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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영의 클래식리뷰]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3】
[송도영의 클래식리뷰]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3】
  • 송도영(고전평론가) (webmaster@straightnews.co.kr)
  • 승인 2018.06.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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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란 모두가 읽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안 읽는 이야기이다(A classic is something that everybody wants to have read and nobody to read ).” 미시시피 강 유역을 배경으로 개구쟁이 소년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그린 작가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이 고전에 대해 평한 말입니다. 스트레이트뉴스의 ‘클래식 리뷰’를 통해 고전은 어렵다거나 형편없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고전에 친숙해지고 마음껏 비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정론과 구원의 확실성에 대하여

16세기에 칼뱅( 1509 ~ 1564 )은 세 개의 기둥위에 세워진 종교적 교리를 제시했다. 

1. 가톨릭과 루터교와는 반대로, 하느님은 전지전능한 존재로서 인간과는 무한한 간격이 있는 초월자이자 절대자라는 구약성경의 하느님관을 받아들인 것이다.

2. 인간으로서는 측량할 길이 없는 하느님이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 구원하고 나머지 대다수는 영벌에 처해지도록 영원 전에 “예정했고” 이러한 “이중 예정”은 절대로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고해제도를 완전히 폐지함으로써, 죄를 지은 사람들이 사제의 죄 사함의 선언에 의해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린 것이었다.

이 교리로 말미암아, 신자들 중에서 아무리 경건한 자들과 관련해서도 구원여부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늘 불확실한 것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교회나 성직자들이 평신도들에 비해서 특별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영적인 지도를 받는 것도 큰 의미가 없게 되어 버렸다.

예정론과 전지전능하고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느님 개념이 결합되자, 운명론과 고독감과 극도의 불안감이 신자들에게 엄습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내가 구원받은 자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이 사람들 삶 속에서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지배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경건한 자들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고 거의 참을 수 없는 수준의 고통이었다.

따라서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얻어서 절망감을 극복하는 것이 삶의 절체절명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이루어낸 대표적인 종파는 17세기 칼뱅주의를 기반으로 해서 생겨난 청교도들이었다.

청교도는체계적인노동,부의추구,덕이있는행실을전면에부각시켰다.그모든것들은순전히“공리주의적인”활동이아니라섭리적인활동이되었다.여러가지이유로노동을신성시한것이다.17세기청교도신학자들과성직자들은노동이삶의목적이라고설파했다.

청교도 성직자 리처드 백스터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공리로 받아 들여서, 노동은 하느님의 명령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부자라고 해도 일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강도 높은 노동을 통해 예정론에 수반되는 지나친 의심, 불안과 도덕적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고, 자신이 구원받은 자에 속한다는 확신을 가져다준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직업노동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부의축적과관련해서도동일한변화가일어났다.부의세속적의미는퇴색하고,부의축적은섭리적으로재해석되었다.금욕주위적인개신교도들은부자체를추구하는것이아니라,부의축적을통해하느님나라의건설에기여하고자했다.하느님이다스리는이땅이부요로워진다면,하느님의선하심과정의는더욱선명하게드러나게될것이다.빈곤과결핍은전지전능한하느님을욕되게할뿐이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그들의 부를 축적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다. 부는 하느님의 부유한 나라를 창설하고 그 나라에 특별한 존귀를 더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신성시되었다. 

개신교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나는 구원받은 자에 속하는가”라는 질문과 관련된 “구원의 확실성”이었다.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확증”이 신자들에게 심리학적인 보상이 주어졌을 때, 그것은 경제적 전통주의를 붕괴시키고, 지금까지 공리주의적 동기나 예리한 사업 감각, 풍요로운 삶에 대한 욕망이 경제영역에서 이루어낼 수 없었던 대변혁을 이루어내는 동력이 될 수 있었다.

하느님의 축복과 은혜 가운데 구원받은 자라는 것을 확증해 주는 표지인 동시에 구원의 확실성을 나타내는 표지인 직업적인 노동을 지속적으로 해내기 위해서는 노력과 절제가 요구되었다. 그런 노동을 해낼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노동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신앙심을 갖고 있어서,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 구원받은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시금석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부의 축적과 성공적인 이윤 획득'도
구원의 확실성을 보증하는 표지다

부의 획득이 직업 소명 안에서 노동의 열매일 때는 하느님의 복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손길이 경건한 자들에게 역사해서 만들어 낸 열매이기 때문이다. 사업가나 상인인 신자들은 이윤추구를 통해 물질적으로 성공하여 부를 축적함으로써, 자신이 택함받은 자라는 것을 확인받고자 했다.

중세 가톨릭 수도사들은 “세속 밖에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탈세속적인 금욕주의를 수행했던 반면에, 청교도들은 상업과 교역을 비롯한 세속적인 직업 활동을 하며 “세속 안에서” 현세적인 금욕주의를 수행해야 했다. 그들에게 삶의 목표는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내세적인 것이었다. 그들에게 “세속”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림과 동시에 자신들의 “구원의 확실성”을 확증하는 무대일 뿐이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인들은 일생동안 세속안에서 수도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버는 현세적 금욕주의에 뿌리를 내린 체계적, 합리적인 생활양식인 “개신교 윤리”는 전통주의적 경제윤리를 밀어내고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하는 것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청교도 윤리가 널리 퍼지면서 상업과 기업가들의 이윤추구는 더 이상 탐욕적, 이기적인 자들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이 맡긴 일을 성실하게 해내는 정직한 사람들로 평가되었다.

베버에 의하면 이윤과 자본의 재투자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나라에 기여하는 일로 여겨졌고, 모든 부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으로부터 온다고 인식되었다. 청교도 자신들은 단지 하느님이 맡긴 부를 관리하는 청지기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부는 오직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어야 했는데, 하느님의 뜻은 이 땅에 풍요로운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됨으로써, 하느님이 더 큰 영광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치를 배격하고 근검절약을 실천하였고, 그 결과 소비가 억제되어 막대한 자본이 축적될 수 있었고 재투자가 가능하게 되어 근대 자본주의 발전을 이끌었다. 자신들이 돈을 벌어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해도, 그 부를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죄악으로 여겨졌다. 청교도들의 이러한 “근대적 윤리”와 그 윤리를 기반으로 한 생활양식은 “경제적 전통주의”를 뿌리 뽑고 자본주의 정신을 출현시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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