도 굳어졌다. 다만 낮은 효율성을 바로잡기 위한 논의는 지금 매우 치열하게 이어지고 있고, 국회에서도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핵심으로 하는 개혁 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 해외 연금제도 대비 국내 퇴직연금 제도의 개선점은? 우리가 벤치마크 할 만한 해외 퇴직연금 운용 사례가 있다면?
가장 시급한 개선점은 근로자에게 운용 책임을 떠넘겨 노후 가치를 훼손하는 ‘선택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손실을 피하려는 심리 탓에 적립금의 80% 이상이 물가(상승률)도 이기지 못하는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묶여 있다.
벤치마크할 대표 사례는 호주의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다. 이 중에서도 퇴직시 하나의 계좌에 연금을 모을 수 있는 ‘스테플링’ 제도와 호주의 퇴직연금제도 개혁법안인 ‘YFYS’(Your Future, Your Super, Superannuation)가 특히 중요하다.
스테플링 제도는 근로자가 이직해도 퇴직연금 계좌가 평생 바뀌지 않고 근로자를 따라다니는 구조라 적립금이 여기저기 흩어지는 문제를 줄이고, 퇴직연금이 목돈 인출이 아니라 연금으로 이어지게 돕는다.
YFYS는 기금 운용을 엄격히 평가·규제해 성과가 부진한 기금은 시장에서 퇴출되도록 하는 장치다. 이런 경쟁 질서가 ‘좋은 기금만 살아남는’ 구조를 만들고, 근로자는 전문가가 책임지고 운용하는 기금형을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노후 보장을 받을 수 있게 된다.
△ 현재 2030 청년들에게 노후를 대비하기 위한 자산 전략을 추천한다면?
2030세대는 시간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다. 그래서 복리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이 핵심이다. 기금형 제도에 가입할 수 있다면, 예컨대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 ‘푸른씨앗’ 같은 방식이 열려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기금형은 전문가 운용과 규모의 경제를 바탕으로 연 5~7% 안팎의 안정적인 수익률을 추구하므로 가장 유리한 선택지다.
만약 기금형 가입이 어렵다면 TDF 하나를 골라 퇴직연금 적립금 전부를 장기적으로 맡기는 전략이 현실적이다. 전문가가 설계한 생애주기 자산배분을 그대로 따라가는 편이 개인이 단기 판단을 반복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예를 들어 25세에 첫 직장생활을 시작해 꾸준히 적립하고 연 7% 수준의 수익률로 운용했다면, 최저임금 수준의 적립만으로도 65세 은퇴 시점에 5억3000만원 안팎의 자산을 만들 수 있다. 임금이 지속적으로 오른다고 보면 현재가치 기준 10억원도 충분히 가능하다. 여기에 직장 퇴직연금 외에 IRP에 추가 납입하면 세액공제와 과세 이연이라는 장점을 더 길게 누릴 수 있으니, 중간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 상장지수펀드(ETF) 활성화가 퇴직연금 운용에 미친 영향은?
ETF는 퇴직연금 운용에 혁신적 활력을 불어넣은 게임 체인저였지만, 장단점이 분명한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좋은 점은 저비용으로 해외 주요 시장이나 다양한 섹터에 쉽게 분산 투자할 수 있게 되면서 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데 있다.
반면 퇴직연금은 30년 장기투자를 전제로 하는데, ETF를 일반 주식처럼 단기 매매에 쓰거나 특정 테마에만 과도하게 몰리면 노후 자산을 훼손할 위험이 커진다. 그래서 단기 운용의 유혹을 피하고 장기 안정성을 확보하려면 운용 책임을 전문가에게 위임하는 구조가 더 중요해진다. 현재는 로보어드바이저 중심으로 일부 일임 운용이 허용되는데, 이런 제도를 활용해 합리적인 자산배분을 꾸준히 따르는 편이 바람직하다.
△ 수익률이 낮은 근본 원인은 제도 설계 탓인가, 운용 행태 탓이라고 생각하는지?
비중으로 따지면 제도 설계의 한계가 90% 이상을 차지하고, 가입자의 운용 행태는 그 구조가 만든 결과에 가깝다. 수익률이 낮은 직접적 이유는 적립금의 80% 이상이 원리금보장형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쏠림은 계약형 제도가 가입자에게 복잡한 운용 책임을 떠넘기는 ‘선택의 함정’을 강요하기 때문에 생긴다. 게다가 현재 계약형 구조에서는 퇴직연금사업자에게 운용에 충실해야 할 의무나 주의 의무가 사실상 약하다. 결국 다수 가입자 입장에서는 손실을 피하려는 심리가 제도 구조에 의해 더욱 강화되고, 그 결과 원리금보장형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 ‘기금형 제도’ 도입이 현 퇴직연금 제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이 될 수 있을지?
기금형 제도는 현 퇴직연금의 한계를 넘어설 가장 확실한 해법이자 핵심이라고 본다. 내가 참여한 개혁 법안도 운용 전문성과 수탁자 책임을 확보하기 위해 기금형을 확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기금형의 효과는 분명하다. 우선 전문가가 장기 관점에서 위험을 관리하고 목표 수익률을 추구하며, 수탁자 책임을 명확히 지는 구조가 된다. 기금이 말하는 위험은 ‘실질가치(원금+물가상승률)를 지키지 못할 확률을 5% 이내로 통제하는 것’이어서 개인이 걱정하는 수준의 원금 손실 가능성은 크게 낮아진다.
또 소규모로 흩어진 자산을 대형 기금으로 모으면서 수수료를 크게 줄일 수 있고, 개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해외 투자나 인프라 같은 대체 자산에도 투자할 수 있다. 이미 중소기업 근로자를 위한 ‘푸른씨앗’ 기금이 전문가 일임 운용으로 높은 수익률을 내며 잘 작동하고 있다는 점도 이 방향의 근거가 된다.
△ 개인형퇴직연금(IRP)의 세제혜택은 실질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
IRP의 세제 혜택은 꾸준히 납입하고 은퇴까지 유지하는 가입자에게는 확실히 작동한다. 문제는 많은 가입자가 IRP를 ‘최후의 보루’ 같은 목돈으로 여기고 주택 구입이나 부채 상환을 이유로 중도 인출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렇게 중도 인출하면 세제 혜택을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라 실질 효과를 누리기 어렵다. IRP가 제 역할을 하려면 구조를 더 단순하게 만들고, 중도 해지를 줄일 수 있도록 제도의 유연성을 높이는 개편이 필요하다.
△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활성화는 수익률 제고에 효과가 있을지?
디폴트옵션은 가입자의 무관심 문제를 줄일 잠재력이 있지만, 지금의 한국형 사전지정운용제도는 오히려 수익률을 떨어뜨리는 쪽으로 작동하고 있다. 현재 구조가 사실상 ‘선택을 다시 강요하는 방식’이라 가입자가 더 안전한 원리금보장형을 고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래 취지대로라면 선택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적립되고, 원하면 빠져나오는 ‘옵트아웃’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TDF 같은 우수한 장기 상품이나 기금형 제도에 자동 가입되도록 설계를 고치는 게 핵심이다.
△ 향후 10년을 바라봤을 때, 퇴직연금 제도는 어떤 방향으로 개편돼야 하나?
앞으로 10년은 퇴직연금이 국민 노후를 책임지는 제도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그 방향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먼저 계약형 제도의 한계를 인정하고, 국민연금처럼 대규모로 집합 운용하며 수탁자 책임을 지는 기금형 시스템을 모든 근로자에게 넓혀야 한다. 그래야 500조원 규모의 자산이 잠자지 않고, 궁극적으로 1500조원 수준의 든든한 노후 안전망으로 커질 수 있다.
다음으로 연금 운용 주체를 대상으로 엄격하고 투명한 성과평가를 의무화하고, 공시 정보를 충분히 공개해 기금 간 선한 경쟁이 돌아가게 해야 한다. 시장 규율이 작동할 때만 성과가 낮은 운용 주체가 자연스럽게 개선 압력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퇴직금을 한 번에 인출해 소진하는 문화에서 벗어나, 평생 월급처럼 연금으로 받도록 유도하는 인센티브를 강화해야 한다. 이직하더라도 계좌가 통합돼 적립금이 계속 쌓이는 ‘통산’ 시스템을 완성하는 일도 같이 가야 한다.
△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연금부문 대표는…
김병철 대표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에서 연금금융 부문 경영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펀드평가사 KG제로인 대표를 역임했고 현재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안도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기금형 퇴직연금 개혁안 발의에 참여했다.
[스트레이트뉴스 조성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